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92
모은미에 대한 증오는 진즉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한 달⋯⋯.”
한제는 진중한 눈으로 계외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미간을 두드렸다.
그 순간, 그의 몸은 바르르 떨렸고 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육신은 점차 흐릿해지면서 점차 허상처럼 변해갔다. 마치 두 명의 한제가 겹쳐진 것처럼.
이 겹쳐진 인영은 점차 불안정한 기색을 보이다가 잠시 후 왜곡되기 시작했고 한제의 체내에서는 또 하나의 한제가 허상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중첩된 인영이 그대로 분리되면서 펑 하고 울리던 소리는 사라졌다. 흐릿한 인영이 사라지자 진 안에는 똑같이 생긴 두 명의 한제가 남았다.
지금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것은 고신과 고요, 고마를 하나로 합쳐 도고의 유산을 물려받은 한제의 본체였고 서 있는 것은 수련자의 육신인 그의 분신이었다.
이전에도 이렇게 본체와 분신을 분리해 본체를 앉혀두고 분신만 내보내 두 개의 몸으로 동시에 수련을 진행한 적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이 방법을 이용해 다시금 분신을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본체와 잠시 눈을 맞추던 분신은 잠시 후 계내의 우주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본체는 두 눈을 감은 채 진 안에 가부좌를 튼 채 마지막 한 달의 시간을 보냈다.
★ ★ ★
칠흑처럼 어두운 우주. 한제는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었다. 그 수준은 여전히 공령기 중기였지만 지금의 그는 육신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온전한 수련자가 된 상태라 싸움이 벌어진다면 오직 신통술에 의지해야만 했다.
“원고 선역에서 4대 장군이 나오기 전에 나는 4대 선계를 하나로 응집시켜 새로운 선계를 만들겠다. 계내 수련자들은 앞으로 그곳에서 살면서 향불의 힘을 모을 수 있게 될 거야! 앞으로 태어날 수련자들은 모두 선인이 될 수 있고 화신기에 이르기만 하면 누구든 선계로 가 수련을 할 수 있어!”
한제는 진중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해낸 존재는 선대 봉계 지존밖에 없었다. 그는 4대 선계를 열고 계내 수련자로 하여금 향불의 힘을 모을 수 있게 한 바 있다. 하지만 봉계 지존이 중상으로 인해 죽음을 맞고 4대 선계가 무너져 내림에 따라 계내 수련자들은 더 이상 향불의 힘을 모을 수 없게 됐다.
하지만 한제는 봉계의 진을 파괴하고 계내 우주에 태고 성신의 기운을 들임으로써 그런 상황을 무너뜨렸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선계를 새롭게 응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인 셈이다.
이전에도 선계를 다시 응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여러 조건으로 인해 그 이상을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봉계 지존의 법보 없이는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봉계의 진이 충분히 약해진 상태도 아니었다.
한제의 첫 번째 목적지는 운해성역 내 풍의 선계였다. 풍의 선계는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그 안에는 대량의 흡혈마수들이 남아 있다. 지금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그곳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지난 오랜 세월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흡혈마수를 잃었던 한제는 녀석들이 풍의 선계를 찾아 들어가 그곳에서 살아갔음을 녀석들과의 연계를 통해 알고 있었다.
우주에 녹아든 한제는 파문을 일으키며 사라졌고 어느새 운해성역 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풍의 선계 입구 근처였다.
한제는 균열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훌쩍 그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칼날 같은 바람이 훅 불어닥쳤다. 풍의 선계는 이런 광풍이 가득했고 휘휘 부는 바람 소리만이 이곳의 유일한 소리였다. 서늘하고 황량한 바람은 억겁과도 같은 세월을 불어오면서 대지의 먼지를 완전히 흩어버려 땅에는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신식으로 주위를 훑은 한제는 곧장 한 걸음 나섰다. 무궁무진한 광풍 속으로 뛰어든 그는 백발이 마구 날렸지만 바람은 그의 발걸음을 조금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앞을 막아섰다가는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 ★ ★
풍의 선계 깊은 곳의 조각난 대륙 위. 더욱 거센 바람이 부는 이곳에서는 각각 1만 마리가 넘는 두 무리의 흡혈마수가 싸우고 있었다. 죽어나가거나 다치는 녀석이 부지기수였다. 허나 자세히 보면 일방적으로 한쪽 무리만 죽어나갔을 뿐, 다른 무리는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채 피에 굶주린 듯한 눈으로 적 무리를 공격했다.
잠시 후, 결국 한쪽이 다른 무리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때, 몸길이가 1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금혈마수가 저 멀리 산봉우리에서 휙 튀어나왔다. 녀석에게서는 강력한 위압감이 발산됐고 비할 데 없이 날카로운 수백 척의 주둥이는 서늘한 빛을 번득였다. 마치 흡혈마수의 왕 같았다.
