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19
수많은 수련국은 이제 하나의 국가로 뭉쳐진 상태였고 여러 종파들 역시 9대 종파로 재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홉 개의 종파가 주작성 대부분의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제는 연혼종을 발견했다. 둔천의 자애로운 얼굴이 떠올라 반가운 느낌이 들었지만 그곳 역시 달라진 상태였다.
당시 연혼종이 있던 산은 사라져 호수가 되어 있었다. 그 주위는 영력의 파동을 발산하는 수많은 누각이 있었지만 그곳은 연혼종이 아닌 다른 종파였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건만 지금 저곳에서는 어떠한 친근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거마족이 있던 곳도 달라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마족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풀밭이 되어 있었고 그 위로 일반인들이 양을 치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양 떼 사이를 쏘다니는 개들이 왕왕 짖는 소리와 양치기들의 노랫소리가 듣기 좋게 귓가에 울렸다.
‘이곳도⋯⋯ 변했군.’
한제의 얼굴은 이제 거의 풀이 죽어 보일 정도였다. 그는 묵묵히 걸었고 광인은 그런 한제 뒤에 붙어 그답지 않게 침묵했다. 한제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짙은 외로움에 그 역시 고향이 그리워졌다.
한참 뒤, 한제는 설역국에 도착했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듯했던 그곳마저 완전히 변해 이제 울창한 숲뿐이었다. 당시의 도시들은 사라지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제가 백여 년의 시간을 보냈던 일반인 도시도 천우라는 이름의 일반인 소년의 흔적도…
멍하니 숲을 바라보던 한제는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설명하기 힘든 헛헛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인정하긴 힘들었지만 이곳은 더 이상 그가 아는 고향이 아니었다.
이제 주작성은 익숙하거나 따스하지도 그렇다고 편하지도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흐릿한 기억뿐. 오랜 시간 바깥세상을 떠돌고 돌아온 고향의 낯선 모습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멀리서부터 달라졌음은 짐작했지만 이 정도로 변했을 줄이야…’
심지어 조나라에 있을 부모님의 무덤을 찾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옛날 이모완과 함께 지냈던 수마해의 동굴을 찾아갈 힘을 낼 수도 없었다. 그곳들마저 완전히 사라졌다면 견디기 힘들 것만 같았다.
한제는 말없이 숲속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서 뭐라도 낯익은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다.
나뭇잎들을 걷어내자 이미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가 드러났다. 작은 짐승 몇 마리가 잡초로 뒤덮인 도시 위를 돌아다니다가 한제가 가까이 다가가자 움찔 놀라 달아났다.
폐허가 된 도시를 거닐자 그제야 약간의 익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후에는 사라졌다. 도시 유적 저 앞으로 깊은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멍은 그가 당시 머물렀던 골목을 삼켜버린 상태였다.
한참을 멍하니 그 구멍을 바라보던 한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수마해였다. 그곳을 채웠던 안개는 당시에 이미 흩어져 사라졌지만 거대한 분지만큼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허나 지금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9대 종파 중 하나에 점거된 상태였다. 게다가 이모완과 함께 머물렀던 동굴은 찾을 수 없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한제는 가슴이 아파왔다. 모완과 함께 지냈던 동굴을 거대한 용의 몸통을 모완이 심혈을 기울여 옥패를 만들던 장소를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말없이 돌아선 한제는 모완이 노년을 보내고 주은혜가 자라난 산골짜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곳마저 이미 깎이고 깎여 바다가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한제에게는 더 큰 아픔을 줄 뿐이었다.
‘이곳도… 없어졌구나.’
주작성은 당시보다 훨씬 아름다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일 뿐, 한제가 원했던 것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이곳이 봉계 지존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주작성을 성지로 개조했지만 그럴수록 정작 당사자인 한제에게는 공허하고 헛되다는 것은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향에서의 한제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봉계의 지존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어린 시절을 그대로 추억할 수 있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지난 2천 년 동안 냉혹한 수련계에서 버텨온 그에게 한 줄기 온기를 줄 수 있는 공간일 뿐이었다.
‘그런 온기조차 내게는 사치란 말인가.’
“스승, 왜 그러나? 이 몸이 보기에는 퍽 아름다운 곳인데⋯⋯.”
광인은 바보처럼 웃었다. 나름 한제를 위로하려 한 것이리라.
잎에는 뿌리가 있다
한제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긴 한숨을 내뱉고는 발을 내딛어 광인과 함께 자신의 진정한 고향인 조나라로 향했다.
잠시 후, 하늘에서 조나라를 내려다보는 한제의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이곳은… 변하지 않았어.”
한편, 그 무렵 저 아래 조나라에는 한제보다 앞서 주작국에 들어왔던 네 명의 수련자가 있었다.
“이곳은 봉계 지존께서 유년기를 보내며 자라난 곳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 조나라라는 곳은 주작성에서도 진정한 성지라고 할 수 있지!”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나라는 고리 모양으로 반짝이는 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외부인의 진입을 막기 위해 둘러놓은 모양이었다.
“9대 종파를 포함한 주작성의 곳곳은 배첩(拜帖)만 제출하면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지만 오직 이곳만큼은 그 누구의 진입도 제한하고 있지. 주작성의 주인인 주무태가 주작성을 성지로 개조할 때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조건이었다는구나. 다른 곳은 몰라도 조나라만큼은 풀 한 포기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 그의 조건이었지.”
도덕자의 말에 세 제자는 공손한 얼굴로 조나라를 향해 포권을 했다.
“이곳에서 규정을 따르지 않는 외부 수련자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때, 노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1천 척 정도 떨어진 곳의 하늘에서는 한제와 광인이 내려오고 있었다.
도덕자의 제자들도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주작성이 크지는 않다지만 저자들은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군!”
