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29)
129 순풍
잔인한 달 4월이 흥겨움 그 자체로 지나갔다.
5월에는 대한전력 발주가 더 줄었다. 한 납기에 2천 대 정도밖에 나오지 않아, 공장에 여유가 넘쳐 났다. 여유 인력을 설비 제작으로 돌리니, 유재준 이사도 한숨을 돌리기 시작했다.
공장은 여유가 있을 때를 잘 활용해야 한다.
풀 캐파로 돌렸을 때 나온 문제들을 서둘러 개선해야 하고, 공장 정리와 청소도 이때가 아니면 쉽지 않다. 때맞춰 생산동 2층 분리 공사가 마무리돼 공장 재배치도 진행됐다.
생산 현장이 앞으로 있을 전투 준비에 매진하고 있으니, 난 내 일을 하러 가야겠다. 내 갈 길은 대한전력!
“네, 대한전력 배전계획과 송정길입니다.”
“과장님. 프라임일렉트릭 지정수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이쿠,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뭐 또 좋은 소식 있으십니까?”
“하하. 자료 하나 들고 찾아뵐까 하는데요.”
“뭐 또 개발하셨습니까? 안 그래도 뭐 하나 나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 여지없으시네요. 시간 괜찮으시면, 지금 바로 오시죠?”
“지금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목소리에서 반가움이 가득 묻어 나온다. 크리스마스 이브 때 영화관에서 봐서 그런지 괜히 더 친근한 느낌이다. 내 말만 잘 들으면 승진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가?
“박 대리님. 저랑 같이 대한전력 가시죠.”
“네, 알겠습니다.”
덕준이의 빈자리를 잘 메워 주고 있는 박아름 대리도 부지런히 키워 내야지.
연일 계속되는 공사로 흙먼지가 가득인 혁신산단을 벗어나자마자 5월의 훈훈한 바람이 차바퀴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연비는 떨어지겠지만, 이 바람을 마음껏 쐬고 싶다.
“대리님은 대한전력 처음 가죠?”
“네,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지, 직접 가 보는 건 처음입니다.”
“앞으로 신제품 계속 개발할 테니까 대한전력 갈 일 많아질 겁니다. 대한전력 직원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부담 갖지 말구요.”
“네에.”
갑 중의 갑, 슈퍼갑인 대한전력이라 심장이 콩닥콩닥할 것이다.
나와 덕준이도 대한전력 처음 갔을 때 그랬지. 지금이야 주변에 건물도 많이 들어섰지만, 그때는 대한전력 본사 건물만 우두커니 서 있어서 압박도 장난 아니었다.
주차장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서려는데, 주차장 옆에 자리한 흡연 부스 앞에서 송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과장님! 왜 나와 계셨습니까?”
“담배 생각도 나고, 금방 오실 것 같아서 좀 기다렸습니다.”
“요새 좀 한가하시죠? 저희 2월에 죽을 뻔했습니다.”
“하하. 여기저기서 그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지역본부마다 변압기 없다고 난리라서 계획보다 많이 발주되긴 했더라구요. 뭐 세상 일이 계획대로 됩니까?”
“연체 안 받으려고 엄청 고생했습니다.”
“들어 보니까 태반이 연체했다고 하던데 대단하십니다. 물량 엄청났을 텐데.”
2월 1차 발주가 8,300대, 5월 1차 발주가 2,240대. 이러니 변압기 회사들이 죽어 나가지. 물량이 쏟아졌어도 인건비와 연체료 내고 나면 본전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전력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자, 들어가시죠. 저희 처장님이 원래 외부 일정이 있었는데, 취소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거 부담되네요. 아마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 사업은 자신감이지!
“송 과장님. 박 처장님하고 같이 일하시니까 어떠십니까?”
“뭐 직장 상사가 맘에 들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다. 기술이 있으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아니까.
건물 들어가는데 예전처럼 인적 사항 적는 절차도 없다. 신분증도 당연히 맡기지 않고. 대한전력이 보증한 사람이란 뜻인가!
“안녕하십니까? 배전계획처장 박윤찬입니다.”
“반갑습니다. 프라임일렉트릭 대표 지정수입니다.”
“저번에 뵙고 두 번째 뵙네요. 아주 소문이 자자합니다. 박씨 물고 오는 제비라고 말이죠. 하하.”
박씨 잘 물어 올 테니 다리 부러지면 잘 고쳐 주게나. 놀부처럼 억지로 다리 부러트리지 말고.
“우리 송 과장 얘기 듣자 하니, 변압기 신제품 개발에 성공하셨다고 하시던데요?”
“네, 맞습니다. 저희가 일반형 변압기와 패드변압기는 고효율과 컴팩트로 성능을 개선했고, 이번엔 아몰퍼스변압기를 고효율로 개발했습니다. 박 대리님, 설명 부탁드릴게요.”
