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298
298화
40장 부국강병
‘국가의 기세가 부진한 것이 극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땅이 붕괴하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군사들에게 호세(戶稅)를 면해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고, 6개월에 나누어 번갈아 도성을 수비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는 10만을 합하여 지키게 하는 등 완급의 대비를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사변이 일어나 백성들을 몰아내어 싸우게 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큰일에 실패할 것입니다.’
통칭 율곡 이이의 로 유명한 이 주장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는데, 당시 조선 시대에서 실현이 가능한가와 불가능한가의 여부를 떠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건 고려도 마찬가지다.
물론, 고려와 조선은 각자 일장일단(一長一短)의 시대라 조선이 안 된다고 고려가 무조건 안 된다는 논리는 안 되겠으나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은 매한가지다.
당장에 내 태자 견룡군을 2천 명만 더 추가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10만 명 양병이 무슨 애 이름도 아니고 쉬울 리가 없다.
“으음. 태자의 능력과 노고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작금의 아조가 10만 추가로 양병하여 모두를 태자의 견룡군과 같이 조련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아버지가 저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도 납득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도 힘들다고 생각한다.
무신집권기로 흔들린 고려의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 무섭도록 회복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10만을 추가로 양병하여 그 모두를 동모산에서 싸운 견룡군과 서경기(西京畿) 의 군사들처럼 강병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
훈련 이전에 10만을 먹일 밥과 양식, 그들에게 쥐여줄 무기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불가능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허리띠 쫙 졸라매고 10만의 강병을 추가로 만들고, 기존의 주현군, 주진군들을 위시하여 징병된 징집병까지 동원한다면 삼국지연의와 같은 대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불가능하다고 한 이유는 결국 만들고 난 후 유지비용과 전쟁이 벌어질 경우 장기전과 적의 전력을 비교하여 잃을 피해와 그 피해에서 일어나는 전략과 전술들 제한,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난 후가 문제다.
‘중국이 무서운 것은 그 질이 아니라 양이다. 그리고 지금의 몽골 제국은 사실상 통일 중국과 맞먹는 수를 가졌다고 간주해도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도 강병들 또한 많다. 이쪽의 정예병이 언제나 백전백승을 한다면 모를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쪽도 피해가 갈 것인데 10만 추가 정병에만 집중하여 다른 것을 등한시했다간 자칫 선택을 잘못하여 수 양제와 같은 우를 범하는 격이다.’
그래서 나도 솔직하게 어렵다는 것을 밝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 군제에 10만을 추가하고 그 모두가 정병으로 단련을 한다면 분명 더할 나위 없겠으나 천하의 기세가 혼잡하기가 그지없으니 언제 외침이 올지 모르는데 느긋이 군사에만 집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수 만의 강병을 추가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사시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징병할 수 있거나 혹은 현재 있는 병졸들을 강화시키는 것이라면 그나마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태자가 말한 10만의 강병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그렇긴 하오나, 없는 것보다는 몹시나 유용합니다.”
현 군제에 ‘강병(剛兵) 10만이 추가’된다면 정말로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쉽지가 않다.
유지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억지로 유지한다고 해도 후폭풍이 크다.
10만의 ‘양병(良兵)’이 아닌 ‘10만을 추가로 징병(徵兵)’할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전자보다 훨씬 쉬운데 실제 예비군 성격의 지방군으로 추측되는 정종(고려 2대 왕) 시기 이미 광군(光軍) 30만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예비군 같은 군대는 전국의 주현군, 주진군에도 포함되어 있고 지난 동경의 난이나 이연년의 난, 김방경의 수적 토벌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병력은 거진 징집병이나 다를 바 없지만, 유사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징병을 늘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고려의 인구를 늘리면 된다. 혹은 다른 방도가 있긴 하나, 무엇하나 10만 양병보다는 쉽다.
다른 차선의 대안으로는 현재 고려에 있는 군대의 질을 올리는 법이 있다. 이것도 방법 자체는 간단하다. 주기적으로 소집시켜 단체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현재 있는 병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징병할 수 있는 호구(戶口)도 늘리는 방향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으니 이조차 강병 10만 양병보다 쉽다뿐이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선(最善)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차선(次善)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니군. 그렇기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구나?”
