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56
교랑의경 356화
이 오밤중에······.
달려들어 말리려는데 정교랑이 옆방 문 앞에 서더니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복도에 있던 등불이 안으로 비추자 침상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낮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아낙들이 등불을 들고 들어와 방 안에 있는 등에 불을 붙였다. 소란 통에 정평도 잠에서 깼다. 갑작스러운 불빛이 눈을 찌르자 눈을 가리려던 정평은 여전히 손발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냈다.
“또 뭘 하려고······.”
정평이 하품하며 말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털썩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곧이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교랑은 목멘 목소리로 흐느끼나 싶더니 종국에는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을 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조상님. 이 후손이 무능하여 정씨 가문이 없어졌어요. 정씨 가문이 사라졌어요.
* * *
날이 훤히 밝자 객잔도 활기를 되찾았다. 점원들이 정갈하게 차린 식사를 들고 복도를 오갔다.
“식사요, 식사 왔습니다.”
이미 밧줄을 풀고 깨끗하게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은 정평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손을 비볐다. 더는 못 기다리겠는 듯 눈앞의 탁자를 앞으로 끌어당기던 정평은 탁자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문득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평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씩 웃었다.
“벌써 몇 끼를 굶어서 말입니다.”
두 아낙은 입을 삐죽이고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많이 드세요.”
“불편하신 곳은 없지요?”
시종이 물었다. 아낙들과 시종들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멸시하는 눈빛도, 사기꾼이라는 호칭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평이 젓가락을 들며 웃었다.
“만족합니다, 만족하고말고요. 나한테 그럴 것 없어요. 누군가의 길흉에 대해 말한다는 게 그렇습니다. 나쁜 말 듣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이런 험한 꼴을 당해도 그러려니 합니다. 사실 댁들이 날 때린 것도 아니고요.”
정평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러자 시종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얼른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시종들이 예를 표했다.
아씨께서도 사과하셨는데, 우리야 말할 것도 없지.
정평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오, 아닙니다. 댁들 아씨가 사과한 건 그 일 때문이 아니에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멈칫하여 고개를 들고 정평을 쳐다봤다.
이거 때문이 아니라고? 그럼 뭐 때문인데?
정평은 젓가락을 쥐고 그릇을 집어 들었다.
“나랑 닮은 사람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정평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 놀랐으니 사과한 거지만요.”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다.
“아무튼 너무 걱정들 마십시오. 댁들 아씨가 깨어났으니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다들 밥부터 먹어요.”
정평은 젓가락을 흔들며 웃음을 지은 후, 밥을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정평의 방에서 물러난 두 아낙은 직접 아침 식사를 들고 정교랑에게 갔다. 정평 앞에서 한바탕 통곡을 하고 난 정교랑은 모두의 걱정과 달리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정신을 잃거나 또다시 정처 없이 걸으러 나가는 대신 방으로 돌아왔다.
“아씨, 뭐라도 좀 드세요. 벌써 두 끼나 거르고, 밤까지 지새우셨어요.”
아낙이 나지막이 말했다. 서책 더미 속에 앉아 있던 정교랑이 눈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낙은 몹시 기뻐했고, 시종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인과 함께 집을 나서는 일은 본디 아무 걱정도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을 만나고 어떤 사람과 마주치든 여인은 본인의 능력으로 깔끔하게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누군가와 마주치거나 무슨 일을 만난 게 아니라, 여인 본인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말이다.
이래서 남의 문제는 돕기 쉬워도 자기 문제는 어렵다는 건가.
밖에서 긴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반근이 두봉을 걸치고 고단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반근의 뒤로는 똑같이 초조한 안색의 조 집사가 보였다.
“아씨!”
“대체 무슨 일이더냐?”
반근은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쳤고, 조 집사는 걸음을 멈추고 시종들에게 물었다.
“말하자면 깁니다. 사실 저희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시종들이 대답하는 말은 반근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반근이 안으로 들어서자 저쪽에 앉아 식사 중인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아씨!”
반근이 소리치자 정교랑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반근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반근은 또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씨, 무슨 일이에요?”
반근이 무릎을 꿇고 울며 물었다.
“안색이 왜 이리 안 좋으세요?”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래. 괜찮아.”
정교랑이 대답했다. 반근은 정교랑을 보자 더욱 눈물이 나왔다.
“아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또 혼절을 하시다니요?”
반근이 두려운 표정으로 울며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숙여 젓가락으로 천천히 밥알을 골랐다.
“이젠 혼절하지 않을 거야.”
이젠 혼절하지 않으신다고? 그렇담 다행이긴 한데, 아씨의 얼굴이 왜 이렇게 슬프고 절망적으로 보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사실 말하고 말 것도 없어요. 아씨께서 갑자기 변하신 거죠.”
“그게 말이 되나? 그런 작자가 목숨이 없네, 죽네 하며 떠들었다 한들, 아씨께서 눈 하나 깜짝할 분이냐고!”
조 집사와 반근은 옆방에 시종들과 모여 앉아 있었고, 정교랑은 식사를 마친 후 두 아낙과 함께 활을 쏘러 나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달라, 달라졌어.
반근이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뭐라 형언할 순 없지만 반근은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아씨가 마음이 없는 듯 무뚝뚝한 분이었다면, 지금의 아씨는 영혼을 잃은 분 같았다.
예전의 아씨는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지만 마음을 찾고 싶다는 의지와 바람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씨는 모든 기대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듯 생기라고는 찾을 수 없어 보였다.
반근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씨는 쭉 마음을 찾고 계셨어. 혹시······ 찾으셔서 그런 건가? 근데 마음을 찾았는데 왜 저렇게 변하신 거지?
