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15
교랑의경 415화
“아무리 속상하다고 한들, 건강까지 해쳐선 안 돼.”
주육낭이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술로 근심을 달래는 게 뭐 잘하는 짓이라고.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짓이지.”
손수건을 내려놓은 정교랑은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주육낭은 정교랑이 또다시 술그릇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고개를 홱 들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야!”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한잔할래요?”
정교랑이 물어보면서 반근에게 손짓했다.
반근이 술그릇 하나를 주육낭에게 건네자, 주육낭은 곧바로 그릇을 받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정교랑 옆에 꿇어앉아 앞에 놓인 술그릇들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주육낭이 어찌나 빨리 술을 들이켰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있던 술그릇 일곱 개가 깨끗하게 비워졌다.
주육낭은 마지막 그릇을 비운 뒤, 소매로 입가를 대충 닦았다. 그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그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주육낭은 떨리는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곧바로 술기운이 치솟아 오른 주육낭은 얼굴이 새빨개졌고, 눈가에도 취기가 어려 있었다.
“내가 그자들을 잘 돌보지 못한 거야.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네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쳐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이 세상엔 누군가를 돌봐야만 하는 사람도, 누군가가 돌봐 줘야만 하는 사람도 없어요. 다 각자의 일일 뿐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정교랑이 말을 끝낸 뒤 술을 들이켜려고 손을 올리자, 주육낭이 팔을 뻗어 정교랑의 술그릇을 뺏어와 단숨에 비웠다.
“그래. 난 내 일을 말한 것일 뿐이야. 너와도, 그자들과도 상관없는 일을!”
주육낭이 말을 마친 뒤 술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옮기지 못하고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아씨, 만취했어요.”
주육낭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살피던 반근이 말했다.
“여덟 그릇이나 마셔야 만취라니. 이 술은 정말 형편없구나.”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녀는 대청 안에 놓인 술동이들을 둘러보고는 반근에게 지시했다.
“치워. 남은 술은 다들 나눠 마시게 하고.”
반근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반근은 정교랑이 주육낭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대자로 뻗어서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는 주육낭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기 술동이 좀 치워 줘.”
반근은 주육낭의 옆을 지나가면서 마당에 있던 시종들에게 말했다.
황궁, 경왕의 궁.
이 태의가 맥을 짚던 손을 떼자, 경왕을 양쪽에서 잡고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경왕을 놓아주었다. 내시들의 손에 눌려 답답해하던 경왕은 소리를 지르며 내시들의 품에서 뛰쳐나갔다.
“마당으로 데리고 가서 놀아 줘라.”
진안 군왕의 말에 내시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왕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십니다.”
이 태의가 말하고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 말은 귀가 닳도록 듣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전하가 듣고 싶으신 말씀은 이 말이 아니겠지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희망은 일찌감치 버렸어요. 짧고 고된 인생인데, 현실에 맞지 않는 억측으로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 태의는 늠름하게 웃는 진안 군왕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도 부디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고달프고 짧으니까요.”
나는 내가 하게 될 일을 생각하면, 아주 즐겁습니다. 그 일을 해낸 뒤에는 아마 더욱 즐겁겠지요.
이 태의가 천천히 물러났다.
“전하, 정 낭자께 경왕을 한 번 더 데려가 보는 건 어떠신지요?”
내시가 조용히 물었지만, 진안 군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은 의원이 아니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내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정 낭자가 돌아온 게 영 이상합니다. 때로는 목숨을 살려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꼭······.”
“내가 묻지 않은 일에 대해 굳이 알려 줄 필요 없다.”
진안 군왕이 내시의 말을 끊었다. 뒤에 서 있던 내시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린 진안 군왕의 얼굴 반쪽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냉랭한 진안 군왕의 반응에 내시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은 회랑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 전각 앞에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를 쳐다보았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경왕을 향해 걸어가면서 손뼉을 쳤다.
“이리 와. 이 형이랑 축국(蹴鞠) 하러 갈까?”
휘장 사이로 비친 햇살이 주육낭의 눈을 찔렀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귓가로 끊임없이 들려왔다.
“노야, 아무래도 의원을 불러와야겠어요.”
“무슨 의원을 불러. 술을 진탕 마셔서 저러는 거잖소.”
“술을 마신 건지 독을 쓴 건지 누가 알아요? 노야, 그 여인을 어떻게 믿으라고요.”
“또 헛소리를 하면 당신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겠소.”
“이것 봐요. 당신도 걱정은 되지만 그 애가 무서운 거잖아요. 우리 육낭이 잘못되더라도, 당신은 그 애가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할 거죠?”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주 노야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주육낭은 몸을 일으켜서 큰소리로 외쳤다.
“전 괜찮으니까 그만 싸우십시오. 조용히 혼자 누워 있고 싶어서 그래요.”
문밖에서 들려오던 주 부인의 울음소리가 뚝 끊기고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낭, 정말 괜찮은 거니?”
주 부인이 문밖에서 물었다.
“네, 정말 괜찮아요. 일어났습니다.”
주육낭이 대답했다.
“그럼 됐다, 그럼 됐어.”
주 부인은 문밖에 서 있던 시녀들에게 몇 마디 당부를 더 한 뒤에 자리를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인은 참 불쌍해. 그 여인에 대해 잘 모르는 가족들은 그녀를 멸시하고, 그 여인에 대해 잘 아는 가족들은 그녀를 무서워하거나 꺼리잖아. 누구 하나 그 여인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가엾이 여기는 가족이 없어.”