“그렇사옵니다.”
* * *
“진(晋)의 안제(安帝:동진(東晋)의 왕) 때에 환현(桓玄:369~404. 동진의 대사마 환온(桓溫)의 아들)이 정치를 도울 때 동전을 폐지하고 곡식과 비단을 쓰려고 하자 공림(孔琳)이 반대하기를, ‘성왕께서 쓸데없는 화폐를 만들어 쓸모 있는 재물로 유통되게 하였으니, 이미 그대로 버리는 낭비가 없고 또 운반하기 어려운 괴로움을 덜었습니다.
이것은 동전이 거북과 조개의 공을 이은 것으로서 역대로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곡식과 포목은 보물로서 본래 입고 먹는 데 쓰이는 것인데, 그것을 나누어 화폐로 만들면 그 손실이 매우 많으며, 또 사고파는 손에서 훼손되고, 자르고 끊어 사용하는 데서 소모되고 버리게 되니, 이것이 폐단이 됨은 이전보다 현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예를 들어 ‘위(魏)나라 명제(明帝: 조예. 조조의 손자이자 조비(曹丕)의 아들.) 때 동전을 폐지하고 곡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자, 온 조정이 크게 의론하여, 재주가 뛰어나고 정치에 밝은 사람들이 모두 다시 돈을 쓰는 것이 옳다고 하자, 백성들은 다른 생각이 없고 조정에서도 이론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공림의 말이 지당하다 여겼기 때문에 환현의 주장은 폐지되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찍이 대각국사(大覺國師:의천 1055 ~ 1101)께서 논하셨던 이야기로 돈의 유용함은 역대 군주 또한 공감하는 바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각국사 의천의 주전론(鑄錢論:돈을 주조하자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의 말이 맞다. 조종조께서도 돈의 중요함을 깨닫고, 성종, 목종, 숙종, 예종 대제께서도 모두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전화(錢貨)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여 건원중보(乾元重寶 성종 시기) 나 해동통보(海東通寶 숙종 시기) 등을 아조의 돈을 만드셨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태자도 알 것이다.”
왕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고, 태자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는 초기부터 화폐의 유용함을 알고, 그것을 통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지속적으로 통용되지 않았고 기껏해야 포구나 개경, 동경 같은 일부 도시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론 사실상 실패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한 사례들 마저 파고든다면 일부나마 사용하는 데 성공한 곳들이 있어, 소자는 그 성공한 사례들을 살피고 극대화하려고 해보렵니다.”
“하면?”
“우선 사용된 곳은 공통적으로 사람과 물류가 자주 오가는 곳이었고 포구가 많았습니다. 이를 본다면 나라에서 만드는 전화를 쓰려면 그저 강요가 아니라 쓸 수 있도록 물류와 사람이 오가는 곳을 활성화시키고 그 범주를 늘려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말이냐?”
“물류가 오가는 도시들 주변의 군현 사이에 사람들과 물류가 오갈 수 있게 길을 만들고, 그 길 중간, 중간에 사람들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류는 자연적으로 오갈 것입니다.”
“숙박할 시설이라면 원(院)을 말하는 것이냐?”
원(院)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역(驛)과 더불어 숙식의 편의를 주는 시설이었는데 역은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에게만 역마와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이라 일반 상인과 여행자들은 원을 이용했다.