산봉우리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금혈마수는 도망치고 있던 흡혈마수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이에 그 무리의 흡혈마수들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고 순식간에 수백 마리가 죽어나갔다.
뒤이어 녀석들을 포위했던 흡혈마수들도 달려들면서 잠시 후에는 무려 1만 마리에 달했던 한 무리의 흡혈마수가 한 마리도 남김없이 전멸하고야 말았다.
거대한 흡혈마수는 동족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서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슬픔도 담겨 있었다. 지난 1백 년간 내내 어려 있던 슬픔이었다. 주인을 잃었다는 슬픔을 오직 이런 살육을 통해서만 견뎌낼 수 있었다.
“캬오오오!”
금혈마수는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포효했다. 이 포효는 살육을 마친 흥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 포효에 주위의 다른 흡혈마수들도 울부짖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곧 하나로 합쳐지면서 주위를 뒤흔들었다.
이 우렁찬 소리에 이 대륙 근처를 지나던 수많은 흡혈마수는 분분히 겁먹은 기색으로 다급히 달아났다. 그중에는 몸집이 꽤 큰 녀석들도 있었지만 겁을 집어먹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지난 1백 년간 이 대륙을 차지한 한 무리 흡혈마수들의 살육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든 이 대륙에 발을 들였다가는 좀 전에 씨가 마른 녀석들과 같은 꼴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거대한 금혈마수가 돌연 몸을 바르르 떨더니 포효를 멈추었다. 두 눈에 어린 서늘한 빛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면서 혼란한 빛으로 대체됐다. 그 혼란 안에는 격앙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거대한 흡혈마수는 흥분과 기쁨으로 몸을 바르르 떨더니 곧장 어딘가로 날갯짓을 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주인의 기운이 갑작스레 느껴진 것이다.
같은 시각, 풍의 선계 허공을 가르던 한제 또한 우뚝 멈춰 왼편으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휙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한 줄기 검은색 선이 다가왔다. 1만 마리가 넘는 흡혈마수들이 길게 늘어선 줄이었다.
선두에는 거대한 몸뚱이의 험상궂은 마수가 있었다. 저 멀리 미소를 짓고 있는 한제를 확인한 녀석은 격앙된 눈으로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캬아아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른 이 흡혈마수의 왕은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거대한 녀석이 빠른 속도로 달려들자 광풍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훅 불어닥쳤다. 마치 그 거대한 몸뚱이로 들이받기라도 하려는 듯 거칠고 빠르게 달려드는 모습은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였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반가움에 격한 포옹을 하려는 것이겠지만 한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지금 한제가 고신의 육신과 분리된 분신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한제는 손을 들어 가볍게 전방을 두드렸다. 그러자 한 줄기 파문이 일며 흡혈마수의 몸을 감싸 속도를 늦췄다.
어느새 다가온 흡혈마수의 왕은 흥분한 듯 쉭쉭거리며 거대한 주둥이를 한제에게 끊임없이 비벼댔다. 마치 재롱을 부리는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녀석에게 한제는 주인이라기보다는 부모에 가까웠다. 한제 역시 녀석을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이 강했다.
쉭쉭거리는 소리는 마치 한제에게 왜 이제야 왔느냐는 응석처럼 들렸다.
“하하하! 녀석, 그래 좀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
한제는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그 등에 올라탄 뒤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녀석을 따르는 1만여 마리의 흡혈마수들이 주위를 감싼 상태였다. 개중에는 한제를 알아보는 녀석도 있었고 무리에 가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의아해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흡혈마수의 왕과 다시 만나자 한제는 기쁨을 금치 못했다. 평생을 외롭게 지내온 그의 곁에서 함께해온 것은 몇 마리의 흉수뿐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온 것이 바로 이 흡혈마수의 왕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은데?”
한제가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자 흡혈마수는 의기양양해진 듯 쉭쉭 소리를 냈다. 지난 1백 년간 자신이 이곳에서 해온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한제로서는 그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풍의 선계 가장 안쪽으로 가자!”
한제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흡혈마수의 왕은 두 눈을 번득이며 앞장섰고 그 뒤로 1만 마리에 달하는 흡혈마수들이 따랐다.
흡혈마수 왕은 이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라진 상태였다. 그 등에 올라탄 한제는 기이한 눈으로 그런 흡혈마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녀석은 당시에도 약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세 번째 단계 수련자의 수준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마치 다섯 번째 천쇠를 겪고 있는 수련자와 같은 수준으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세 번째 단계 수련자에 필적하는 존재로 거듭날 것만 같았다. 이는 한제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놀랍고도 의아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강해진 거지?”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흡혈마수의 왕은 익숙한 듯 수많은 대륙의 조각을 지나쳐 금세 풍의 선계 가장 깊은 곳에 이르렀다.
