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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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선전
제랄딘과 미엘이 시녀들을 거느리고 저택으로 돌아가자 카트린과 크루그는 잘 준비를 시작했고, 림은 남은 집안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움직였으며, 형진과 유아는 뒤뜰로 가서 매크로 수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나 유아는 수련에 별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 제랄딘과 형진이 예선전에 함께 구경 가기로 한 일 때문이다.
형진은 그냥 난처한 기색을 보일 뿐 함께 구경 가는 일 자체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새다. 그냥 파리 떼가 꼬이지 않게끔 바람막이 역할 정도만 해주면 그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자인 유아는 조금 불안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바람막이든 뭐든 결국은 기본적인 호감과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부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랄딘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너무 예쁘고 기품 있으며 또한 강단 있는 여성이다. 게다가 가끔 방심했을 때 보여주는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 같은 여자인 유아로서도 절로 반해버릴 정도다.
“후우…”
유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형진의 음식을 먹고 가슴이 커졌다는 식의 얘기도 나오는데, 이 작고 앙증맞은 가슴은 아무리 그의 음식을 퍼먹어도 도무지 클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왜 한숨을 쉬고 난리야. 복 달아나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뻔히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며 한숨 푹푹 내쉬는 걸 다 봤구만. 형진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수련을 이어갔다. 그리고 매크로 수련이 끝난 뒤, 형진은 크루그와 함께 간단한 몇 가지 의뢰를 해결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늦은 아침 식사가 끝날 때쯤, 미엘이 시녀들을 데리고 별채로 들이닥쳤다.
“무슨…”
“시간이 얼마 없어요. 진님은 그냥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네?”
“자, 모두들 시작하세요!”
“네!”
미엘의 말에 그녀가 데리고 온 시녀들이 눈을 빛내며 형진에게 달려들더니 줄자를 가지고 여기저기 치수를 재기 시작한다.
“주인님, 오늘은 식재료를… 응?”
“아, 저기 유아님도 부탁해요.”
“네!”
“에? 에에?”
당황한 유아가 움찔 놀라며 뒷걸음질 쳤지만, 시녀들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달려들어 여기저기 치수를 재기 시작한다.
“자, 잠깐만요. 이게 무슨?”
“뭐긴요. 치수 재잖아요. 설마 그 차림으로 아가씨 옆에 설 생각은 아니셨겠죠?”
“…”
형진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 보았다. 요리를 위해 깨끗한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왕국 최고 가문의 아가씨를 에스코트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모습이다.
“저는… 어째서…”
역시나 시녀들에 의해 강제로 치수가 측정되는 고초를 겪고 있던 유아가 당황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미엘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네? 설마 진님 혼자 보내려고 하셨어요?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
유아는 대꾸하지 못하고 얼굴이 확 붉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어젯밤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잠을 설쳤던 일을 후회했다.
곧바로 시녀들은 가방 같은 것을 잔뜩 가져오더니 형진과 유아에게 이런 저런 옷을 대보기 시작했다. 실제로 입어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속성으로 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시녀들은 명문 브라드로슈 가문의 본가에서 일하는 베테랑이었고, 그 실력은 이미 프로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역시 너무 화려한 것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네요. 잘 어울려요.”
일부러 맞춘 듯한, 블랙과 화이트가 절묘하게 조화된 세련된 정장을 갖춰입은 형진과 유아의 모습은 누가 봐도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오죽하면 카트린이 크루그에게 귓속말로 두 사람이 오늘 결혼하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을까.
“잠시만요.”
미엘은 뭔가 빠진 것이 없는지 둘의 모습을 앞뒤로 확인하더니, 이내 마법을 펼쳐 형진과 유아의 머리색을 바꾸었다. 형진의 머리색은 보랏빛이 살짝 도는 흑발로, 유아의 머리카락은 본래의 갈색 머리에서 밝은 빛의 은발로 바뀐다. 단지 머리카락 색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확 바뀌어 버린다.
형진은 슬쩍 품에서 꺼내는 척 하며 눈가리개를 꺼내 썼다. 그렇게 얼굴의 반을 가리자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알아보기 어려운 인상이 되어 버린다.
“괜히 뭔가 있어보이는데요, 아저씨.”
“끙… 이 모습이 되어서도 아저씨냐.”
형진은 크루그의 말에 앓는 소리를 내고는 인벤토리에서 하나 더 남아도는 눈가리개를 꺼냈다.
“자, 이거 쓰고 있어.”
“네?”
유아는 뭔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얼떨떨해 있다가 형진이 얼굴에 눈가리개를 씌워주자 가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와아…”
그리고 놀랐다. 분명히 전면을 다 가려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주위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거 비싼 거니까 잃어버리지 마.”
“가, 감사합니다.”
미엘이 신경써서 변장을 시켜주긴 했지만, 유아가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는 건 역시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둘이서 같은 모습으로 눈가리개를 착용하고 있으면 누가 봐도 일행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테니 쓸데없는 해프닝을 막을 수도 있다.
과연 놀라우신 공포와 죽음. 설마 이런 일을 예상하시고 눈가리개를 하나 더 내리신 것인가.
어쨌든 그렇게 얼굴을 반쯤 가리자, 평소의 조금 바보 같았던 인상이 어쩐지 날카롭고 신비롭게 바뀌어 버린다. 얼굴을 가렸어도 매료나 후광 같은 호구신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차려입고 제랄딘 옆에 자리를 잡으면 누구라도 그녀를 함부로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카트린과 크루그도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만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은 것이, 아니 변장한 것이 미안했는지 유아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크루그도 카트린도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 딱히 함께 가고 싶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크루그는 그렇다 쳐도, 카트린은 아직 그런 격렬한 군사적 행사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회복되지 못했다.