그리고 원의 경우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자 차이가 있었는데 조선 시대의 원은 잘 땔나무와 물밖에 제공하지 않는 시설물이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 원은 제대로 된 숙박업소 역할을 하였으며, 때로는 행려병자(行旅病者:나그네로 떠돌아다니다가 병이 든 사람)와 빈민 구제 사업도 겸하는 다목적의 시설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은 대개 사찰에서 관리하였는데 맹수와 도적을 막아주는 성벽이 쌓여 있는 원이다 보니 사찰을 찾아가는 사람, 주변을 지나가는 상인들, 그리고 그런 상인들과 사찰에서 파는 잡물들을 사러 오기 위한 상인과 사람들까지 여러 지역, 여러 사람들이 오가다 보니 시장의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의 방도이긴 하나 오늘날 원은 사찰에서만 관리하니 절이 없는 곳은 원이 제 기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원이 없는 곳에도 사람이 하룻밤을 먹고 잘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면 행자들이 밤 동안 비바람을 막고 안전히 술도 기울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주막(酒幕)’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조선 후기 화폐가 통용된 것에는 잉여생산물이 늘어나고 전, 중기에 비해 농업중심에서 상공업 중심으로 변한 것이 컸다.
그런 관점에서 고려 시대는 조선 전중기보다는 화폐를 이용하기 위한 조건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가게 되면서 고려 시대 원 이후 조선 시대에 생겨난 것이 주막이었는데, 태자는 그것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점이 있었다.
“명석한 태자인 만큼 지금 스스로가 말한 것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 터, 당연히 그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디 이 아비에게 속 시원하게 토로해 보도록 하거라.”
* * *
“그리고 이것이… 유구국을 경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유구는 탐라 아래에 있는 해상의 교두로입니다. 유사시 남조의 도움이 없더라도 아조의 부를 유지시킬 수 있는 줄이 될 것입니다.”
10만 징병을 만들던, 기존 군대를 조련하던 결국 저들에게 무기를 쥐여주고, 먹일 양식을 준비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할 부가 필요하다.
자급자족(自給自足 필요한 것을 자기가 생산하여 충당함)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최고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타급자족(他給自足 다른 쪽에서 생산하여 자신을 만족시킨다.)이라는 방도가 있다.
물론, 여기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타급’은 두말할 것 없는 남송이다.
남송의 풍부한 곡물과 부의 지원을 받는다면 틀림없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힘으로만 유지하는 체제는 그 타급이 막히는 순간,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망해버리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원역사와 많이 달라졌다곤 남송이 원역사와 동일하게 몽골에게 멸망당한다는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남송이 멸망하면 남송에 의지하여 기른 국력은 단번에 무너지게 된다.
반대로 남송이 살아남더라도 남송이 고려에 경제적 제재를 가한다면 마찬가지로 단번에 흔들리게 된다.
결국, 남송의 경제에만 의존하여 만든다면 고려의 국력은 장차 신기루와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 대외무역을 중시하면서도 중국 돼지 수입하거나 모내기법 등 전파하려는 등 자급할 능력도 모색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도 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이 타급자족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 타급이 막히는 방도를 막을 방도도 만들거나 혹은 남송의 대체제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키나와 경략 또한 이러한 목적도 섞여 있는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많고, 전부 최선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없다고 포기할 수 없으니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최선책들이 전부 막힌다면 차선책들을 준비해서라도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자강(自強)을 노려야지.’
하지만 아버지는 유구국에 대해선 원체 회의적… 이라고 해야 할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으음. 그 유구국이라는 곳이 그토록 멀리 있고, 바다 한복판 가는 것이 쉽겠느냐?”
아버지가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 시기 고려에게 유구는 일부 사람을 제외하면 사실상 관심도, 존재자체도 모르는 이들도 상당한 미지의 나라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구를 파악한 지가 언제던가. 이미 정안연을 통해 시범 항해는 마친 상태다.
“혹시 몰라 아조의 상인을 통해 오가게 했습니다. 다소 불안하기는 하나 계절의 바람을 잘 탄다면 무난히 당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방의 문제를 해결했으니 다소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도 좋으리라. 이번에야말로 송문주를 보내 잡자.
“…좋다. 한번 해보도록 하거라.”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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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ㆍ노소ㆍ관리ㆍ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나 은병(銀鉼)으로 그 가치를 표준으로 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 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 무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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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다른 물화는 모두 물건으로써 교역(交易)했으나, 오직 약을 사는 것은 간혹 전보(錢寶)로써 교역하였다.
– 관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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