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62
00662 150. 대면 =========================
형진이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빙긋 웃고 있는 왕성. 그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급하게 움직이며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영토의 일부에 대규모 재앙이 발생한 상황이니 왕성 또한 비상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이번에 나타난 것은 멀리서도 확연하게 그 거대한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인 티폰이다. 원근감이 무시당하는 느낌으로 구름을 뚫고 솟아나는 티폰의 거대한 모습은 왕성은 물론이고 수도 인근의 시민 대부분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형진이 목격한 도시의 모습, 이를테면 다소 무질서하게 마차 등이 뒤엉켜 달리는 광경들은 그런 사태로 인해 야기된 혼란의 여파라 할 수 있었다.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왕성에서도 가장 엄중하게 경비되는 대전. 그곳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찬란한 옥좌에 앉은 소년 황제 아운 아우스 라만 3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이 본 것을 되새기고 있었다.
티폰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운 제국의 황성 델 아운까지 지진의 여파가 밀려왔다. 그들이 앙그림이라고 부르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국력을 지닌 나라의 황성답게 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바깥을 살펴볼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대신들을 휴가 보낸 탓에 모처럼 귀여운 시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안락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라만은 갑작스런 그 지진에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갔고, 때마침 서서히 떠오르는 티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다. 급히 달려온 호위장의 손에 이끌려 얼른 안전한 내전의 피신처로 자리를 옮겨야 했지만, 거대한 티폰의 모습은 호기심 많은 소년 황제의 망막에 깊게 각인되어 버렸다.
“제국 함대를 파견했으니 곧 소식이 도착할 것입니다.”
라만의 혼잣말을 들은 것인지 휴가 중에 급히 달려온 국방대신 므나산이 고개를 조아리며 조용히 고한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라만이 피신처에서 나와 대전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로 인한 재앙이 일단락된 덕분이다. 내전 안에 피신해 있었던 탓에 라만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산이 무너지고 화산이 폭발하며 거센 지진이 덮치고 해일이 밀려오는 모습은 수도의 시민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치 세상의 종말과도 같았던 그 재앙들은 어느 순간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고, 그 모든 현상을 일으킨 거대한 무언가 역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야에서 없어진 뒤였다.
부랴부랴 대기중이던 함대를 급파하긴 했지만, 사실 그 함대는 문제를 일으킨 무언가를 격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거대한 재앙이 휩쓸어 버렸을 거라 예상되는 제국 동부의 현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구호병력인 셈이다. 제국 함대는 스스로의 전력을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앞서와 같은 거대한 재앙이 상대여서야 승산이 있을리 없다. 자연이란 어설픈 자만심으로 상대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폐하. 함대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일단 내전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떠실지.”
그 말대로다. 아무리 강력한 제국 함대라도 역풍이 상대여서야 빠르게 움직이기 힘들다. 특히나 제국의 북부 해안은 연중 강한 동풍이 부는 곳이기 때문에 자체적인 기관을 장착한 함선이라도 제 속력을 내기 곤란하다.
라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더 버티고 앉아 있는다고 뭔가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전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더 확실하게 현재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니 일단 나와 있었던 것뿐이다.
“알겠다. 나는 일단 돌아가 있도록 하지. 경들도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황공하옵니다. 폐하.”
시종과 시녀, 그리고 호위병들을 주렁주렁 거느리고 다시 내전으로 향한다.
그 흔한 형제 자매는커녕 가장 가까운 친척이 사돈의 팔촌쯤 되는 상황이라 신하들은 물론이고 국민들마저 애지중지 하는 중이다. 만약 라만이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돈의 팔촌 같은 잡놈들이 계승권 같은 헛소리를 하며 몰려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치고받기 바쁜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그가 황제로서 군림하고 있는 아운 제국은 해협을 제외하면 대륙으로부터 직접 넘어올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는지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침공하기 힘들다. 실제로 아운 제국은 나라가 열린지 400년이나 지나는 동안 본토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들어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만약 라만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이런 저런 명분으로 승냥이 같은 대륙의 국가들이 손을 뻗쳐올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라만은 반드시 오래오래 살아서 자손을 아주 많이 남겨야만 한다.
“폐하…”
내전에 들어서자 아직 앳되어 보이는 소녀 하나고 몸을 비비 꼬며 그를 맞이한다. 일전에 나이 먹은 여자는 징그럽다고 한 마디 했더니, 이번엔 아주 대놓고 어린 애를 보낸 모양이다.
물론 라만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이자 책임에 대해서는 아주 명확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굳이 비교를 하자면 여느 또래들보다도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어려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겪은 탓에 철도 꽤 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조숙할 거라고 기대를 하는 모양이지만, 그들은 뭔가 요점을 잘못 짚은 상태다.