진십삼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 말 못 들었어? 혼자 조용히 좀 누워 있고 싶다니까?”
주육낭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들었지.”
진십삼이 대꾸하고는 팔찌 하나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건 오랑캐들한테 얻어온 전리품인가? 늑대 이빨? 꽤 예쁘네.”
“그렇게 마음에 들면 가져가던가.”
주육낭이 말하면서 침상에 도로 누웠다.
“사내자식이 이런 걸 해서 뭐해.”
진십삼이 웃으면서 늑대 이빨로 엮어진 팔찌를 주육낭의 얼굴에 던졌다.
“뭐, 이런 걸 차고 다닐 여인도 몇 없겠지만.”
주육낭은 진십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팔찌를 손목에 차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이, 그나저나 어제는 무슨 얘기를 나눈 거야? 자네는 왜 그렇게 취한 거고? 정 낭자가 어쩌다 자네에게 술을 같이 마시자고 했지?”
진십삼이 주육낭을 툭툭 밀치면서 웃었다. 참다 못한 주육낭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윽박질렀다.
“과거 시험이 반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만 돌아가서 공부나 좀 하시지? 나중에 자네가 낙방하면, 나는 자네를 위로해야 하는 거야, 조롱해야 하는 거야?”
진십삼이 웃으면서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얘기하기 싫다면 관둬. 어차피 자네는 정 낭자 앞에서 항상 창피한 꼴만 보였으니까. 얘기하기 싫다 해도 이해하겠네.”
쿵 소리와 함께 짐승 머리 조각이 문에 부딪혀 떨어졌다.
소리를 들은 진십삼이 문밖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면서 헤헤 웃었다.
“한 번도 나를 진짜로 때리려고 한 적도 없으면서, 세게 던지는 척하기는.”
주육낭이 씩씩대면서 옆에 있던 찻잔을 집어 들자, 진십삼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떠났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주육낭은 피곤한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고 침상 위로 쓰러졌다. 그는 천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휘장 뒤로 시녀가 방을 나가는 그림자가 비치자, 주육낭은 베개 밑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어 펼쳐 들었다.
새하얀 손수건 위에 ‘태평’ 두 글자가 암홍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건 분명 그 여인이 만든 게 아닐 거야. 그 여인은 아마 바느질을 하는 법도 모를걸.
주육낭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생각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한쪽으로 휙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잠시 뒤, 다시 손수건을 주워 얼굴에 덮은 주육낭은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십삼이 옥대교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곧 있으면 과거 시험 아니에요? 타지에 있던 서생들도 벌써 경성으로 들어오던데, 공자님은 엄청 한가해 보이네요.”
시녀가 말했다.
“다 믿는 구석이 있느니라.”
진십삼이 너스레를 떨면서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대청 밖으로 나오고 있던 정교랑이 보였다. 반근은 손에 너울을 들고 있었다.
“어디 출타하려는 겁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가 도울 게 있을까요? 이번 일은 지난번과 많이 다르던데요. 지난번은 경성에서 일어난 일이고, 조정의 일과도 엮여 있었지만, 이번 일은 이미 끝난 전투와 서북 군사가 관련된 일이에요. 게다가 승리를 거둔 전투이기에, 서북의 모든 관리와 장수들은 이번 전투에 이견이 없을 겁니다. 겨우 병졸 몇 명 죽어 나간 일에는 아무도 꿈쩍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조정도 마찬가지겠죠. 생각해 봐요, 낭자. 서북 용곡성에서도 키우지 못하고 눌러 버린 일인데, 경성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일은, 낭자가 정정당당하게 나오더라도 꽤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진십삼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경성 인근에 묫자리를 알아봐 줘요.”
묘, 묫자리?
진십삼이 깜짝 놀랐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거센 바람과 함께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차 한 대가 급하게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마중 나온 점원이 서둘러 우산을 펼쳤지만,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옷은 이미 젖어 있었다.
“상등 방에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해 주시오. 다들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가야겠으니.”
사내의 말을 듣자, 점원은 객잔 안으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병졸로 보이는 젊은 사내들은 연꽃이 새겨진 조각문양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고, 평범한 행색의 아낙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들의 말씨와 옷차림새, 그리고 표정에서는 시골 촌뜨기의 어벙함이 한가득 묻어났다.
저런 사람들이 상등 방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다고?
점원이 입술을 삐죽였다.
“방에 술도 한 주전자 가져다주시오. 좋은 술로다가.”
사내가 점원 앞에 서서 말했다.
점원의 눈에는 자신 앞에 선 사내 또한 연꽃 조각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는 병졸들과 다를 바 없이 비쩍 마르고, 억세고,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처럼 볼품없어 보였다.
“왜 그러시오?”
범강림이 자신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점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저희 객잔은 선불이라서요.”
점원이 팔짱을 끼고 느긋한 모습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돈주머니 한 뭉텅이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민첩하고 정확한 동작으로 돈주머니를 받아 든 점원은 굳이 주머니를 열어보지 않고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고, 손님. 상등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어이! 빨리 뜨거운 목욕물 좀 받아 와. 말에게는 질 좋은 건초를 먹이겠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뒤로하고, 객잔 안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범강림 일행이 상등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대청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대청 구석에 앉아 있던 세 손님이 몸을 일으켜서 뒷마당 입구로 걸어갔다. 그들은 상등 방을 향해 올라가는 범강림 일행을 흐릿한 비안개 사이로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