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71
00671 151. 사절 =========================
라만이 신하들을 이끌고 내전을 나가자, 카트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내전의 정중앙에 보호와 균형의 성물을 소환해 놓는 일이었다.
여신의 형상을 본뜬 성물은 소환되기가 무섭게 황제가 침전으로 사용하는 곳답게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내전 전부를 성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이 공간 안에서는 여신이나 그 권한을 대리하는 형진을 제외한 다른 누구도 카트린의 의지에 반하여 누군가에게 해를 입힐 수 없게 된다.
“오오.”
“이것이 여신의 성물인가.”
노스페라투들은 은은하게 퍼지는 신성력을 느끼며 감탄했다.
비록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지만, 그들은 또한 보호와 균형이 자신들을 돕는 신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카트린은 형진이 동생으로 여기는 존재. 비록 어린 아이라고는 해도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는 일이다. 가볍게 보기는커녕 오히려 귀히 여기고 떠받들어야만 하는 입장이다.
“모두 고생하셨어요.”
카트린의 말에 즈라탈이 노스페라투들을 대표해서 답한다.
“황녀님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즈라탈님도요. 저는 이만 가서 쉴까 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경계와 호위를 위한 인원을 남기고 저희들도 휴식을 취할 생각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별 말씀을. 당연한 일입니다.”
카트린은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라만이 특별히 정해준 거처로 향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크루그가 뒤를 따랐다.
“힐리에타.”
“네. 아버지.”
“가서 도와드리도록.”
“알겠습니다.”
노스페라투도 아닌 힐리에타를 즈라탈이 굳이 이 장소에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식으로라도 형진의 가족과 친분을 쌓도록 하기 위함이다.
힐리에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눈치를 보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목석 같은 형진 때문에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물론 형진을 목석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글러먹은 일이지만, 어쨌든 바깥이 견고하면 안을 공략하는 것 또한 병법의 한 가지. 그런 의미에서 카트린은 아주 좋은 공략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일이 잘 되면 시누이 역할을 하게 될 대상이니 미리미리 친해져서 나쁠 건 없는 일이다.
물론 그래봐야 누구처럼 김칫국을 마시는 것에 불과하지만.
힐리에타는 카트린과 크루그가 묵기로 한 방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두드렸다.
“네?”
“힐리에타입니다.”
“들어오세요.”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짐을 잔뜩 꺼내놓고 있던 카트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 본다.
“무슨 일이시죠?”
“아버지가 황녀님께서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도와드리라고 해서요.”
“그래요?”
라만에게 스스로 황녀라고 소개를 하긴 했어도, 카트린은 실제로 왕족이나 황족다운 생활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주 어릴 적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다, 엘 파르드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로는 크루그와 함께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형진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공주님 공주님 하면서 보살펴 주긴 했어도, 진짜 공주다운 생활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녀가 필요할 것 같았으면 요정들이라도 데리고 왔을 터. 하지만 막상 도와주겠다고 온 사람을 매몰차게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딱히 불편한 건 없는데. 아무튼 이렇게 오셨으니 조금 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힐리에타는 미소를 지은 채 카트린에게 다가서려다가 문득 어디선가 전해지는 미약한 살기에 움찔하고 말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기척조차 내지 않은 채 크루그가 벽 한 켠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오빠가 낯을 좀 가리거든요.”
“그, 그렇군요.”
아무리 봐도 지금 자신에게 전해지는 이 시선은 낯을 가린다든가 하는 식의 반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힐리에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크루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옷가지를 정리하는 카트린을 돕기 시작했다.
여기까진 사실 별 탈이 없었지만, 힐리에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시중을 받아본 경험은 있어도, 들어본 경험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노스페라투의 외동딸쯤 되면 사실상 한 나라의 공주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실제로도 그런 식의 생활을 영위해 왔다. 그런 그녀이다 보니, 가방에서 옷을 꺼내어 종류에 맞게 착착 정리하는 카트린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버거울 정도다.
“휴.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빨리 끝났네요.”
“그런… 가요.”
힐리에타는 어쩐지 자괴감이 들어 버렸다. 이래서야 돕기는커녕 민폐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카트린은 비어버린 가방을 인벤토리에 넣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좀 씻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크루그에게서 미약한 살기가 찌릿 하고 전해진다. 아무래도 일종의 경고가 아닐까 싶다. 허튼 짓 하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식의.
다행히 목욕하는 일에 있어서는 힐리에타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길게 기른 갈색 머리카락을 감는 일이라든가, 등을 닦는 일 같은 건 아무리 카트린이라도 역시 좀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융성한 제국의 황제가 사용하는 곳답게, 욕실은 제법 현대적인 느낌으로 꾸며져 있었다. 도자기로 빚은 커다란 욕조라든가, 비틀면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 시설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물론 그래봐야 범선 안에 꾸며진 욕실에 비하면 여러 모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고마워요. 덕분에 편했어요.”
“별 말씀을요.”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 몸을 닦는다. 카트린은 욕조 안의 물에 균형의 권능을 사용하고는 그곳에 몸을 담근 채 휴식을 취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사실 카트린은 꽤 피곤한 상태였다. 어른스럽게 회담을 주도하긴 했어도, 그녀가 아직 어린 소녀라는 사실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곤하세요?”
“네. 조금요.”
