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88
“아우우우!”
짙은 요기로 인해 세상에 녹아들었던 한제의 모습이 드러나자 요랑은 다시 한번 포효하더니 그를 죽일 듯 노려보며 냅다 달려들었다. 마치 수련성 하나가 통째로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거대한 회오리가 응축되면서 요랑은 마치 하나의 끝없는 구멍이 된 듯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반경 10만 리의 요기가 응집되면서 형성된 이 강력한 흡입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였다.
눈 깜짝할 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요랑은 시커먼 입을 쩍 벌려 한제를 삼키려는 듯 달려들었다.
“그때도 네놈은 내 법보를 앗아갔지! 한데 지금 또다시 앗아가려 하느냐! 빌어먹을! 이 탐랑은 여태 수련을 이어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치욕을 당한 적이 없다! 죽어라! 죽어! 죽어!”
탐랑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반면 한제는 싸늘한 얼굴로 피식 웃더니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1만 척에 달하는 6성급 고신이 되었다.
고신의 반점이 미간에서 급속도로 회전하는 사이,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오른손을 쳐든 채 낮게 기합을 넣었다.
순간 오른손에 짙은 붉은 빛이 나타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 길이가 1천 척에 달하는 검으로 변했다.
피처럼 붉은 빛 탓에 멀리서 보면 검이 아니라 거대한 채찍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고신이 된 한제는 입을 쩍 벌린 요랑을 향해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콰쾅!
붉은 검이 요랑의 미간을 강타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오오오!”
요랑의 비참한 비명이 우주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동시에 붉은 검은 파죽지세로 요랑의 머리를 가르고 들어가 몸까지 완전히 관통했다.
일검(一劍)에 반으로 갈린 요랑의 몸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형형한 눈으로 탐랑을 바라보았다.
탐랑은 입을 쩍 벌린 채 두려움에 와들와들 떨면서도 곧장 뒤로 물러나더니 오른손을 휘둘러 자신이 가진 가장 강한 법보를 소환했다.
그것은 온전치 못한 나무 조각이었다.
허나 그는 법보를 제대로 사용해볼 틈도 없었다. 그 순간 한제의 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 것이다.
“정(定)!”
탐랑은 우뚝 멈춰선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눈빛만이 더욱 짙은 두려움으로 물들어갔을 뿐이다.
“두려워할 것 없다. 몇 가지 질문에만 답한다면 죽이지는 않겠다.”
조각상의 정체
‘저자가 정신술에 능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탐랑의 마음속에 거대한 파도가 몰아쳤다. 두 눈은 두려움과 경악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비열한 자식! 정신술을 이용할 수 있으면서 내가 가장 강한 법보를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희망까지 짓밟아버린 거야!’
원신과 원력, 심지어 신식조차도 움직일 수 없었던 탐랑은 한제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눈만 껌뻑였다. 온전치 못한 조각상 또한 그저 허공에 둥실 떠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는 동안 몸이 점점 줄어든 한제는 탐랑 앞에 섰을 때 본래의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한데 그는 탐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각상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가장 강한 법보가 한제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탐랑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쑤시는 듯 고통스러웠다. 이 극심한 고통과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피를 왈칵 토했다.
“겨우 법보 아닌가. 그 유명한 탐랑이 고작 이 정도로 쩨쩨하게 굴지 말게. 그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이리 훌륭한 법보를 선물하니, 내 감사히 받겠네.”
한제는 얄궂게 탐랑을 놀리고는 나무 조각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데 그 순간 한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범해 보이는 데다가 곳곳이 망가지기까지 한 조각상은 다소 기이한 사람 형태였다.
구름 모양으로 장식된 옷을 입은 중년 사내로 외모는 평범해 보였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을 은은하게 풍겼다.
그 위압감은 짙지 않아 보통이라면 가볍게 넘겼겠지만 한제는 조각상과 눈을 맞춘 순간 바르르 몸을 떨었다.
‘이럴수가!’
한제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이 갈가리 찢겨나갔다.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조각상에서 뿜어져 나와 그의 두 눈을 타고 심신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동시에 귀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었고 그 속에서 심신을 잃은 한제는 이 놀라운 힘에 의한 충격으로 넋이 나갔다.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이 흘렀다.
십년, 백년, 천년, 만년⋯⋯.
그러던 어느 날, 한제는 이미 사라진 눈앞의 세상에서 어떤 대륙을 보게 됐다.
계외와 계내를 합친 것의 1만 배를 훌쩍 넘길 법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대륙.
심신을 통해 보았던 이 모든 장면은 찰나에 사라지고 한제는 또 한 번 몸을 바르르 떨며 깨어났다.
우주도 세상도 그대로였다. 정신술로 인해 꼼짝도 하지 못하는 탐랑 역시 그대로였다.
“…”
한제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방금 그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의 흐름을 겪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순간에 불과했다.
눈 한 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환각이었나?’
한제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심신 속에서 보았던 모든 것이 마음 깊은 곳에 낙인처럼 찍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건 뭐였을까?’
다소 긴장하며 다시 보게 된 조각상은 좀 전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생김새는 그대로였으나, 조금 전과 달리 누구든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할 정도의 위압감을 뿜고 있었다. 심지어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라 해도 이 조각상 앞에서는 벌벌 떨 것만 같았다.
