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stors who see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255)
택규랑 둘이 가려고 했는데, 얘기를 전해들은 현주 누나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헨리는 자신이 운전하겠다며 재빨리 따라붙었다.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
누가 봐도 현주 누나를 수행하려는 것 같은데.
우리는 1층에서 잠시 누나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손으로 옷깃과 머리를 매만지던 헨리는 내가 쳐다보자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둘이 잘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전부 진후랑 택규 덕분입니다.”
“우리가 한 게 뭐 있다구요.”
그동안 도와주겠다고 여러 차례 말만 해놓고, 정작 해준 건 없지 않나?
“아닙니다. 그날 실론호텔 개관파티에 불러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하긴, 그날 밤 모든 일이 벌어졌지. 그렇지 않았다면, 누나의 마음을 열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지.
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그럼. 둘이 잘 된 건 다 우리 덕이지. 안 그런가, 친우여?”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지.
얘기를 하는 사이 현주 누나 내려왔다.
헨리가 운전석에 앉았고, 택규가 조수석에, 그리고 나와 현주 누나가 뒷자리에 앉았다.
왜 같이 가냐는 택규의 물음에 누나가 대답했다.
“장세명 교수님 재작년에 학과장 되셨다는 얘기 들었는데, 찾아뵙지도 못 했거든. 이번 기회에 찾아뵙고 인사드리려고.”
“아, 맞다. 누나 가르쳤던 교수님이겠네.”
“나한테는 은사님이라고 할 수 있어.”
현주 누나는 한국대 경영학과를 나왔으니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도 그 교수님 강의 듣고 싶었는데, 수강신청 경쟁이 장난 아니던데요.”
“강의도 꽤 재밌어. 나중에 복학하게 되면 꼭 들어봐.”
“하긴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잘 설명하시니까요.”
그나저나 내가 복학을 할 수 있을까?
헨리가 말했다.
“장세명 교수님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영국병에 대해 분석하신 책은 감명 깊게 봤습니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경제학자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모를 수가 없지.
“‘무덤에서 요람까지’요?”
“맞습니다.”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패러디한 거다.
장세명 교수가 유명세를 얻게 된 계기는 영국경제를 분석하는 논문을 쓰던 도중 출판한 한 권의 책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영국은 비용은 늘어나는데, 노동 생산성과 제품 경쟁력은 떨어지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임금을 동결하거나 비용을 줄이려고 하면, 노동자들이 사방에서 파업을 벌였다.
오죽하면 유럽에서는 이를 영국병(The British disease)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리고 이 병을 치료한 사람이 바로 철의 여인이라 불린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다.
대처는 공공부문을 개혁하고, 경제전반에 걸쳐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이에 반대해 노조가 들고 일어나자, 공권력을 투입해 가차 없이 밀어붙였다.
이러한 정책들 덕분에 영국병을 극복하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큰 성과를 거뒀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대처에 대한 평가가 지금도 극과 극으로 갈리는 거고.
장세명 교수는 그 책을 통해 영국병의 원인과 극복과정, 그리고 현재 영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각종 부작용과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무덤에서 요람까지’는 영국 내에서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미국과 유럽, 그리고 한국에도 출판됐다.
장세명 교수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케임브리지에서는 종신 교수직을 제안하면서까지 붙잡았을 정도다.
하지만 결국 한국대 교수직을 맡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한국경제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논문을 쓰고 책을 출판하는 등 경제학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택규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 아들인지 딸인지는 아직 몰라?”
“의사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 일찍 알면 재미없잖아.”
“누나는 어느 쪽이 좋은데?”
“둘 다 괜찮아.”
묻지 않았음에도 헨리도 말했다.
“저도 다 좋습니다.”
* * *
우리는 광화문에 있는 서성경제연구소에 도착했다.
회의실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먼저 도착해있던 임진용 회장은 우리를 맞이하며, 사람들을 소개시켜주었다.
“이쪽은 김대영 소장입니다.”
김대영 소장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강진후 대표님. 평소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다고 회장님을 졸랐는데, 오늘 드디어 뵙게 되었네요.”
“안녕하세요, 소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 역시 뛰어난 석학으로 이번 아시아시장 투자계획을 분석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임진용 회장은 헨리와 현주 누나를 보며 축하해주었다.
잠시 후, OTK배터리를 개발한 김호민 교수가 왔고, 이어서 김명준 교수와 장세명 교수가 함께 도착했다.
장세명 교수는 안경을 끼고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전형적한 학자의 모습이었다. 실제 나이는 50대 초반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는 악수를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명성이 자자한 강진후 대표를 여기서 보게 되네요.”
“저 역시 학생 때부터 교수님 명성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습니다. 쓰신 책도 거의 다 읽었어요.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주 누나는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랜만에 봬요.”
장세명 교수는 눈을 크게 뜨며 반가워했다.
“이게 누구야? 오현주! 그동안 잘 지냈어?”
현주 누나는 웃음을 지었다.
“예. 진작 찾아 뵀어야 하는데,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야.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우리 학과 학생이 골든게이트 한국지사장이 될 줄이야. 내 제자라고 다른 교수님들께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는지 알아?”
김명준 교수님은 짐짓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내 제자는 OTK컴퍼니 CEO니까. 21세기 가장 뛰어난 투자자이자, 대재난에서 미국을 구해낸 영웅이기도 하고.”
“…….”
제발 그만하세요.
