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1장 또 다른 위기의 시작(3)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라고?”
“그러니까. 북조의 구육 태자가 보내시는….”
“썩을….”
마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식은 거친 말을 내뱉으며 잘라 버렸다.
연령에도, 신분에도, 맞지 않는 험한 말에 주변에선 웅성거렸으나, 왕식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 탁자 위의 물건을 고깝게 바라보았다.
“네 녀석을 또 보게 되었구나.”
말을 걸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을 건 왕식도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답답함을 토해내고자 말을 건 것처럼 내뱉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흉상 따위가 어떻게 말을 할수 있겠는가.
만일 답변이 들려온다면 그거야 말로 귀물이고 진짜 사신(邪神)을 의심해야 할 것이다.
“끄응. 상보께서 이리도 나를 배려해 주니 더욱 조사에 힘을 내야겠구나.”
“…….”
빈정거림이 섞인 왕식의 중얼거림을 들었음에도 이번만큼은 마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작년 왕식이 구유크의 부탁에 따라 갈라전과 속빈로를 조사한 기묘한 야사, 신화, 구전, 등을 정리하여 보낼 때 같이 보내며 이제 필요 없다고 완곡히 적어 돌려보낸 것을 곁에서 지켜본 마휘였다.
그렇게 작별하였던 문어 흉상이 구육 태자의 답서와 함께 돌아온 것이 어떤 기분일지는 왕식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식은 한참을 흉상을 바라보며 침묵하더니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시선을 돌렸다.
흉상을 돌려보낸 것은 껄끄러웠으나 그와 함께 딸려온 준마 1필과 활과 화살들은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본론이라 할 수 있는 서찰에는 나름 눈여겨볼 만한 내용들도 있었다.
“금나라가 드디어 역사의 뒤앗길로 사라지는 것인가.”
서찰 군데군데 보이는 동방 3왕가와, 요동 동요국의 움직임 관련 설명의 부분 부분이 몽골이 금나라 멸망에 박차를 가하고 있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무신정권 타파 문제로 잠시 뒷전으로 미루어 두었던 왕식에게 금나라의 종말은 불안감, 안타까움, 그리고 걱정이 삽시간 몰려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역사가 개변되면 될수록 커져가는 불안은 무신정권을 타파하였다고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져만 가기 때문이다.
‘원 역사대로라면 금 애종과 함께 금나라는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이 말인즉슨, 몽골의 최우선 목표 대상인 금은 사라진다는 말이 되는데 몽골의 다음 우선 목표는 어디가 되는 걸까. 서정인가, 동정인가, 송인가, 대리인가. 그것도 아니면….’
* * *
화려한 복수를 마친 첩가가 압구무 부락을 파괴하고 전리품을 가지고 향한 곳은 송화강 이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송화강 이북에서 얼마 안 되는 지역에 ‘마침 사냥 중이라 쉬고 있을’ 노왕의 ‘게르(막사)’였다.
“히익. 흐윽.”
“우. 우우우.”
후방에서 작고 짧은 오열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압구무의 부락에서 잡아온 포로들, 아니, 노예들이었다.
그토록 학살하고 탈주하려 할 때마다 관련 인간들까지 잔혹하게 죽였음에도 여전히 수천이 넘는 인원들이 소리죽여 울며 따라오고 있었다.
저들 중 상당수가 한 부락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과연 속빈로 서쪽 제일의 세력을 가진 압구무의 부락이라 할 수 있었다.
이만큼 많은 전리품들을 끌고 간다면 테무케도 자신의 공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보무당당히 가던 도중 첩가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전하. 정말 이대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는 늙고도 늙어 검 하나 제대로 들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노인이 첩가의 뒤에 있었다.
사색을 방해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첩가였으나, 그 노복에 대해선 화를 품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남은 충신을 박대할 정도의 인정머리가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노복에 대해선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첩가였으나, 이전 구타 사건에서 노복이 늙은 몸을 던져 첩가를 대신하여 맞으며 보호하는 모습을 보여준 이래로 첩가는 그 노복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된 것도 있었다.
무작정 신임하거나, 자신보다 노복을 우선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노복에 대한 동정과 배려심 정도는 생긴 것이다.
“변경을 쓸고, 가장 골치 아플지도 모르는 압구무를 처리했다. 당연히 보고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물론, 그것은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분명 전하의 공적에 대해선 노왕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오나 저들을 전부 건네주실 생각이십니까?”