한제 또한 방문한 적 있었던 그곳은 짙은 안개로 뒤덮인 상태였다. 안개 속에는 어디로 통할지 알 수 없는 거대한 균열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안개 아래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몇 개의 대륙이 있었다.
한데 이전에 중앙 대륙에 세워져 있던 사람 형태의 조각상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곳에는 몸길이가 수만 척에 달하는 흡혈마수의 시체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감지도 못한 두 눈은 흐릿했고 온몸은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광경에 한제의 눈빛이 굳어졌다.
의외의 발견
흡혈마수의 왕은 훌쩍 날아가 안개 속으로 들어서더니 흡혈마수의 시체로 다가가 주둥이를 꽂아 넣더니 쭉 빨아들였다. 순간 녀석의 온몸에서 금빛이 번득였다.
뒤따라온 1만여 마리의 흡혈마수들이 주위를 둘러쌌지만 감히 앞으로 나서서 거대한 흡혈마수의 시체를 탐하는 녀석은 없었다.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흡혈마수의 시체 곁에 내려섰다. 죽은 지 오래된 것이 분명한데도 부패한 흔적은 없었다. 단지 바람 때문인지 바싹 말라 있을 뿐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체내에는 흡혈마수의 정수가 남아 있었고 강력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세 번째 단계 수련자가 풍기는 것과 매우 비슷한 위압감이었다.
흡혈마수의 시체를 한참이나 자세히 살피던 한제는 목 부분에서 아마도 녀석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이 됐을 듯한 치명적인 상처를 발견했다. 손가락 굵기의 구멍 세 개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데 그 상처를 본 순간, 한제는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이내 상처 앞으로 다가간 그는 한참이나 상처를 살피다가 오른손을 들어 세 개의 손가락을 그 구멍 안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마치 맞춘 듯이 구멍에 완전히 들어맞았다.
“대체 어떤 신통술이기에 세 손가락으로 이런 흡혈마수를 죽였단 말인가!”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이 흡혈마수는 당시 균열에서 몸부림을 치듯 튀어나왔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심지어 당시보다 훨씬 커진 상태였다.
“세 손가락⋯⋯ 녀석의 시체에 남은 세 갈래의 기운⋯⋯ 어딘가 익숙한데?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었던 것처럼⋯⋯.”
한제의 곁에 있던 흡혈마수의 왕은 흡혈마수의 시체를 다 빨아먹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휙 소리를 내며 날아올라 주둥이로 안개 안쪽의 거대한 균열을 가리켰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번득이는 눈으로 안개 너머의 균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흡혈마수의 왕이 날개를 퍼덕여 균열로 향했다. 한제 역시 몸을 날려 순식간에 균열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한제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균열을 살폈다. 사실 그가 풍의 선계에 온 것은 이 균열 때문이 아니었으나 저 흡혈마수의 시체에서 세 갈래의 기이하고도 익숙한 기운을 감지한 후로 의혹이 피어올랐다.
‘이 균열은 대체 어디로 통하는 것일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 균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균열을 살피던 한제는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이 균열의 가장자리는 톱니처럼 들쭉날쭉했지만 갈라졌다가 다시 맞붙은 듯한 흔적도 남아 있었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휘둘러 옥패를 소환해 움켜쥐었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 난 옥패의 절단면은 불규칙적이었다.
이번에는 부드러운 빛을 발산해 옥패에 녹여 넣었다. 그러자 옥패는 서로 달라붙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중앙에 미세한 균열 한 줄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어서 다시 두 손에 힘을 주자 옥패는 쩍 하고 갈라졌다. 방금 전 달라붙었던 절단면 그대로 갈린 부분도 있었지만 새로이 갈라진 부분도 있었다.
새로운 절단면을 한참 살피다 거대한 균열로 시선을 돌린 한제의 두 눈이 밝게 번득였다.
“그래, 이 균열은 이전에 한 번 갈라졌다가 후에 맞물렸고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갈라진 거야. 만약 두 번째 균열이 풍의 선계가 붕괴했을 때 나타난 거라면 그리고 그 후 이곳이 흡혈마수들의 세상이 된 거라면⋯⋯ 첫 번째 균열은 언제, 누가 만든 것일까?”
그때 쉭 소리가 들려오며 한제의 생각이 끊겼다. 흡혈마수의 왕은 한제와 균열 근처를 맴돌며 당장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좋아. 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