“아! 임신했다는 소식도 기사로 봤어. 축하해. 혹시 이쪽이……?”
장세명 교수의 시선에 옆에 있는 헨리로 향했다. 난 현주 누나가 뭐라고 소개할지 궁금해졌다.
설마 아이 아빠나 동거인이라고 하려고?
헨리 역시 뭔가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 현주 누나는 편하게 말했다.
“예. 이쪽이 남편 될 사람이에요.”
그 말에 헨리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아졌다. 그는 한국어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헨리입니다. 교수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인사를 끝낸 우리는 각자 자리에 앉았다.
난 한국 제조업 상황에 대한 장세명 교수의 의견을 구했다. 이곳에 오기 전 먼저 산업단지 구상계획을 메일로 보냈으니,아마 검토하고 왔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긴장해 떨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모인 학회나 컨퍼런스에 참석해 강의한 적도 많으니, 이런 자리가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겠지.
“현재 한국경제의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양극화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으로 대표되는 양극화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경제에서 중요한 건 당위성이 아닌 이익이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중산층을 늘리고, 양극화와 소득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게 옳기 때문에 아니라, 그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사회불안이 커지며 비용이 발생하고, 경제성장이 떨어진다. 반면 중산층이 많을수록 소비와 저축이 늘어난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이유기도 하다.
임진용 회장이 물었다.
“그 해결책이 연대임금제도인가요?”
연대임금제도의 기본 개념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장세명 교수가 처음 꺼낸 얘기는 아니고, 이전부터 여러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사항이다.
이것을 실행한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다.
모든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웨덴 역시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혼란과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이때 총리직을 맡은 타게 에를란데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제안했고, 긴 대화와 설득을 통해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말 그대로,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생산성이 높은 산업의 이윤은 높아지지만, 생산성이 떨어지는 기업과 산업은 임금을 감당하지 못해 자동적으로 몰락하고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때문에 이때 각종 복지정책이 같이 실행되었다. 이를 통해 생산성이 낮은 직종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은 직업교육을 받고,다시 생산성이 높은 기업에 재취업했다.
덕분에 스웨덴 제조업은 미국, 일본, 독일 등과 경쟁에서도 아직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웨덴의 경우처럼 연대임금제도는 사회 전체의 시스템에 받쳐주어야 가능합니다. 때문에 당장 한국에 적용시키기는 무리입니다. 하지만 한 산업단지 내에서는 충분히 실현 가능합니다. 그리고 성공을 거둔다면 다른 곳으로도 점차 확대할 수 있겠지요.”
과거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많이 차이난다고 해봐야 20퍼센트 안팎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 배는 기본이고 심하면 세 배, 네 배도 벌어진다. 여기에 각종 복리후생을 포함하면 격차는 훨씬 커진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대기업 공장이나 중소기업 공장이나 하는 일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럼에도 임금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이익을 대기업이 독식했기 때문이다.
개별기업의 협상력은 당연히 대기업이 우위에 있다. 덩치가 큰 대기업일수록 협상력이 크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몫은 계속 줄어들게 된다.
결국 이걸 그대로 놔두면 임금격차는 앞으로도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연대임금은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일정한 비율과 원칙에 따라 원청과 하청이 골고루 나눠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원청이 압력을 가해 단가를 후려칠 필요도 없고, 노동자들은 대기업에서 일하든 중소기업에서 일하든 상관이 없어집니다. 어차피 받는 임금은 비슷하니까요.”
원청인 대기업, 하청인 중소기업,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은성차를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각각 9500만 원(은성차), 4500만 원(1차 협력업체), 2500만 원(사내 비정규직 및 3차 협력업체)을 받는다.
결국 은성차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다른 노동자의 몫을 가져갔다고 볼 수 있다.
연대임금제도는 이들의 임금을 서로 연계시켜 6천만 원, 5천만 원, 4500만 원쯤으로 격차를 최대한 줄여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기업은 개별 노조의 파업을 줄이고 하청업체들과 상생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고, 중소기업은 경쟁력을 확보해 자체적인 기술개발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또다시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된다.
기업은 적정한 임금과 안정적 운영이 보장되니 좋고, 노동자는 양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어서 좋다. 국가는 법인세를 걷을 수 있어서 좋고, 지자체는 일자리가 늘어나 지역경제가 살아나니 좋다.
그렇다면 이 좋은 걸 대체 누가 싫어할까?
당연히 이미 대기업 노조에 소속된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더 낮은 임금으로 자신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한마디로 자신이 1억을 받으니, 기업이 그 이하의 금액으로는 고용하지 말라는 것이다.(비정규직과 협력업체 직원은 얼마를 받든 상관없지만)
때문에 오래전부터 얘기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반대로 논의가 한발자국도 진전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걸 할 수 있을까?
한국에 투자할 만한 자본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만, 기존 노조의 영향력에서 최대한 자유로운 사람이 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나다. OTK컴퍼니는 한국에 공장이 없고, 직접 고용하는 직원이라고 해봐야 수십 명에 불과하니까.
김대영 소장이 말했다.
“은성차를 참여 시킨다고 하면, 그쪽 노조가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양대 노총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테구요.”
임진용 회장은 날 보며 말했다.
“욕도 엄청 먹겠는데요.”
비난의 화살은 당연히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OTK컴퍼니에 쏟아지게 될 것이다.
택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얘가 욕먹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젠 적응 돼서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그치?”
“…….”
아니야, 나도 상처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