노복은 그렇게 말하며 곁눈질하였다.
그것이 지금 인솔되고 있는 여진족들이라는 것 정도는 첩가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첩가는 비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것이 노왕의 뜻이 아니신가?”
“하오나, 저들은….”
“그만!”
“…….”
첩가도 노복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지는 알고 있었지만 들어줄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이 있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저들은 역적이다. 나라를 배신하고, 황자인 나를 배신하고 등에 비수를 찌르려고 했던 역적. 틀렸나?”
“…아닙니다.”
“그래. 그들은 역적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군대를 빌려 복수를 도와주는 노왕과의 의리에 답하고 다시 지원받을 뿐이다. 대하국을 부흥하는 대업을 이룩하기 위해서 말이다.”
“…….”
노복은 무언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의 속도를 죽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노복과의 대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자 거대한 게르가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사냥을 위해서 모집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북적함과 활기가 그곳에는 펼쳐지고 있었다.
“자, 팝니다. 튼튼한 소 팝니다!”
“밀가루. 밀가루도 팝니다!.”
“마유주. 맛좋은 마유주는 필요 없소?”
“등자와 활 함께 파는 것 같은데 동시에 사면 뭐 깎아주는 것 없소?”
첩가에게 끌려온 포로들 중 일부는 순간 자신들이 처지도 잊고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그곳은 장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 중 이 북적거림을 노려 틈을 보려고 한 이들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내 게르 주변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몽골 기병들과 병사들을 보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 팝니다. 팔아요! 튼튼한 노예 팝니다!”
장사꾼들이 파는 것은 물건과 가축만이 아니었다. 납치, 전쟁포로로 끌려온 이들도 노예가 되어 팔려나가고 있었다.
그 노예들은 상당수가 전쟁에서 잡은 금국인들과 여진인(동하, 제부족)들이었다.
똑같은 여진인으로서 진노를 느껴야 할 첩가는 정작 이 시장터를 보며 몽골국에 대한 생각을 고치고 있었다.
몽골에 대한 원망은 여전히 있었지만, 이 광경은 대단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고친 것이다.
“아니. 이거야. 이거야. 첩가님이 아니십니까? 출병하신 것이 엊그제 같으신데 벌써 돌아오셨군요?”
“그래.”
손을 싹싹 비비며 다가오는 이 상인의 외관은 금발과 푸른 눈을 하고 있다. 이 색목인은 상인이었다.
장군도, 참모도 아닌 그저 상인일 뿐인 그야말로 오늘날 몽골의 위엄을 드러내는 예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천 리, 만 리 떨어진 지역에서 산다는 색목인이 금나라가 건재하던 시절에도 촌구석인 이곳까지 와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저 상인이 오고 가는 통로를 확고히 지배 관리하고 있는 몽골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몽골국에 색목인은 상인들만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자부심이 크고 차별이 큰 몽골인이었으나 인재는 우대하고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미 몽골 내부에는 색목인들이나 귀화나 투항한 한인, 여진인, 거란인들 관리들도 많이 채용되고 있었고 능력이 뛰어나고 공적도 우수하다면 비몽골인이라도 다른 몽골인들과 거의 동격의 지위가 주어지고 우대를 받는 것을 카라콜룸에 인질로 되어 있을 때 많이 보아 왔다.
그것이 그가 지켜본 몽골의 사회였다.
첩가는 색목인의 인사를 적당히 받아주고는 노복과 둘이서 테무케가 있는 거대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게르 안이라고 해도 테무케가 기거하고 있는 게르는 입구에서 방까지 들어가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그 때문에 첩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통로에서 기록을 하다가 자신을 보고 환대를 하는 색목인 관료였다.
“어서 오십시오. 첩가님.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보니 매우 기쁘군요.”
“테무케 님께서는 안에 계신가?”
그의 입에서는 유창한 여진어가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이 색목인은 몽골어만이 아니라 서하, 여진어, 한어까지 익혀 따로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재 중 인재였다.
그런 자였기에 노왕도 그 색목인을 자주 동행시키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예. 하오나 지금 장군들과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그럼 다 끝나고 나면 오도록 하지.”
“아니, 지금 들어와라!”
“…!!”
관료 뒤 천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왕의 목소리에 관료는 곧바로 자리를 비키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들어가라는 자세를 공손히 보였다.
