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92)
192 미녀와 짐승
“누구한테 뭐가 왔길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
많이 시원해지긴 했어도 아직은 여름이다. 훈훈한 열기가 느껴지는데도 박준희 사장이 팔짱을 끼며 말을 걸어온다.
아무 말 안 하고 문자님의 신탁이 뭔지 생각하고 있으니, 정신 잃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아, 네. 회사 차릴 때 도와준 분 있거든요. 창립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 줘서요.”
진실과 거짓말을 오가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자금 대 준 분 있다고 하던데, 그분인가 보네요?”
“자금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셨죠.”
“우와. 그러고 보면 그분이 제일 많이 벌었겠네요? 언제 기회 되면 저도 한번 소개해 주세요. 정수 씨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대단한 사람일 것 같은데요.”
“그러죠 뭐. 저도 얼굴 보기 힘들긴 한데,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죠. 근데 계속 팔짱 낄 거예요?”
가벼운 팔짱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온 신경이 팔에 다 쏠려 버린다. 걸을 때마다 어쩌다 살짝 스치는 뭉클함 때문에 머릿속이 백지로 변해 가는 중이다.
“호호. 부끄러워요?”
“아니 뭐, 이러다가 직원들이 보면 괜한 소리 나돌까 봐요. 아시잖아요? 별의별 소문 다 돌아다니는 거요.”
“정수 씨는 아무도 안 보는 차에서만 과감한 것 같아요. 푸하하.”
박 사장이 놀리려는 듯이 팔짱을 깊숙이 끼며 들어온다. 아휴, 내 선지야. 선지의 하방 압력이 너무 거세다.
“자꾸 그러면 아무도 안 보는 차로 갑니다.”
“푸하하. 짓궂어.”
짓궂다고 했지만, 내심은 일말이라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예전 혈기 왕성할 때였으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잡고 바로 어딘가로 갔겠지.
사장이라는 자리가 내 행위를 억제하기도 하고, 나이가 삼십 줄에 들어서면서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나이 먹으면 보수화된다고 하더니, 벌써부터 안정을 희구하게 되는 건가?
“금성전기는 창립기념일이 언제예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일상의 대화로 돌아왔다.
“하하. 몰라요.”
“모른다구요?”
창립기념일 없는 회사도 있나?
“우리 회사도 그렇지만, 옛날 회사들은 그런 거 없었잖아요. 괜히 기념일 만들면 돈 나간다고 싫어하는 분위기였잖아요. 우리 아버지도 뭐 직원들 챙긴다고 해도 예전 분이니까 별수 없었겠죠.”
규모 좀 있는 회사들은 기본으로 이틀을 쉰다. 창립기념일로 하루, 노조창립일로 또 하루.
반나절만 쉬어도 회사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떠는 사장들이야 휴일이 아주 못마땅할 것이다. 예전엔 그렇게 살아왔으니, 당연한 것으로 알지도.
“그럼 놀기 좋은 날로 하루 잡아서 창립기념일 하나 만들지 그래요?”
“맞아요. 그 생각 하고 있었는데, 오늘 여기 와 보니까 되게 좋아 보이네요. 저도 내년에 행사 크게 한번 열까 생각 중이에요. 연예인도 부를 거예요!”
“오늘 행사하려고 돈 많이 썼습니다. 급하게 준비해서 그렇긴 한데, 연예인 부르는 게 꽤 비싸더라구요.”
“돈 많이 버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요?”
“하하. 맞습니다. 간의 기별도 안 가네요. 개처럼 벌었으니까 정승처럼 써야죠.”
박 사장이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오늘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정수 씨는 알면 알수록 배울 점이 많은 사람 같아요. 많이 알려 주세요.”
“민망하게 그러지 마세요. 하하.”
“참! 매일 운동 나오기로 해 놓고 왜 안 나와요?”
“아! 미안해요. 이제 좀 시원해졌으니까 달리기하러 나갈게요.”
서로 더 많이, 깊이 알자고 약속하면서 당장 집 앞 호수공원에서 매일 런닝하자고 다짐했지만, 하루도 안 나갔다.
매일 운동하던 사람이야 하루라도 쉬면 몸이 찌뿌둥하지만, 안 하던 사람들은 운동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지. 이렇게라도 내 자신에게 변명해 본다.
“정수 씨는 퇴근하고 집에 가면 뭐 해요?”
“야근하는 직원들이 있어서 퇴근이 늦긴 해요. 사장이 일 시켜 놓고 먼저 집에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집에 가서 뭐 씻고, 유튜바 좀 보다가 자죠. 일찍 끝나면 미드도 보고, 책도 읽고, 게임도 하고. 할 것 많죠.”
“정수 씨도 집돌이구나?”
그러네. 난 집돌이였네.