‘이자는 대체 누구지?’
한제가 평생을 통틀어 보았던 수많은 조각상 중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요령의 땅에서 본 선제 청림의 조각상이었다. 그 충격은 어지간한 수련자의 심신을 무너뜨릴 정도였다.
눈앞의 이 조각상은 그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제는 이 조각상 앞에서는 청림의 조각상도 별것 아닌 존재임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내의 덤덤한 얼굴에는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 조각상, 어디서 얻었지?”
한제는 탐랑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동시에 그는 손을 휘둘러 정신술을 약간 풀어주었다. 탐랑은 그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어느 오래된 무덤 안이었다.”
그 대답에 한제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물었다.
“태고 성신에 들어오려면 봉계의 진을 뚫어야 하는데 네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체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것이냐?”
한제의 목소리에 어린 한기에 탐랑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역시 오래된 무덤을 통해⋯⋯. 네가 가져간 모든 법보… 그러니까 부양검, 호골비, 무마창, 천황로 장천목령, 고식엽, 그리고 마혼병은 그 오래된 무덤에서 얻은 것이다.”
탐랑은 저항을 포기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지만 거짓말을 했다가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한제가 수혼술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해도 의식조차 갖지 못한 상태로 살게 될 터였다.
한제는 두 눈을 번득이며 탐랑을 바라보았다.
“무슨 무덤?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면 네 혼을 뒤지겠다.”
우려하던 이야기가 나오자 탐랑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망월로부터 도망쳐 겨우 목숨을 건지고는 나천성역의 반쯤 폐허가 된 어느 수련성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네 추격을 피하며 상처를 치료했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너는 사라졌다.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덕분에 나는 몸 상태를 완벽하게 회복했다. 그때는 연맹성역과의 전쟁으로 나천성역은 거의 텅 비어 있었지. 너 또한 나천성역을 벗어난 상태였다.”
술술 불자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탐랑의 목소리는 다소 떨렸으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기에 말을 끊을 수도 없었다.
“나는 연맹성역으로 돌아가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망월에게 삼켜진 후로 온몸과 원신에서 씻어낼 수 없는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기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악취를 제거하기로 했지. 그 방법을 찾아 온 우주를 방랑하던 어느 날, 나천성역 가장자리에서 기이한 회오리 하나를 발견했다.”
탐랑의 눈빛이 점점 과거의 회상으로 잦아들었다.
“그 회오리의 출현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어. 마치 일부러 내 앞에 나타난 것 같다고 할까? 허나 특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그보다 더 기이한 일들도 수두룩하게 겪었으니까. 심지어 내가 결단기 수준이었을 당시에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거대한 솥이 하나 나타나더니 곧장 그 상대의 머리에 떨어져서⋯⋯.”
한제는 미간을 팩 구기며 말했다.
“옆으로 새지 말고!”
탐랑은 화들짝 놀라더니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말을 이었다.
“한데 회오리가 나타난 순간, 난 심신을 통해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느낌이었지. 나는 망설임 없이 그 회오리 안으로 들어갔어. 내가 그 반대편으로 나오자 회오리는 즉각 사라지더군. 나타날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한 호흡 정도였어.”
그 말에 한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그 회오리가 오직 너만을 위해 문을 열어줬다는 말이냐?”
한제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탐랑은 표정이 급변해 황급히 덧붙였다.
“거, 거짓말이 아니야! 사실이라고! 나도 이상하게 들리는 건 알지만 정말이다! 게다가 그런 일이 내게는 처음 있었던 것도 아니니, 네가 안 믿더라도 어쩔 수 없지.”
한제는 말없이 싸늘한 눈으로 탐랑을 노려보았다. 탐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소 체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여덟 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마을 안에서 황정을 발에 채이도록 찾을 수 있었지. 어떻게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한번은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거기에 주과가 떡하니 있더군. 어릴 때부터 태고의 뇌룡과 함께 자랐고 뜬금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고신의 솥을 손에 넣기도 했지. 다른 사람들이 우의 선계에 가겠다고 목숨 걸고 우정을 빼앗을 때도 나는 그저 지나가던 중 우연히 우정을 줍기도 했고.”
탐랑의 입에서는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선계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쥐꼬리만큼의 선옥을 얻는 동안, 나는 처음 들어가자마자 선옥이 가득한 어느 동굴로 전송됐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입구조차 찾지 못한 연맹성역의 어느 오래된 유적지에서 난 별생각 없이 세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그 깊은 곳까지 진입하게 되더군.”
탐랑은 이제 한제가 믿건 말건 관심 없다는 듯이 쉴 새 없이 떠벌렸다. 물론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지만 중요한 건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좋아, 계속해봐. 회오리에서 나온 뒤에는 어떻게 됐지?”
한제는 아직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재촉했다.
“회오리를 통해 들어온 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매우 혼란하고 균열이 가득한 곳이었지.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질 상황이었어. 그곳에는 수많은 바위조각이 둥둥 떠서 사방을 에워쌌는데 가장 깊은 곳은 짙은 안개로 덮여 있어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난 그곳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수백 년을 갇혀 있었지. 짙은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이를 통해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를 떠올리는 게 그리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는지 탐랑의 표정은 다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