첩가는 그렇게 노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이미 새하얀 눈밖에 없는 수염과 얼굴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는 노인이었으나 그를 경시하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국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전설적인 선대 대칸의 옆에서 전장에 참가해, 수많은 투쟁에서 살아남아 온 역전의 용사 중 하나.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이자 동방 3왕가 옷치긴 왕가의 ‘테무케 옷치긴’.
비록 대칸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현 몽골 제국 내 강력한 세력 중 일각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결국 망국의 황자이며, 제대로 된 병력도 없는 첩가에게는 천상의 존재였다.
그런 지극히 현실적인 입장과 상황을 첩가는 수차례의 호된 경험 끝에서 겨우 깨달은 것이다.
“전하께서 도와주신 덕에 소인은 겨우 역적들을 처벌할 수 있었나이다.”
“끌끌끌. 우선 내가 주는 축하주를 받도록 하거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테무케는 마유주를 가득 따라져 있는 잔을 첩가에게 내밀었고 첩가는 공손히 받아서 주저 없이 쭈욱 마셨다.
독을 걱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테무케 앞에서 거절도, 의심도, 주저의 기색을 보이는 것조차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역적들을 벌하면서 이번에 얻은 전리품들을 전부 전하께 드리려고 하옵니다. 부디 소인의 성의를 거절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음, 기쁘게 받도록 하겠다.”
테무케는 정말 주저 없이 전리품을 받았다.
애초에 첩가가 압구무에게 복수한 것도, 부흥을 노릴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테무케가 빌려준 1만이라는 대군과 여러 지원 덕분이었으니 그로서는 주저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그토록 원하던 동생은 어찌 되었느냐? 구출하였느냐?”
“…전하. 그것에 대해 긴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좋다.”
테무케의 손짓에 장수들은 거리를 벌리고 물러났고, 그것에 이야기가 새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첩가는 조용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 * *
“그것들이 정말로 사실이겠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묻는 노왕에게 첩가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했다.
“예. 거듭 확인하였습니다.”
“…만약, 정말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좋다. 나는 ‘고려’를 칠 것이다!”
“…!”
“그리고 그때는, 너에게 군의 선봉을 맡길 것이다. 약조하마. 그럼 되겠느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왕 전하.”
첩가는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고려를 친다.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이번에야말로 동하국이 부흥할 수 있을 것이리라. 아니, 하고 말 것이라고 첩가는 굳게 결심했다.
‘저번에는 내가 허를 찔렸으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갈라로는 물론이요, 고려를 전부 불태워 주마! 기다려라. 고려 세자.’
첩가 속에 있는 증오의 불꽃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몽골이라는 대적에게 풀 수 없었던 그 원한은 활시위를 돌려 남방의 고려에 향해진 것이다.
* * *
“이놈들아 비켜라! 내가 바로 금나라의 맹장! 즉급사(卽急祀)다!”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달려드는 장수의 특공에 몽골 병사들은 기겁하며 물러난다.
장수의 뒤를 쫓는 용감무쌍한 기병들의 질주에 병사들은 수적 우위도 잊은 채 도주에 급급했고, 장수의 뒤를 따르는 결사대는 그대로 진을 헤집고 목적한 식량을 불태울 수 있을 듯 보였다.
휘이익!
“컥!”
“급사!!”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장수는 새파란 비명과 함께 꼬꾸라졌고, 선봉의 상실에 결사대는 머리를 잃은 뱀처럼 우왕좌왕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세 좋게 질주하던 기병들의 돌격이 멈추자 조금 전까지 도주하던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꿀에 달라붙는 개미 떼처럼 달려들었고, 포위된 결사대들은 조금 전 승세가 거짓말인 것처럼 참혹하게 죽어갔다.
그 광경에 언덕 위에서 활을 들고 있던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인 병사들은 정말 쓸모가 없군. 고작 패잔병들 상대로 저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적들이 궁지에 몰렸는지 독기가 잔뜩 오른 것 같습니다. 하오나 공성이 시작한다면 분명 활약을 보일 것입니다.”
“흥. 아무쪼록 그리되었으면 좋겠구나. ‘사천택’(史天澤).”
사천택을 향해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예케 몽골 울루스 2대 대칸 오고타이 칸의 3남 ‘쿠추’는 회주성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