집에 있는 시간 늘리려고 한 번 나가면 온갖 일을 다 처리하려고 하고, 집에 들어오면 나가는 것을 싫어하니 집돌이가 분명하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가?
“언제 집에 초대 한번 해 주세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놀러 오겠다고? 술 때문에 머리도 빨리 안 도는데, 자꾸 엉뚱한 생각만 하게 된다. 내 이성은 여기까지가 한계다. 산책 다 했으니 빨리 보내자.
“조만간에 자리 마련할게요. 너무 늦었는데 슬슬 올라가야죠?”
“아, 바다 너무 좋다. 여기 잠깐 앉아 있다 갈까요?”
이건 너무 진부한 클리셰인데? 나를 도발하겠다는 것인가? 두드리면 열린다는 문자님의 신탁이 이걸 의미하는 것인가? 하 참, 문자님! 나를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까?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조성돼 있다. 아무도 없고, 가로등도 조금 떨어져 있어서 조도도 아주 낮다. 벤치에 앉으면 시원하게 펼쳐진 밤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더없이 좋은 분위기. 누가 트리거를 당길 것인가!
“술은 좀 깼어요?”
“네, 아까는 위험할 뻔했어요. 정수 씨랑 산책해서 그런지 좀 가라앉았네요.”
“제가 술 깨는 약인가 봅니다.”
“그런 것 같아요. 정수 씨, 혹시 예전에 왜 그렇게 나를 경계하냐고 했던 것 기억나요?”
금성전기 나주공장 기공식을 겸해 열었던 조합 신년회 때였지. 회의 끝내고 강호창 사장과 셋이서 맥주 마실 때 그런 얘기를 하긴 했었다. 술김에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 다 기억하고 있네.
“그래서 그때 악수도 했었잖아요. 친하게 지내자면서요. 하하.”
“욜, 기억력 좋은데요?”
“누나가 하는 말은 다 기억합니다. 후훗.”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실은 제가 경계한 것 같아요. 제가 좀 그래요. 사람 만나는 것 좋아하고 친해지려고 해도, 저 스스로 선을 그어 버리는 것 같아요.”
무슨 얘길 하려고 그러나? 술이 깨면서 슬슬 머리가 아파 온다. 술은 마실 때도 힘들지만, 깨는 과정도 힘들다.
“그런데 정수 씨랑 자꾸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까 선을 긋는 것이 좋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같이 있으면 편하고 배울 것도 많고, 이렇게 술도 깨잖아요.”
나를 향한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문득 최유리가 생각났다. 유리였다면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얘기했을 것이다. 그 쿨한 모습이 그립네. 마음은 주지 않고 몸으로만 친하게 지낸 사이였으니, 미련 가질 필요도 없겠지.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처음에야 누군지 잘 몰랐으니까 조심한 부분이 있지만, 지금은 안 그렇잖아요? 누나 좋은 사람이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서 좋아하기도 하구요.”
“좋아하기만 해요?”
박 사장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와, 저 눈망울, 표정.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내 앞에 최애 배우 에바 그린이 있는 것 같다. 알렉산드라 다다리오가 있는 것 같다.
굳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말보단 행동으로.
“읍.”
처음엔 부드럽게. 문자님이 말씀하셨지. 두드리면 열린다. 혀로 툭툭 치니 이내 열렸다.
처음에는 누가 올까 염려했지만, 설왕설래가 길어질수록 긴장감이 사라졌다. 조건반사적으로 손이 정해진 곳으로 이동했다. 팔짱 낄 때마다 뭉클함으로 내 팔을 설레게 했던 그 아름다운 것의 정체가 손바닥 가득 느껴진다. 부…… 부드럽다.
“흐음.”
여기서 고민이다.
크고 아름다운 것의 정체를 확인한 손이 가야 할 곳이 어딘가? 간신히 부여잡은 이성의 끈으로 손의 움직임을 스스로 막았다.
짐승같이 밖에서 이러지 말자. 이건 삼류가 되겠다는 뜻이야. 난 일류여야 한다고.
“오늘 저랑 있을래요?”
이성을 되찾은 머리와 달리 입은 감정이 시키는 대로 조아렸다. 에휴, 이 미친놈. 이래도 되나 싶네.
“휴우. 정수 씨 여기까지만. 우리 더 긴밀해지면요.”
가볍게 입맞춤을 해 주고는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박 사장, 거참 인내력 한번 대단하네! 난 죽겠는데! 선지가 들통째 끓고 있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가 될 뻔했다가 겨우 진정했다. 순간의 쾌락에 매몰되지 말자고.
“누나, 여기 더 있으면 나 제어가 안 될 것 같아요.”
“푸하하.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요. 정수 씨 은근 응큼한 데가 있어.”