“결국 핵심은 정평이라는 자에게 있군.”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씨께서는 쭉 그자를 찾아다니셨고, 그자를 찾은 후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조 집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녀석한테 가서 물어봐야겠다.”
반근은 조 집사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리며 따라 일어섰다.
“나도 갈래요.”
방문을 나서던 두 사람은 활쏘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정교랑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정교랑은 소매를 묶은 끈을 풀지 않은 채 한 손에는 활을, 한 손에는 화살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다. 시종들의 묘사와 달리 평상시와 다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짐 챙겨. 바로 출발할 거니까.”
조 집사와 반근은 멈칫했다.
“어이, 그럼 난 이제 가 봐도 되죠?”
그때 다른 쪽 방에 있던 정평이 밖으로 몸을 빼고 물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정평의 모습에 정교랑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네.”
정교랑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편하실 대로······ 하셔요.”
하셔요?
조 집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정평을 쳐다보았다. 정평이 입을 벌리고 헤 웃었다.
“그렇게 깍듯할 거 없어요.”
웃으며 대꾸한 정평은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몸을 밖으로 뺐다.
“아, 전에 성에서 나를 찾던 사람이 혹시 낭자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정평이 히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진작 알았으면 지금껏 도망다닐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럼 이제 집으로 갈 수 있겠네요.”
정교랑이 재차 예를 표했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정교랑은 정평이 자리를 떠난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짐을 챙겨라.”
조 집사의 분부에 시종들은 얼른 대답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확실히 달라지셨구나.”
조 집사가 한숨을 내쉬며 반근에게 말했다. 막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반근이 그 말에 멈춰 섰다.
“못 봤어? 아씨께서는 정평과 눈도 못 마주치셨어. 사람이 사람을 감히 똑바로 못 본다는 건, 존경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둘 중 하나야. 전에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신 적 없는데.”
경성의 그 수많은 고관대작과 귀인들에게도 존경을 표한 적 없고, 손가락 하나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던 여인이었다. 여인은 누구를 대하든 시종일관 담담한 시선으로 응했다. 그런데 내력도 불분명한 저 정평이란 자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평이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조 집사는 걸음을 옮겨 정평을 쫓아갔다.
“대체 몇 번을 말합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아니, 보면 모릅니까?”
멱살을 잡힌 정평이 소리쳤다.
“당신네 아씨는 보통 똑똑한 게 아닌데, 아랫사람들은 왜 죄다 이렇게 아둔하지?”
이거 봐, 이상하잖아! 보통은 아씨더러 바보라고 했어. 아씨한테 똑똑하다고 한 자는 이자가 처음이라고!
조 집사는 정평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어서 말해라. 넌 대체 뭐 하는 자냐!”
조 집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윽박질렀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다 알아봤잖습니까. 사실 딱히 속일 것도 없고요. 난 정씨 가문 사람입니다. 난 내 이름을 자랑스레 여기는데 뭐하러 속여요? 바보라 해도 다 알겠네. 난 그냥 댁들 아씨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을 뿐이라고요. 옛 추억이 떠올랐거나 그런 거겠죠. 댁들 아씨도 추태를 보였다며 벌써 나한테 사과했어요. 근데 댁들은 왜 이렇게 아둔하게 구는 거야!”
조 집사가 정평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렇게 보니 정씨 집안 작자들을 닮은 것 같긴 하네.
“당신들 이러면 못써. 댁들 아씨가 그리 명민하니, 이럴수록 댁들이 아둔한 것만 더 돋보인다고.”
정평이 씩씩거리며 투덜대자 조 집사가 손을 들어 따귀를 날렸다.
“양양거리지 말고 분수를 지켜라.”
조 집사가 퉁명스레 말했다.
정씨 성을 가졌다고 해서 다 아씨처럼 대단한 줄 알아? 어디서 입을 놀려!
“썩 꺼져라.”
정평은 콧방귀를 뀌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다음 건들건들 자리를 떴다. 조 집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지켜보다가, 정평이 거리로 사라진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이쪽의 정교랑은 벌써 짐 정리를 마치고, 마차를 두 대 더 준비하게 했다.
“아씨께서 두 사람이 밤새 오느라 고단했을 거라며 말을 타지 말고 마차로 이동하시래요. 그래야 가는 길에 쉴 수 있다고요.”
두 아낙이 조 집사에게 말을 전하며 감탄했다.
“저리 심성이 곱고 다른 이를 잘 챙겨 주는 아씨는 처음 보네요.”
보살님처럼 착하고 야차처럼 무서워 종잡을 수 없는 분이지.
조 집사는 한숨을 내쉬고, 이미 마차에 오른 정교랑을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씨.”
휘장을 들고 마차에 오른 반근이 팔걸이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정교랑을 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불렀다. 정교랑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응 하고 짧게 대꾸했다.
“혹시, 마음을 찾으신 거예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이 눈을 뜨고 반근을 보며 싱긋 웃자 반근은 눈물을 떨궜다.
“아씨.”
반근이 다가앉아 정교랑의 옷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마음이 있으면 원래 그래요. 기쁠 때가 있으니 괴로울 때도 있는 법이죠. 기분 좋은 일을 많이 생각하고, 속상한 일은 잊으세요. 그게 좋아요.”
정교랑이 반근의 손을 토닥여 주며 웃었다.
“가서 쉬어. 돌아가면 네가 도울 일이 많을 거야.”
속상한 일을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다면, 세상에 고통스러운 일이 그리 많을 리 없지. 자고로 남의 일에 대해 말하긴 쉬운 법이었다.
반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