“아, 네.”
차에서 내릴 때까지 역력해 보였던 긴장한 표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거대 기업 거물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 아주 좋다. 취업 안 되는 지방대 철학과라도, 뽑아서 잘 가르치면 인재가 되는 법이지.
“저희가 개발한 제품은 고효율 아몰퍼스변압기입니다. 기존 제품보다 효율은 0.5퍼센트 개선됐습니다. 일반형과 패드변압기 개선품보다 효율 개선 폭이 더 큽니다. 여기에 기존 50kVA 용량부터 부착되는 방열기를 전부 제거했습니다. 체적이 30프로가량 줄어들었고, 절연유 사용량도 10프로 절감됐습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허허. 아몰퍼스변압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크기를 이렇게 줄이고 절연유도 덜 들어갔으면 온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데이터를 믿어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온도가 기존보다 다소 높긴 하지만, 국제 기준에 안정적으로 들어옵니다.”
“뭐, 전기 연구원 인증 받으면 문제 될 것이 없으니까요. 아몰퍼스는 소음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알고 계시죠? 소음 때문에 민원 들어와서 가 보면 하나같이 아몰퍼스예요. 우리 시험관들이 합격 준 것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문자님 아니었다면 우리도 소음 때문에 골치 아팠을 것이다. 큰돈 들이지 않는 간단한 방법으로 10데시벨 정도 낮춰 버렸으니. 문자님! 알라뷰 소마치!
“저희도 소음을 잡느라 힘들었습니다. 정리한 자료 보시면 최초 시제품은 55데시벨이 나왔습니다. 여러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결국 45데시벨까지 낮췄습니다. 노하우가 축적되면 40초반까지 낮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0초반요? 그거면 패드변압기 소음 기준도 통과하겠는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 데이터라면 저희로서는 아주 좋지요. 일단 전기 연구원 성적서부터 받아 주시죠. 그거 나오면 다시 얘기해 봅시다.”
영업본부장으로 승진한 전 처장보다는 반응이 뜨뜻미지근해 보이지만, 뭐 대수랴. 전기 연구원 성적서만 나오면 게임 끝이지.
간단한 교섭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송 과장도 마중한다고 따라 나왔다. 마중은 무슨, 담배 피우러 나왔겠지. 나도 한 대 생각나긴 하네.
“사장님, 저희 처장님이 감정 표현이 많이 약해요. 아마 저 정도 반응이면 엄청 놀라는 것일 겁니다.”
“전에 윤 처장님은 감탄사 연발하셨잖아요? 좀 적응이 쉽지 않네요. 하하.”
“아직 공식 발표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아몰퍼스변압기 소음 문제만 해결되면 구매량을 늘릴 계획이거든요. 가만있자, 고효율 변압기 줄여서 아몰퍼스로 늘리니까 사장님은 똔똔이겠네요?”
“그렇습니까? 저희 올해부터 고효율 주상변압기 우선 배정 받는데, 물량 줄면 안 되는데요. 우선 배정 끝나고 그때 다시 얘기할까요?”
“하하하. 사장님 손해 안 보도록 머리 잘 굴려 보겠습니다. 전기 연구원 성적서는 한 2주 정도 걸리겠죠?”
“네, 이미 시제품 보내 놓고 시험 의뢰해 놓긴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거 또 구매규격 개정하느라 골치 좀 아프겠습니다.”
“제가 다음에 식사 대접 제대로 하겠습니다. 3만 원 이하로. 하하.”
송 과장과 작별하고 차에 타자마자, 박 대리가 한숨을 내쉰다. 긴장이 풀렸겠지.
“박 대리님. 긴장했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별것 아닌데 괜히 떨었네요.”
“송정길 과장이랑 자주 얘기하면서 친해지면 좋을 거예요. 한 부장이 길 잘 닦아 놨으니 어려운 일은 없을 겁니다.”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아주 좋다. 이게 순풍이지.
회사에 도착해 순풍을 맞으며 담배 하나 꺼내 무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럼 그렇지. 이놈의 전화, 내가 꼭 담배 물면 울려 줘야지. 누구냐? 박민창 사장?
“아이고, 박 사장님. 요즘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하하. 사장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밤낮이 없습니다. 진짜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들 이름을 따 도연테크를 창업한 박 사장. 내가 우리 조합 회원사들 물량을 잔뜩 넘겨줘서 회사가 급성장하고 있다.
생계를 걱정하던 평범한 월급쟁이에서 내 도움으로 어엿한 사장이 된 것을 넘어, 이제는 연 매출 100억을 바라볼 정도가 됐다. 아직 멀었어! 더 키워 주겠어!