잠시 기다리자 제랄딘의 마차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별채로 들어섰다.
“그럼 다녀올게.”
“네, 편히 즐기다 오십시오.”
“다녀오겠습니다. 공주님.”
“네. 너무 멋지세요. 기사님.”
“하하.”
크루그와 카트린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그들은 제랄딘의 마차에 동승했다.
“어머,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리네요.”
앞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나온 제랄딘의 말에 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라니, 은근히 말속에 뼈가 있는 느낌이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정말로 저희들이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죠. 아, 일단 두 분은 다른 나라에서 몰래 방문하신 귀족 정도로 해둘 거에요. 가풍 자체가 상당히 과묵해서 하루에 한두 마디 할까 싶은 분들이라는 설정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일일이 반응하실 필요도 없어요.”
제랄딘의 쾌활한 설명에 형진은 물론이고 유아마저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뭡니까. 그 편의주의로 가득한 성의 없는 발상은.”
“괜히 이것저것 쓸데없는 설정을 가져다 붙여봐야 트집 잡히기 쉬우니까요. 차라리 말을 안 하면 간단한 일이잖아요. 아, 물론 저희들의 관람석은 다른 이들과 격리되어 있으니까 거기서는 목이 터져라 응원해도 괜찮아요.”
“하하.”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저택을 벗어나 예선전이 열리게 될 성 밖의 경기장으로 향했다. 예선전이라고는 해도 그 경기의 당사자가 바로 명문 기사단으로 이름 높은 브라드로슈 가문의 라스미어 기사단이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원들이 관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상대할 기사단은 그리 대단한 곳은 아니에요. 하지만 저희 기사단도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린 상태는 아니니까 제법 볼만한 경기가 될 거에요.”
제랄딘의 설명에 유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 최상의 상태가 아니어도 괜찮은 건가요?”
그 말에 답한 것은 형진이었다.
“라스미어 기사단은 단순히 예선 통과가 목적이 아니니까. 컨디션이란 것이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상은 가장 중요한 결승전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관리하는 편이 좋은 거야.”
“아하…”
“아하는 무슨. 제대로 이해하기는 한 거냐?”
“물론 아니에요.”
“풉!”
쓸데없는 곳에서 당당한 유아의 대답에 제랄딘과 미엘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잠시 그렇게 웃던 제랄딘은 깜빡했다는 듯이 손뼉을 작게 마주치며 형진에게 말했다.
“아, 맞다. 그리칸에서 아까 전령이 왔는데, 기젤님이 전투식량 용기를 수매하는 것 때문에 곤란에 빠지신 모양이에요.”
“무슨…”
“신전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어내는 바람에 수매는 물론이고 보관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양이에요. 일단 진님의 저택에 보관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매 대금도 저희 쪽에서 지불할 수 있도록 했으니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 거에요. 다만 이대로 계속 수매를 해도 괜찮은지 진님에게 물어봐 달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래요?”
신전에 일을 맡길 때 신전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맡겨도 괜찮냐는 질문이 나왔었고, 형진은 별 생각 없이 그러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그 기젤이 곤란해 할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만들어낸 것인가.
“제가 신경 써야할 일인데 수고로움을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 저희 가문에서 쓸 물품들인걸요. 그래서 일단 수매는 계속 하도록 지시를 해뒀어요. 혹시 다른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제랄딘이나 형진 모두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지부장 기젤이 곤란해 할 정도라는 대목의 심각성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차는 예선전이 열리는 곳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마침내 도착했다.
“어, 저기 좀 봐.”
“브라드로슈 가문의 마차다. 혹시 제랄딘 영애인가.”
“기다려봐. 마차가 멈춰 섰어.”
왕국 최고 가문의 깃발을 앞세운 기사에게 호위를 받는 마차가 멈춰서자, 사람들은 기대 가득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그렇게 주위의 모든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마침내 마차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랄딘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시녀도 아니었다. 보랏빛이 도는 검은 빛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하지만 얼굴의 반을 가린 기이한 눈가리개를 한 신비한 분위기의 남성이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린 것이다.
제랄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남자가 내민 손 위에 살짝 손을 얹은 채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내 큰 충격에 빠졌다.
“누, 누구지? 저 남자?”
“몰라.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별다른 핑크빛 열애설이나 하다못해 작은 소문조차 거의 없던 제랄딘이 의문의 남자와 같은 마차를 타고 관람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쿡쿡. 보세요. 모두들 놀라고 있어요.”
표정은 그대로인 채 눈으로만 웃는 제랄딘의 모습에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나. 천하의 진님을 누가 해코지한다는 거에요.”
“끙.”
뒤이어 유아가 진의 에스코트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렇지 않아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졌다. 형진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반쯤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호구신이 부여한 매료의 능력과 후광은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휘어잡을 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지? 저게 누구야? 누구 아는 사람 없어?”
“나도 모른다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엘이 내린다.
“어쩐지 비교 당하는 느낌이에요.”
“그럴 리가요. 미엘님도 충분히 귀여우십니다.”
“쳇.”
본신만 드러내 보일 수 있어도 이런 식의 대접은 받지 않았을텐데. 미엘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주책이라는 생각에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런 행동이 지켜보던 사람들 중 몇몇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이 경우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