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103
나는 회귀했다 103
이주완 사장과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을 가진 이휘는 본사에서 나와 차를 타자마자 운전대를 잡은 알란에게 말했다.
“이주완 사장한테 사람을 붙이세요.”
“크게 신경쓰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지금까진 그랬죠.”
하지만 이제는 신경을 써야 한다.
이주완 사장이 아니라, 이주완 사장이 꼬리를 쥐고 있는 놈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사람을 붙인다고 해서 상대가 쉽게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
실수는 한순간에 이뤄지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혹시….”
뭔가 물으려던 이휘가 말을 돌렸다.
“차 돌립시다.”
“어디로 모실까요?”
“CIA.”
물론 국내에 공식적인 CIA 지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시아 지부 인물들 몇몇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위장회사를 차리고 한국 정부에 공식적인 협조요청을 하고 들어앉았다.
명색이 첩보기관인데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정보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닐 터.
알란이 난처하게 웃었다.
“언제 봐도 CIA 요원들 만나는 자리는 영 불편합니다.”
그래서 가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그냥 엄살을 떠는 거다. 이휘 자신도 모르게 민감해진 표정이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피식 웃은 이휘가 말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
젊음의 거리, 홍대.
이휘는 전생에서나 이번 생에서나 놀려고 이 동네를 찾은 적이 없었다.
UDT 복무 시절 휴가 나와서 아내를 만났고, 그 후로 어딜 놀러 다닐만한 처지가 못 됐다.
심지어 UDU에서 훈련 받을 땐 휴가조차 없었고.
그 후로는 비밀임무를 맡아 처리했다.
참, 재미없는 인생이다.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삶의 이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개 정서적인 부족함을 느끼곤 한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효율적으로 쓴다 해도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결함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을 두 번 사는 이휘는 단순히 시간을 번 것 외에, 상당히 유리한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남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줄일 수 있고.
남들은 모르는 정보까지 쥐고 있다.
그것은 즉 낭비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하루 50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많은 일을 하는데, 정작 5초처럼 느껴지는군.’
이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리하는 일이 많을수록 잡념이 줄고, 다 지나고 보면 하루가 짧게 느껴진다.
이번 생은 시속 200킬로로 달리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알란이 허름한 3층 건물 앞에 차를 멈춰세웠다.
1, 2층은 공실이고 3층만 불이 켜져 있었다.
심지어 이 번화가에서, 주변이 휑한 뒷골목이다.
아마 걸어서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짧은 번화가와의 거리는 도주로를 확보할 때 유리해서일 테고, 아래 두 개 층을 공실로 비워둔 것은 각종 경보장치와 건물을 봉쇄하기 위한 폭약이나 함정을 마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3층까지 올라오는 사이에 상대를 파악하고 저지할 수 있다. 더 높은 고층건물을 쓰지 않는 것은 눈에 띄어서도 있지만 옥상이나 창문을 통해 도주하기 어렵기 때문. 주위가 휑한 곳을 고른 것은 감시나 저격을 피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한눈에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차에서 내린 이휘가 말했다.
“가죠.”
“예.”
알란도 마저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1층으로 들어섰다. 계단에 첫발을 내딛기 무섭게 1층 공실의 초인종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동부아시아 지부 책임자는 아니다.
비행기에서 봤던 남자 요원의 목소리였다.
이휘가 대답했다.
“존 있습니까?”
동부아시아 지부 책임자이자 CIA 팀장 존 허드슨을 이야기하는 거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손님이 와 계셔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손님이요?”
정부 관계자인가?
잠깐 생각한 이휘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알란과 3층으로 갔다. 직접 문을 열어준 CIA요원이 당구장 종업원처럼 커피, 녹차, 주스 중에 택하라고 했다. 이휘는 주스를, 알란은 블랙커피를 택했다.
음료가 나오자 알란이 물었다.
“이거 마셔도 되는 겁니까?”
CIA 요원이 피식 웃었다.
“저희 CIA입니다.”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알란이 그다지 재밌지도 않은 농담을 던지며 커피를 마셨다.
“기분 탓인가, 이상하게 맛이 이상하네.”
“이 분은 저희한테 반감이 있는 것 같군요.”
요원이 못마땅하게 중얼거리자 알란이 말했다.
“이런저런 추억이 떠올라서.”
그때였다.
팀장 존 허드슨이 한 여자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선글라스를 쓰고 올블랙으로 의상을 갖춰 입은 금발의 미녀다. 나타샤 때부터 느낀 건데,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려도 미녀일지 아닐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잠깐 이휘를 흘깃 쳐다본 그녀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존 허드슨의 배웅을 받으며 나갔다.
잠시 뒷모습을 보던 이휘가 요원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하하, 이휘 씨도 남자는 남자군요. 하지만 너무 욕심 내면 못 써요. 비행기에서 함께 계시던 분이 훨씬 더 미인인데….”
“대답만.”
요원이 입술을 부루퉁 내민다.
“…저도 정확한 신분은 알지 못합니다. 팀장님한테 여쭤보시죠.”
“그래요?”
이휘가 묘한 표정을 짓자 곁에 있던 알란이 인상을 쓰고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물었다.
“수상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요원이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이휘는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저를 아는 것 같아서요.”