“천박하고 불손한 자들 같으니라고.”
허나 그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광인은 네 명의 수련자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계집들아, 또 만나는구나! 하하, 보아하니 이 몸과 너희들의 인연이 깊은 듯하다. 이리 와라, 인연을 기리고자 내 상을 내리마.”
한제는 광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조용히 조나라를 내려다보았다. 시야가 다시 흐려졌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그는 점차 조나라를 에워싸고 있는 빛의 장막에 가까워졌다.
한편 도덕자의 세 제자는 광인의 말에 벌컥 화가 났다. 만약 스승이 곁에 있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달려들어 본때를 보여줬을 터였다.
허나 그들의 스승은 흠칫 놀란 얼굴로 한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제는 조나라를 에워싼 진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노인은 한제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도우! 조나라는 봉계 지존의 고향이자 성지야! 우리 같은 외부의 수련자들은 진입이 허락되지 않네! 자중하게!”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노인의 목소리에 광인은 깜짝 놀라더니 도덕자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젠장할, 깜짝 놀랐잖아! 네가 나를 놀라게 했으니 나도 너를 놀라게 하겠다!”
그 난리 속에서도 한제는 마치 귀머거리라도 된 것처럼 조나라로 다가섰다. 그의 눈에 빛으로 이루어진 진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반기는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조나라 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잊은 것처럼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잠시 후 한제가 진에 접촉하자 파문이 일더니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빛의 장막에 일어난 거대한 회오리는 빠르게 회전하면서 점점 격렬한 파문을 일으키다가 결국 조나라를 에워싼 진 전체를 뒤덮었다.
“멈춰!”
도덕자는 한제에게 다급히 달려들었다. 이미 봉계 지존의 고향을 훼손했으니 저 수련자가 곧 엄중한 벌을 받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고 한제는 슬픔과 향수를 안은 채 회오리를 관통하듯 지나쳐 조나라로 들어섰다. 그의 발은 곧 가장 익숙한 땅을 디뎠다.
그 순간, 도덕자 두 눈이 싸늘하게 변했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제가 만들어둔 구멍으로 따라 들어갔다.
“감히 조나라의 진을 파괴하고 멋대로 그 안에 들어서다니, 간도 크구나! 그 대가를 치르게 될 터! 허나 그전에 네가 봉계 지존의 고향을 더는 파괴하지 못하도록 내가 막을 것이다!”
도덕자는 싸늘하게 외치며 한제를 뒤쫓았다.
한편, 한제가 조나라의 진에 틈을 낸 순간, 주작성에 상주해 있는 수준 높은 수련자들은 이를 감지하고는 분노했다.
“감히 봉계 지존의 고향에 쳐들어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대체 어떤 자인지 모르겠으나 용서치 않겠다!”
이어서 여러 줄기의 빛이 주작성 곳곳에서 조나라로 향했다. 동시에 9대 종파에서도 한 갈래씩의 강력한 기운이 솟구쳐 조나라로 향했다.
그 무렵, 진 밖에 남은 도덕자의 세 제자는 당황한 얼굴로 진에 생겨난 구멍을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 한제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스승이 뒤를 따른 상황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인은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된다는 듯 손뼉을 치면서 흥분했다.
“하하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광인은 몸을 훌쩍 날려 진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에 잠시 망설이던 도덕자의 세 제자도 이내 이를 악물고 뒤를 따랐다.
그러는 사이 한제는 기억하는 것과 같은 모습의 땅과 산, 강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대산과 그 산 위를 2천 년간 지켜온 누각 등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대산파⋯⋯.’
한제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내딛었고 발아래 나타난 파문과 함께 사라졌다.
“축지성촌! 어쩐지 수준을 알아볼 수가 없더라니… 허나 이곳은 봉계 지존의 고향이다. 제아무리 수준이 높다 해도 처벌을 피할 수는 없을 터!”
도덕자는 눈을 번득이며 신식을 뻗었고 이어서 축지성촌을 발휘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대산 아래 숲의 작은 마을은 이미 황조성(皇祖城)이라는 이름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이는 한제 역시 알고 있었다. 대신 도시 안의 아주 오래된 한제의 집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 집 주위로는 넓은 뜰이 펼쳐져 있었고 그 뜰 동쪽으로 가문의 후손이 새로 만든 듯한 무덤이 있었다. 마치 집 나간 아들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무덤이었다.
이 오래된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사방은 고요했다.
뜰에 나타난 한제는 고요함 속에서 말없이 무덤을 바라보았다. 눈에 그렁그렁했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한제는 눈물을 흘리며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렸을 적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피곤하고 지친 그는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치 이곳에 이르러야만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은 이곳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고향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묘비를 매만지며 그 위에 새겨진 글자를 쓰다듬는 한제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주작성으로 돌아온 것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고 한 번이라도 더 부모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주작성은 한제의 삶을 담고 있었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주작성을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이다.
잎에는 뿌리가 있다. 잎은 낙엽이 되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람에게는 혼이 있다. 그리고 그 혼은 부모님을 떠올릴 때 슬퍼지기 마련이다.
“부모님만 살아 돌아오신다면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모완과… 평이와 함께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한제는 실로 오랜만에 원 없이 통곡했다. 그리고 그의 슬픈 곡성은 고요함 속에 널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는 정말로 부모님이 그리웠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부모님이 있다. 그런 부모님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느끼는 슬픔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흩어져 사라지는 듯하지만 사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식의 뼛속에 박히고 혼에 묻힐 뿐, 절대로 잊히지는 않는다. 자식이 나이를 먹을수록 그 슬픔은 더욱 더 깊이 묻히겠지만 문득 터져 나오는 슬픔을 억누르기란 그만큼 더 힘들어진다.
한제가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기리고 있던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