“앞으로도 팍팍 밀어 드릴 테니까 직원들 월급 제때 잘 주는 좋은 사장님 기대하겠습니다. 하하.”
“더 열심히 해야죠. 이 말씀 드리려고 전화드렸는데, 태양전기 소식 들으셨습니까?”
“태양전기요? 아휴, 관심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입니다.”
태양전기가 아직까지 내 귀에 들리다니, 질긴 인연이다.
“태양전기가 부도가 난 모양입니다. 듣기로는 기업 회생 절차 신청했다고 하는데, 아마 청산 절차 밟을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나주에서 불어오는 5월 바람이 왜 이리 좋나 했더니, 결국 태양전기가 문을 닫는구나! 질긴 악연도 이제 끝이로구나!
“아무리 어려워졌다고 해도 그리될 수 있습니까?”
“수출한다고 일 벌여 놨다가 수습을 못한 모양이에요. 자재업체들도 계속 대금을 못 받으니까 공급을 끊어 버렸고. 은행 대출 못 갚으면 문 닫는 것 금방이죠.”
“그래도 기업 회생 절차 들어가면 어떻게든 살려 주지 않습니까?”
“자재업체들이 채권단 구성해서 대책 회의하고 그러는데, 회생 가치가 너무 낮아서 그냥 청산하는 것 말고는 답이 안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자재업체들도 한 푼이라도 받으려면 그렇게 하는 게 나으니까요.”
기분이 좋다.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날벼락에 힘들겠지만, 최현아의 무능과 독선이 화려하게 막을 내린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다. 무능하면 남 말이라도 잘 들어야지. 무능한데 독선적인 성격까지 갖췄으면 답은 뻔하다.
그래도 나름 민수 시장에서는 메이저로 군림했던 태양전기가 화무십일홍 신세가 되다니, 씁쓸하기는 개뿔. 망할 회사는 빨리 망해야 한다.
온갖 못된 짓으로 ‘좃소기업’의 대명사로 군림했던 태양전기는 선량한 중소기업들에 꼴뚜기일 뿐이다. 어물전 잘 좀 해 보겠다는데, 꼴뚜기가 보이면 다 같이 욕먹는 법이지. 직원 복리 후생으로 석식과 기숙사 제공을 얘기하는 중소기업. 이제는 좀 사라지자.
기쁜 소식을 들고 공장장을 찾아갔다. 태양전기 창립 멤버로 그 고생을 하며 회사를 키워 낸 공장장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정말이야? 결국은 그렇게 됐구만.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지?”
예상대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공장장 표정에 많은 그림이 담겨 있다.
“공장장님이랑 상무님이 그 고생해서 키웠으니 좀 착잡하시죠?”
“착잡은 무슨. 고생한 직원들 대하기를 공장서 키우는 누렁이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회사는 망해도 싸지. 자네도 알겠지만, 나나 희철이가 얼마나 고생해서 키웠나. 그렇게 반대하는데도 돈 욕심 부리느라 중고 사다가 그 짓 하고. 나나 희철이 쫓아내려고 그 대접을 하고 말이야.”
청춘을 다 바친 회사였기에 미련이 있을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다. 담배 한 모금 빨고 나서는 속이 다 후련하다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면 지랄 같은 회사들은 왜 꼭 누렁이를 한 마리씩 키우는지.
“우리 회사 망하라고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졌으니, 저도 속이 후련합니다.”
“최가네는 그래도 지들 먹고살 돈은 다 챙겨 놨을 것이네. 최홍집 그 사람이 돈 욕심이 얼마나 많은데.”
태양전기 창업주에게 꼬박꼬박 사장님 소리를 빼 놓지 않았던 공장장이 그냥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자무식인 사람 데려와 이것저것 알려 준 은혜를 다 갚았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마음의 짐을 덜었으니 저런 후련한 모습이 나왔겠지.
“거기 직원들이 걱정되긴 합니다.”
“내비 둬. 그놈들도 뭐 한통속이지. 자네는 그렇게 당해 놓고도 그런 생각이 드나? 지금 우리 직원들같이 일 잘하고 회사 생각하는 직원들 없으니까 괜한 생각은 말게.”
회사가 악에 받치게 하니까 직원들도 자연스럽게 그랬겠지. 악에 받치지 않은 우리 창업 멤버들이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 회사가 태양전기처럼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공장장님도 아흔 살 될 때까지 저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하. 또 아흔 살 타령이네. 태양전기 망한 기념으로 OB 멤버들끼리 소주나 한잔하러 갈까? 내가 제일 고생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사지. 하하.”
“좋습니다. 가시죠!”
태양전기와 악연, 소주 한 잔에 다 털어 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