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88
288====================
60. 확대
“그런데 그건 확실한 거지?”
그렇게 왁자하게 떠들며 지나가던 그들중 하나가 문득 은밀한 목소리로 묻는다.
“네. 그것에 대한 건 파티말로 하겠습니다.”
“좋아.”
그들은 이내 자기들끼리만 들리는 파티말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형진으로서는 그 내용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예상하기로는 지금 이들이 이 마을에 나타난 목적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
슬쩍 골목으로 들어가 은신과 잠행을 펼치고는 가까이 따라 붙는다. 역시나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이 무언가에 대한 욕망과 기대로 타오르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진다.
놈의 파티는 총 일곱 명. 모두 같은 문양이 들어간 휘장을 어깨에 달고 있다. 휘장의 문양은 처음 보는 것이지만, 아마도 같은 클랜 또는 길드임을 상징하는 듯 하다. 그들은 그렇게 잠시 자기들끼리 무언가 의견을 교환하더니, 이내 두세명 단위로 흩어져 마을의 상점과 거래소에서 무언가를 구매하기 시작한다.
형진이 뒤쫓는 녀석은 우선 대장간에 들러 장비를 수리한 다음 연금술사의 노점 가운데 몇 군데를 들러 비약 같은 약물 몇 가지를 구매했다. 그렇게 잠시 마을 안에서 필요한 것을 갖추고 난 그들은 다시 한데 모여서 마을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파티 사냥인가.
계정 삭제의 빌미가 되었다고는 해도, 사실 이름도 모르는 저 남자에 대해 엄청난 원한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형진 자신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이 눈에 띄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하던 일을 멈추고 뒤를 쫓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모를 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어찌 되었든 과거의 편린과 마주하는 것은 뭔가 신기한 기분이다. 물론 선연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엘리시온 내내 혼자 생활만 들이파는 식의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길드나 클랜 같은 것도 들지 않은 상태였다. 나중에 명장이 되자 스카웃 제의가 오긴 했어도 그땐 이미 사실상 그런 식의 무리 짓는 행위 자체가 불필요한 시점이었고.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소리 없이 조용히 뒤를 쫓는다. 공포와 죽음께서 내리신 은신과 잠행의 능력은 너무나 훌륭해서 놈들은 그가 뒤쫓는 기색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놈들은 마을에서 벗어나 으슥한 숲길에 도달하자 일제히 품에서 검은 두건 같은 것을 꺼내 뒤집어썼다. 신분이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는 느낌보다는, 자신들이 어떤 단체의 일원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행태 같다. 일종의 유니폼 같은 느낌이랄까.
“가자.”
“흐흐, 기대 되는데 이거.”
“거기서 나오는 거 맞지?”
“물론이죠.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요.”
비밀 대화는 끝이 났는지 다시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섰다.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봐서는 특별한 몹이나 아이템 같은 걸 노리고 움직이는 모양.
놈들은 그렇게 조금 더 숲 안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늪지대에 도착했다.
“어, 사람 있는데?”
“치우면 되죠.”
“하긴.”
놈들의 말대로 늪지대에는 서너명 정도의 파티가 한창 사냥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사냥하고 있는 것은 바로 늪지 트롤. 일반적인 트롤보다 약간 작은 체구를 지닌, 배불뚝이 형상의 몬스터이지만, 그래도 인간보다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온다! 지금!”
“큭! 막았어! 형!”
“오냐!”
탱커가 막으면 그 순간 좌우의 두 명의 딜러가 상처를 내고 후방의 마법사가 화염 마법으로 상처를 지져 재생을 막는 정석적인 사냥법이다. 사제가 없긴 하지만 치명적인 타격만 받지 않으면 물약으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으니 저 정도만 되도 꽤 안정적인 사냥이 가능하다. 물론 애드가 돼서 두 마리 이상의 늪지 트롤과 싸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얼라들 참 귀엽게 노는구만.”
“하지만 우리 구역에서 잔챙이들이 활기차게 뛰노는 꼴을 그냥 두고 보는 건 곤란하지.”
“확인해봐.”
“볼 것도 없어요. 인원 열 명짜리 소규모 클랜 소속이에요.”
“응? 어떻게 알아?”
“전에도 한 번 가지고 논 적이 있거든요.”
“아하. 그것참. 불쌍한 놈들이네.”