“그 여자 본인도 아닌 저한테 작업 멘트를 치실 리는 없고.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아무 의문도 갖지 않던데요. 제가 CIA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한국 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스 얼굴 정도는 알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거대로 아는 척을 하든가, 적어도 호기심 정도는 가져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습니다.”
“이제 선글라스 낀 여자 속내도 읽으십니까?”
“알란도 평범한 여자가 아니란 건 알았잖아요.”
“운동을 배웠더군요.”
“그것도 많이.”
이휘는 턱을 쓸었다.
“재밌네. 어디서 비슷한 운동을 했던 사람을 본 것도 같은데.”
“예?”
알란이 눈을 치떴다.
하지만 이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아귀 안쪽, 미세하지만 굳은 살이 잡힌 부위가 비슷한 사람이 떠올랐다.
기차 안에서 본 자들.
나타샤는 운동을 쉰 지 오래돼서 손이 매끄러웠지만, 그녀와 비슷한 무술을 익힌 여자다.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오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존 허드슨이 돌아왔다.
“리!”
악수를 나눈 뒤, 존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원래는 뭘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하하, 정보교환을 얘기하는 겁니까?”
“네. 근데 생각보다 비싼 값을 치러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방금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예?”
“CIA와도 연관이 있는 자입니까?”
존 허드슨이 턱을 긁적였다.
“실은,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래요?”
동부아시아지부 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지금 가장 예민하게 주목하고 있을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다? 그것도 CIA 내부 일을?
“네.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상부라면?”
“본부 책임요원한테서요.”
“무슨 얘길 했는지 물어보면 당연히 안 알려주겠죠?”
“물론입니다. 설령 값을 단단히 치른다 해도 CIA 내부적인 일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이럼 이렇게 묻겠습니다.”
이휘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아직도 기차에서 입은 상처가 다 낫지 않았기에, 상체를 칭칭 감은 붕대가 드러났다.
이미 기차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존 허드슨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괜찮은 겁니까?”
“그 여자와 연관 있는 자들의 소행일지도 모릅니다.”
“예? 그게 무슨.”
“저는 목숨을 잃을 뻔했고요. 그게 오해일지라도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아까 그 여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만약 말씀해주지 않으신다면, 제 손으로 밝히겠습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어디 소속인지.”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존 허드슨이 표정을 구겼다.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럼에도 이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쪽도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무례가 중요하겠습니까?”
이휘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이어 말했다.
“알란.”
“말씀하십시오.”
“나가서 그 여자 잡아오세요.”
“음. 보통 내기가 아닌 것 같던데,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그 여자가 CIA 위장사무소를 찾은 것은 극비리에 벌어진 일일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죽이지만 말고 데려오세요.”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존 허드슨이 버럭 소리쳤지만 알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CIA 요원이 막아서자 알란이 눈을 반짝인다.
“잘 됐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 순간.
“잠깐.”
존 허드슨이 이휘를 향해 덧붙였다.
“그만하라고 하십시오.”
“대답은요?”
“최소한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란.”
“알겠습니다. 운 좋았어, 당신.”
CIA 요원을 보며 씨익 웃은 알란이 도로 자리에 앉자, 존 허드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 걸으면서 얘기할까요? 이 안에서 벌어진 내용은 모두 기록을 해둬야 해서.”
이휘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 일어서려는 알란을 제지하고는 존 허드슨과 함께 후문으로 나갔다.
이내, 존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예전에 러시아 정보국에서 일하던 여잡니다. 우리 일을 도왔다더군요.”
“이중 스파이?”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그 같은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이휘는 점점 더 윤곽이 잡혀가는 느낌이었다.
“그것까진 알지도 못하고,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일을 돕고 있다는 것밖에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습니까?”
“이휘 씨와는 상관 없는….”
“정보 값은 전례 없이 치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안 됩니다.”
“김정판이 있는 곳을 알려드리죠.”
“…!”
존이 걸음을 멈췄다.
이휘가 따라 멈추며 말을 이었다.
“CIA에서도 찾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두 사람은 넘겨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자금에 대해서도 궁금하실 텐데요.”
“….”
“비자금을 다 빼돌리고 넘겨도 되는 겁니까?”
“하아.”
존 허드슨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민하는 눈치다.
이휘가 덧붙였다.
“CIA 역사에 남을 실적을 단독으로 올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저한테는 그만큼 중요한 정보고요.”
하지만 존 허드슨이 고민하던 것은, 이휘에게 정보를 넘길까 말까 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이휘 씨는 우리 CIA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는군요. 우리 역시 김정판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
이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검거를 안 하는 겁니까?”
“이휘 씨 말처럼 김정판이 빼돌린 돈을 영영 못 찾게 될 수 있으니까요.”
아니.
명분이 약하다.
이휘가 함께 작전을 하며 느낀 CIA의 방식은 고고한 척 야만적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냉철한 결단이라도 망설이지 않는다.
만약 그가 아는 CIA라면 김정판을 검거하고, 명분을 얻은 뒤 남들이 관심을 끈 상황에서 어떤 수를 써서든 비자금에 대한 정보를 캐낼 터였다.
동시에 퍼즐이 절반쯤 맞춰졌다.
이번에는 이휘가 걸음을 멈추며 나지막이 물었다.
“아까 그 여자입니까? 김정판의 소재를 알려주고, 바로 검거하지 말라는 청탁을 한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