“그럼 범선에서 쉬시는 편이…”
“괜찮아요. 게다가 그쪽에는 오빠랑 여신님들이 있는 걸요.”
“…”
무슨 의미일까. 형진과 여신들이 알콩달콩 지내는 공간을 침범하고 싶지 않다는 걸까. 아니면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뜻일까.
조금 의아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캐묻거나 하지는 않는 힐리에타의 모습에 카트린은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힐리에타님.”
“네.”
“힐리에타님도 저 같은 어린 아이가 사절단을 맡은 것이 주제넘다고 생각하시나요?”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내비치기라도 한 것일까. 힐리에타는 놀라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설마요. 그럴 리가요.”
“어째서요?”
“뭐라 해도… 신께서 결정하신 일이고, 게다가 카트린님은 비록 어리긴 해도 신의 동생분이시고.”
힐리에타의 말에 카트린은 바로 반박했다.
“물론 진 오빠가 결정한 일이긴 하지만 그건 제가 졸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고, 진 오빠의 동생이긴 해도 친오빠도 아닐뿐더러 제가 신인 것도 아닌데요.”
“그거야…”
힐리에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카트린이 그저 조금 똘똘한 인간 소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새삼스럽게 깨달은 탓이다. 형진의 동생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보면, 이런 식으로 국가나 세계의 중대사를 책임지고 수행할 인물로서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힐리에타의 모습에 카트린은 빙긋 웃더니 욕조 안에 몸을 기대며 다시 말했다.
“전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걷지 못했어요.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저를 위해, 크루그 오빠는 언제나 저를 지게에 앉혀 놓고 다녔죠.”
“…”
힐리에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카트린의 말을 듣기만 했다. 이 어린 소녀가 대답이나 호응을 원하고 자신에게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카트린은 잠시 욕조 안의 물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작은 목소리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오빠들은… 아직도 제가 지게 위에 앉아 있는 줄로만 아는 것 같아요.”
난 이미 스스로 걸을 수 있는데.
목소리를 전해들은 것은 아니지만, 힐리에타는 어쩐지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는 별 얘기 없었다. 그들 남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힐리에타가 이러니저러니 충고를 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아닌 것도 있었고, 카트린도 더 이상 자신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트린이 그렇게 몸과 마음의 피로를 달래고 있는 동안, 황성 델 아운을 향해 한 대의 마차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쯧. 멍청한 황성의 밥버러지들. 고작 철부지 황제 하나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서 누굴 오라 가라야.”
“배, 백작님.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씀은…”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시원하게 밀어버린 스킨헤드. 오른쪽 눈가에는 마치 붉은 번개가 지나가는 것 같은 형상의 흉터가 자리 잡고 있다. 눈알은 동그랗게 나와서 동공 위아래의 흰자위까지 다 보이는데, 눈꺼풀 위아래마저 고리 모양인 것이 영락없이 삼국지의 유명한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고리눈이다.
헤어스타일이나 눈가의 흉터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험상궂은데, 눈까지 그 모양이니 어지간한 사람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렇다고 몸은 좀 나은 편이냐. 그렇지도 않다. 의사들이 입는 가운의 품을 좀 더 넉넉하게 만든 것 같은 장옷을 걸치고 있는데도, 울룩불룩하게 솟은 근육들이 어김없이 드러나 있다. 체구는 또 얼마나 큰지, 두 사람이 앉도록 놓여진 좌석에 혼자 앉아 있는데도 시야가 꽉 차 보일 정도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좌석 맞은편에 앉아서 화를 내고 있으니, 그를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은 관리는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저 식은땀만 삐질거릴 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여정도 슬슬 끝나간다는 점. 어쨌든 바한 백작을 황성으로 데리고 오는 일만 마치면 관리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것이 어디 그렇게 마음 먹은 대로만 되는 것이던가.
갑자기 잘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멈추어 서더니, 호위 중이던 기사 가운데 하나가 다가온다.
“무슨 일입니까.”
관리가 얼른 묻자, 기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자, 잠깐… 나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다 와서 무슨 일이지. 설마 황성 바로 코앞에서 도적 같은 것이 나타났을 리는 없고.
투덜대며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관리는 기사가 손을 들어 가리켜 보이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입만 떡 벌린 채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하는 관리의 그같은 모습이 바한 백작의 흥미를 끌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 거대한 덩치를 마차에서 빼낸 바한 백작은 관리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무언가를 보고는 그렇지 않아도 험상궂은 고리눈을 부릅 뜨고 말았다.
“저건!”
그들이 놀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황성 상공에 줄을 지은 채 정박해 있는 일곱 척의 새하얀 범선들이었다.
바한 백작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맞는지 확인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글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지만, 과거 전장을 휩쓸었던 경력이 있는 바한 백작은 그 명성에 맞게 재빨리 평정을 되찾고 상황을 파악했다.
불길이 피어오른다든가, 달리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올라와 있는 깃발의 종류나 초소의 모습을 봐서는 경계가 강화된 것 같지만, 하나둘 씩 켜지는 불빛을 보니 도시에도 피해가 생긴 건 아닌 모양이다. 즉, 전투가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중은 아니라는 얘기다.
바한 백작은 얼른 다시 마차에 오르더니, 다른 이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는 건가! 어서 달려라! 황제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
방금 전까지 황제 욕을 하며 투덜거리던 주제에, 이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모습. 관리와 기사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임무를 다시 떠올리고는 황성을 향해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