박 사장이 전화기를 꺼내 대리를 부른다. 여수에서 나주까지 대리를 누가 할까 싶은데, 돈 세게 부르니 바로 콜이 뜬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는데, 자연스럽게 몸이 밀착됐다. 슬그머니 손을 뒤로 빼 허리를 감았다. 자연스러운 동작에 누구도 뭐라 하는 이가 없다. 둘 다 이렇게 걷고 싶은 생각이겠지.
박 사장의 크고 아름다운 차 앞에 서니 크고 아름다운 것이 생각난다. 사도신경이라도 외우고 있어야지, 이거 원. 대리 기사야, 빨리 와라.
주차장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 기사가 도착했다. 여자 기사다. 은근히 사람 경계한다더니 조심성이 있구나 싶다.
그런 박 사장과 과감한 짓을 했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좋은 사람과 좋은 짓을 하면 좋은 것이지 뭐. 박 사장의 진짜 선물에는 100점을 드리겠습니다.
“기사님, 우리 사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대리 기사에게 신사임당 한 장 건네면서 잘 모셔다 주길 신신당부했다.
“누나, 조심히 들어가요. 도착하면 알죠?”
“후후. 잘 들어가니까 걱정 마요. 정수 씨, 오늘 잘 놀다 가요. 내일 같이 운동해요.”
운동? 어떤 운동? 격렬한 그런 것 말이야?
박 사장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매달려 있던 이성을 되찾았다. 요물. 난 짐승.
이제야 담배 생각이 난다. 금단 현상은 다 구라일 것이다. 점심 먹고 나서 핀 이후로 한 번도 안 폈는데, 이제야 생각나다니 말이다. 뭔가에 몰두하면 금연도 가능하겠구나.
시계를 보니 12시가 가까워져 있다. 호텔 입구로 다가갈수록 소란한 소리가 고막을 스치는 것을 보니, 직원들은 아직도 해가 중천인 모양이다.
“어? 민희야! 너 여기서 뭐 해?”
“사장님!”
로비에 앉아 있던 민희가 쪼르르 달려온다. 얜 또 왜 그러는 거야?
“사장님이랑 술 마시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어서 가요.”
팔짱을 진하게 끼고는 나를 움직이려고 안간힘 쓴다. 너무 의도적이다.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지 팔에 여성성을 각인시켜 주려고 하는 것인지.
민희가 나를 왜? 내가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전혀 모르겠다. 종종 내 책상에 간식이나 커피 올려놓고 가긴 했는데, 그냥 일상적인 것 아닌가? 특별히 잘 챙겨 준 것도 아니고, 오해 살 만한 행동 한 적도 없는데? 모른 척할 수밖에.
“아휴, 힘도 없으면서. 난 술 더 못 마셔. 아까 너무 마셨더니 죽겠다야.”
“술 안 마셔도 돼요. 우리랑 같이 놀아요. 근데 사장님, 여자랑 있었어요? 이거 여자 향수 냄샌데요.”
향수 냄새를 감지할 정도의 분별력이면 술이 과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더 이상하다. 낮부터 장난처럼 얘기하던 것이 진심이었나?
“아하, 아까 그 금성전기 사장님? 두 분이서 사귀어요?”
“사귀기는 뭘 사귀어!”
“안 사귀는 거 맞죠? 아니다. 사귀면 어때. 암튼 가요.”
“아휴, 너희들끼리 마셔. 나 힘들어.”
팔짱 끼고 끌고 가려는 민희에 맞서 버티고 있다가, 팔짱이 풀리면서 손이 작고 아름다운 것에 닿을 뻔했다. 위험했다.
“민희야, 다음에 술 사 줄게. 오늘은 힘들다.”
“히잉.”
이건 뭐 걸스이어 코크다스 흑구에 빙의라도 한 것인지 원. 뭐 하는 시추에이션인가 생각 중인데, 민희가 갑자기 안긴다.
“사장님, 저 쫌만 이러고 있을게요.”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자, 자, 진정하고 정신 차리자?”
떨궈 내려는데 찰거머리같이 안간힘을 쓰며 버틴다. 살짝 화가 나면서도 이 이해 못할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3초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너 왜 그러냐? 낼 술 깨고 나 어떻게 보려고 그러냐?”
“아이, 몰라요, 몰라. 사장님, 전 갑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민희가 잽싸게 계단을 타고 뛰어 올라간다. 꼴에 남자라고 선지가 하류로 향한다. 사장만 아니었다면! 온갖 생각이 허공에 난무한다.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어.
역경과 고난을 이겨 내고 객실에 들어왔다. 대충 옷 벗어 던지고 침대에 자유 낙하했다. 팬티에 묻은 이 얼룩은 뭐람? 귀찮지만, 샤워는 해야겠다.
불타는 밤에 술은 위험하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