하지만 말 하는 것과는 달리 놈들은 일사분란하게 위치를 잡더니 곧바로 사냥중인 파티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어? 뭐야?”
“악!”
“뒤치기다!”
“젠장! 암살단이다! 튀어!”
사냥 중이던 파티원들은 갑자기 뒤에서 치고 들어온 녀석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내몰렸고, 체력이 낮은 마법사가 손 쓸 틈도 없이 사망하자, 다른 파티원들 역시 놈들의 협공에 하나 둘씩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이 사냥하던 늪지 트롤은 잠시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한놈만 팬다는 신조를 지켜 최초 사냥 중이던 파티의 격수 하나를 죽이는 위업을 달성했다.
“킥. 이놈 이거 템 떨궜는데요.”
“뭔데?”
“어디보자. 헐. 용자의 반지. 이거 퀘보상 아니에요? 그나마 강화도 안 됐어.”
“열라 불쌍하네. 아직도 그런 걸 차고 다니는 거야?”
“절로 동정심이 느껴진다. 하긴 그러니 이렇게 허접한 거겠지만.”
놈들은 죽은 유저들을 빈정거리며 그들이 사냥하던 트롤에게로 칼끝을 돌렸다. 얼핏 무질서해 보이면서도 제법 정교하게 짜여진 협공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늪지 트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이내 숨이 끊기고 말았다.
“별 거 없는 거 같은데.”
트롤이 떨군 룻을 살피며 한 놈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놈이 대꾸한다.
“뭐. 늘상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하긴. 괜히 희귀템인 건 아니지.”
“파멸아. 앞장서라.”
“네.”
놈들은 이내 늪지를 돌기 시작했다. 트롤이 보이면 협공으로 순삭해 버리고, 트롤을 사냥중인 파티가 보이면 그들 역시 뒤치기로 죽여 버렸다. 전형적인 사냥터 통제에 들어간 것이다.
“후…”
형진은 느긋하게 뒤를 쫓으며 놈들의 행태를 살피다가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암살단이라.”
놈들이 뒤집어 쓴 두건이 그런 의미였나. 물론 지금 보여지는 행태는 아무리 봐도 암살단보다는 꼬장단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지만.
하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하기야 저 놈은 처음부터 그랬다.
“다행이다. 네놈이 그런 쓰레기라서.”
아무리 게임 안이라고는 해도 공포와 죽음의 계율을 충실히 지키는 집행자인 자신이 아무나 막 죽이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간에 좀 딴짓을 하다가 천벌을 받기는 했지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대상은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암, 그렇고말고.
더구나 암살단이라니. 감히 공포와 죽음의 뜻을 사칭하고 다니는 자들이 이렇게 횡행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저쪽 세계였다면 대번에 척살령이 떨어지고도 남는 일이다. 충실한 공포와 죽음의 신도로서, 이런 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아아암! 그렇고말고!
형진은 비로소 장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놈들에게 다가서다가 멈칫 했다.
가장 간단하게 놈들을 쓰러뜨리는 방법은 인스턴트 킬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면 다른 놈은 몰라도 전에 갑옷을 깨먹었던 녀석은 대번에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놈은 다시 한 번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고를 넣을 것이고, 이것은 자칫 앞서와 같은 일의 반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로그 기록이 남지 않는 지금의 형진에게 있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허세와 망상의 주의를 끌게 된다면 이건 꽤 골치 아픈 일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손을 못 쓰는 것인가. 저렇게 뻔히 눈앞에서 설치고 다니는 꼴을 보고서도.
그건 아니다. 이건 의외로 간단하다. 인스턴트 킬을 쓰지만 않으면 되는 문제니까.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형진은 여러 가지 공격 수단이 많이 있다.
라이언하트를 발동한다. 형진은 그렇게 온몸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사냥 중인 놈들의 뒤를 들이쳤다.
“컥!”
비약의 효과가 떨어졌는지 트롤을 치다 말고 뒤로 물러나 무언가 약을 들이키려던 놈 하나가 용오름에 처맞고 손 쓸 틈도 없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다.
“뭐야?”
“뒤치기? 우리한테?”
“이상한 스킬을 쓴다. 조심해!”
어쩐지 즐거운 기분이다. 형진은 작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는 작달막한 놈에게 갈고리를 던졌다.
“으앗!”