라만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처지를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대신들 사이에서 자신의 후손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몸을 베베 꼬며 나름 요염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이 소녀도 대신 중 누군가의 딸이거나 그 일가 친척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여러 여자를 안으면 그만큼 훌륭한 자질을 지닌 황손을 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라만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황손을 보게 되면 그것이 또한 자신의 목을 죄는 족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조숙한 소년 황제는 너무나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대신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들의 입맛에 따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조금 멍청한 황손이다. 많은 아이가 태어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미약해진다면, 지금처럼 애지중지 모셔지기는커녕 쓸데없이 야망이 큰 누군가의 손에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잘 조절을 해야 한다.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수의 자손을 적당한 간격으로 낳아야만 한다. 적어도 자신의 힘이 제국 내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자신의 현재 위치를 최대한 활용해야만 한다. 그러니,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몸을 베베 꼬고 있는 이 소녀는 오늘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조차도 이런 식의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할 정도로, 제국의 황위는 아주 위험한 자리다.
“후…”
지친다. 이런 때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면서 낮잠이라도 자고 싶지만, 그런 기미가 보이면 방금 전의 소녀가 맹수 같은 모습으로 욕조나 침대로 뛰어들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겠지만, 여자들 입장에서도 일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심정일 테니 극단적인 행동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쨌든 그녀들 입장에서는 튼튼한 아들만 낳으면 그걸로 일생이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서글픈 일이지만, 그게 현실이다.
“물수건을.”
“네. 폐하.”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살짝 지쳐 보이는 라만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얼음물 안에 담가 두었던 물수건을 짜서 그의 이마와 팔을 닦아준다. 앞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던 소녀가 그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라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했다가는 분명히 엄한 곳을 마구 더듬어 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잘 하기나 하면 몰라. 의욕만 앞서서 마구 주물러대는 그 손길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소년인 라만에게는 폭력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후… 빨리 자라는 마법 같은 건 없는 걸까.”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작은 목소리. 솔직히 대답을 바라고 중얼거린 말도 아니다. 그저 혼자서 푸념에 가까운 한 마디를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 말에 갑자기 대답이 돌아왔을 때, 라만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게 네 소원인가.”
“헉!”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자신을 본 척 만 척 하는 소년 황제의 모습에 점차로 풀이 죽어가고 있던 소녀, 그리고 석상처럼 버티고 선 채 혹시라도 위해를 가할 누군가를 단숨에 처단하기 위해 대기중인 호위병들까지도, 분명히 아무 것도 없었던 장소에서 마치 허깨비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옷차림의 남성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합!”
사극에서처럼 웬 놈이냐 같은 말을 내뱉지도 않는다. 오직 황제를 지키기 위해 태어나고 훈련받은 충실한 호위병들은 허락도 받지 않고 남자 하나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주어진 역할에 맡게 움직였다.
세 명의 호위병이 무기를 뽑아들고는 라만을 에워싸며 둘러섰다. 그 셋을 제외한 다른 모든 호위병들은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이 불청객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형진이 모습을 드러내고 제대로 호흡 한번 내쉴 겨를조차 없이 그런 반응이 나왔다.
씩.
형진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추종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잘 훈련된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절로 흡족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도 종종 잊어버리는 일이 많지만, 그 역시 한 나라의 왕인 건 마찬가지니까.
호위병들은 숙련된 움직임으로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곳을 노려 공격을 가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만 휘둥그레 뜬 채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는 물론이고, 유사시 호위병을 대신해 몸으로라도 어린 황제를 지킬 준비를 하고 있는 시종이나 시녀들 또한 이 갑작스런 침입자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엇?”
“읏?”
하지만 결과는 그들이 생각한 것과 달랐다. 분명히 노린 곳을 정확히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검으로부터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검이라도 사람의 살이나 뼈를 벨 때는 그에 걸맞은 느낌이 전해져 와야 하는 법인데, 그런 감각이 전혀 손끝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라만의 전면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이 급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찢었다. 그것은 호부의 일종으로 강력한 마법 해제의 효과를 지닌 물품이다. 너무나 강력해서 자칫 실내에서 사용했다가는 그 안에 놓여진 마법 물품들까지 죄다 망가질 수 있는 그런 물건이다.
다른 호위병들의 손에서 부서진 장식품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일종의 경보 장치로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그것을 알리기 위한 물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미처 알아볼 틈도 없었지만, 최초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움직인 시점에서 이미 호위병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경보 장치를 빠짐없이 발동시킨 상태였다.
호위병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형진의 모습이 환각이라고 생각했다. 시종이나 시녀들은 물론이고, 마법 방어구를 착용한 자신들에게까지 영향을 줄 정도라면 실로 막강한 위력을 지닌 환각일터. 그래서 발동 즉시 일정 범위의 마법 효과를 모조리 해제시키는 호부를 사용했지만, 그 효과는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다.
파파팍!
황제의 거처에는 예상외로 마법 물품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라만이 이 세계에서도 최고 수준의 마법 문명을 구가하고 있는 제국의 황제임을 감안하면 다소 의외일 수도 있지만, 어지간한 것은 인력으로 모두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황제의 신체에 위해가 생길 수 있는 마법 물품을 처소에서 사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법이 파훼되는 소음이 들려오자, 얼른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환각이 깨지면서 실체가 드러난 침입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파훼된 것은, 소녀가 몸에 두르고 있던 환각과 매료 마법이었다.
“…”
소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는 순간, 두르고 있던 마법들이 파훼되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직 황제에게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한 소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 장소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거… 어쩐지 미안한 짓을 해버렸군.”
“…”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설문 안하신 분들, 주무시기 전에 얼른 설문 하세요.
안하면 나쁜 어른이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