활을 겨누던 놈은 무언가가 날아와 자신의 활을 낚아채고 강한 힘으로 끌어당기자 기겁을 하다가 이내 검은 촉수 같은 것에 연타를 맞았다. 순식간에 이어지는 연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녀석은 갑자기 날아든 강렬한 폭렬차기에 얻어맞고는 그대로 늪지 한복판으로 머리부터 떨어쳐 처박히고 말았다.
“명렬아!”
“이 자식 뭐야? 저게 무슨 스킬이지?”
“격투가? 아니, 몽크인가?”
그 때, 최초의 일격으로 하늘에 높이 떠올랐던 녀석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형진은 놈이 바위 위에 떨어져 낙하 데미지가 가해지는 순간 체인 소드를 뽑아들더니 그대로 휘둘러 목을 휘감아 버렸다.
“촤차차차차착!”
“끄아아아악!”
통증 자체는 리미터가 발동해 차단되었다 치더라도 체인 소드의 톱날 같은 조각들이 목을 갈아버리는 그 끔찍한 느낌은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너 이 자식!”
놈이다. 그때처럼 황금빛 갑옷을 걸친 건 아니지만, 더 견고해 보이는 검은 갑옷을 걸친 채 놈이 방패를 앞세우고 차지 어택을 시도한다. 하지만 어설프다. 비슷한 스타일의 오귀스트가 싸우는 모습을 하도 봐서 그런가 동작 자체가 너무 어설프게 느껴진다. 장비 같은 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오귀스트의 움직임은 이 녀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었다.
딱히 이동기를 쓸 것도 없이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몇 발자국을 옮기자 놈의 차지 어택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무위로 돌아가 버린다. 마스터 레벨에 도달한 라이언하트는 지금 이순간에도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헉!”
순식간에 뒤를 잡힌 놈이 헛바람을 일으키는 순간, 형진은 놈의 등판에 대고 용오름을 먹였다.
“흐아아악!”
그러자 놈의 몸이 하늘 높이 솟구친다.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데미지 자체는 얼마 안 될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잠시나마 행동 불가 상태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용오름은 아주 유용한 스킬이다.
“미친!”
“지영이 형!”
놈의 이름이 지영이었나. 꼭 여자 이름 같네. 하지만 기억하긴 쉬울 것 같다. 요새 들어 어째 남자 이름은 영 기억하기가 싫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놈들에게 계속해서 용오름을 먹여 주었다.
그건 한 마디로 능욕이었다. 일단 한 번 걸리면 하늘 높이 치솟아 손도 발도 쓰지 못한 채 허우적대다가 떨어지며 낙하 데미지를 입는다. 떠오른 순간 물약을 먹으면 체력이야 어떻게 되돌릴 수 있다 쳐도, 장비들의 내구도가 팍팍 깎여 나가는 건 도무지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다.
“이 개자식아! 정정당당히 겨루잔 말이다!”
“으아아악!”
화가 잔뜩 치밀어 올라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도, 이제 형진은 마치 저글링을 하는 느낌으로 놈들을 공중에 계속해서 공중에 띄워 올리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퍽!
마침내, 한 놈의 방어구가 낙하 데미지를 견디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으아아악! +6 흑암 건틀릿이!”
흑암 건틀릿이 뭔지는 몰라도 +6까지 강화된 걸 깨먹었으니 속이 좀 쓰리긴 하겠다.
그렇게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오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한 놈이 귀환 주문서를 찢었다. 하지만 놈의 몸 주위에 마법진이 나타나는 순간, 형진은 그것을 향해 꼬리를 날렸다.
[인스턴트 킬! ‘귀환 마법진’이 소멸했습니다!]“헉!”
귀환 주문서를 사용한 놈은 물론이고, 반사적으로 꼬리를 날린 형진 역시도 놀라버렸다. 인스턴트 킬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미 발동한 귀환 주문서의 효과마저 깨뜨릴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다.
“그렇단 말이지.”
엉겁결에 인스턴트 킬을 써버리긴 했지만, 이건 아이템을 부순 것과는 또 다른 일이다. 설마 인스턴트 킬이 이런 식으로 주문서의 효과마저 깨뜨릴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형진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인스턴트 킬이라는 메시지가 확정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형진의 입가에는 사악한 미소가 지어졌고, 놈들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