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80
뒤이어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꿈의 장막으로 이루어진 윤회
한제의 머릿속에 자신을 향해 아첨하듯 웃어 보이던 허이국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이국이라면 그리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터. 만약 살아 있다면 분명 수련자가 되었겠지. 어차피 곧 중주에 가볼 생각이었으니 그때 가서 만날 수 있을지 확인해봐야겠구나. 만약 만나게 된다면… 나를 보면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정말로 궁금하군. 하하하!”
한제는 재미있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고 유금표 또한 실실 웃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환생한 뒤 주인님을 따르게 된 첫 번째 종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이제 동부계에서 허이국에게 당했던 것들을 충분히 갚아줄 수 있을 터였다.
‘그 녀석, 언제나 자신이 주인님의 첫 번째 종이라며 으스댔지!’
유금표는 허이국과의 만남을 기대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이번 삶의 기억들을 돌아보던 중 허이국 외에도 전생에서 알고 지냈던 또 한 사람을 봤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전생에서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왕이 되고 싶다며 찾아왔던 사람, 바로 전생의 사도환이었다.
한제는 유금표와 함께 동림종으로 향했다. 대성주의 가장 큰 종파이자 9종 13문 중 하나인 동림종은 언제나 신비로워 외부인에게 알려진 바는 많지 않았다.
허나 동부계에 있었을 당시 환각 속에서 동림종에 가본 적이 있던 한제는 실제 동림종 근처에 이르자마자 익숙함을 느꼈다.
동림종은 평범한 위치에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와 분지, 그 안의 숲은 동림종의 보호진 역할을 했지만 한제의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동림종에 진입한 한제는 곧장 동림지로 향하는 대신 동부계의 환각 속에서 칠채선존 소도영이 생활했던 곳으로 가보았다.
작은 산 아래에 이르자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맑은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지 않은 물고기가 노닐고 있는 강에서는 한 동자가 물을 긷는 중이었다.
한제는 돌계단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유금표가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몇몇 수련자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누구도 두 사람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마치 그들과 한제는 다른 공간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제가 돌계단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점차 먹구름으로 뒤덮이던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콩알만 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면서 대전 밖 바닥에 깔린 돌판을 두들겼다.
빗방울이 잘게 부서져 부연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이 물안개는 하늘로 떠오르는 듯했지만 흩어져 사라지지는 않았다.
‘당시 환각에서 보았던 광경과 매우 비슷해.’
한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잠겨 있었다. 마치 빗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리는 비 아래에 선 한제는 두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환각을 보았을 당시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정말 드문 경험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제에게는 처음이었다.
주작성에서 몽도를 발휘했을 당시와 비슷했다. 모종의 변화를 겪고 깨달음을 얻고 있는 듯, 한제는 빗속에 선 채 두 눈을 감고 있었지만 온 세상이 마음속에 담겨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수십 년간 방랑하다가 어느 순간 눈에 익은 무언가에 아주 오랜만에 익숙함을 느끼는 나그네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한제는 이 익숙함과 동부계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하나로 엮었다. 그의 몸은 보이지 않는 얇은 선이 되어 동부계와 선강 대륙을 이었다.
“내리는 비… 정말 익숙해. 비가 돌판에 떨어지는 소리도⋯⋯.”
중얼거리던 한제는 한참 뒤에야 두 눈을 떠 작은 산 위의 대전과 광장, 광장 위의 단로를 바라보았다. 이 광경에 어렴풋하게 무언가가 떠올랐다.
“인생은 꿈과 같고 꿈은 인생과 같지. 이는 주작성에서 몽도를 발휘했을 때 얻은 깨달음이야. 그러나 그 깨달음은 분명 끝이 아니다.”
한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한제의 뒤에 선 유금표는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한제의 중얼거림에 유금표 역시 무언가를 깨달은 것이다.
“난 일찍이 왼손을 삶으로 오른손을 죽음으로 삼았지. 또한 손바닥을 원인으로 주먹을 결과로 삼았으며, 뜬 눈을 진실, 감은 눈을 거짓으로 삼았다. 이 세 가지 형태로 나만의 세계를 구축했어.
꿈과 같은 세상을⋯⋯. 그 환각 속, 같은 자리에 서 있던 나는 쏟아지는 비를 보았고 지금 이곳에서도 비를 바라보고 있구나. 세상은 내 눈에 비치고 있고 내가 보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야.”
물안개로 사방은 흐릿해진 상태였다.
동림종의 제자 몇몇이 다급하게 산 아래에서 뛰어 올라와 이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들은 한제와 유금표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난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모두 내 눈에 비쳐 있지. 일찍이 눈을 뜨면 진실, 감으면 거짓이라 했는데 이 진실과 거짓은 그저 내가 인지한 것에 불과해. 허나 과연 눈을 감는다고 나무와 풀이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한제의 독백에 가까운 중얼거림은 계속됐다.
“존재란 무엇이고 비존재란 또 무엇일까. 난 두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세상도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눈을 감았을 때 모든 것이 허무가 되어 버린다면 세상이 눈을 감았을 때는 나도 곧 허무가 되는 것인가?”
한제는 고개를 들어 내리는 비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말씀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번의 환생으로 기만책의 두 번째 단계를 깨달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사실 자신만 그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
도를 증명하여 자신과 함께 이 세상과 윤회, 세월을 비롯한 모든 것이 믿게 해야 하지. 그러니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사실 윤회를 속이는 것과 다르지 않아! 윤회를 속이면 세상도 내 의지를 꺾지 못하고 무엇도 내 생각을 막지 못해.”
유금표 역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가 3천 대도를 정한 거지? 누가 세상 만물 중 그것들만 고른 거지? 기만책은 사람들에게 버려지고 하찮은 취급을 받았어. 그들은 기만책 역시 3천 대도에 반드시 속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거야!”
전생에도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기만책이 3천 대도 중 하나가 되게 하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유금표는 환상한 지금도 그 목표를 잊지 않았다.
“세상에는 본원이 있고 수련자는 그 본원을 수련하지. 주인님께서는 일찍이 본원을 얻으면 세 번째 단계 수련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어! 내가 보기에는 기만책에도 세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남을 속이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남을 속이는 것이야! 여기서 ‘남’이란 실제로는 모든 것을 뜻하지. 하늘과 땅, 세월과 윤회를 그리고 이 세상의 대도를 속이는 거야!”
유금표의 눈빛이 깨달음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 경지에 이르면 선인이 된다! 세상 모든 도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 근본으로 돌아가는 기만책의 세 번째 단계는 일찍이 주인님께서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눈을 감으면 눈앞의 만물은 과연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늘이 눈을 감으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인가?”
중얼거리던 유금표는 점점 혼란에서 벗어나 두 눈을 밝게 빛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한제에게도 어렴풋한 깨달음을 주었다.
그도 유금표도 각자의 도를 개척하고 힘겹게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수련자였다. 외로운 길이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이 함께라면 더 이상 고독함 없이 자신만의 도를 찾는 길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은 나의 표상이야.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세상이 눈을 감아도 난 여전히 존재하지! 만약 나는 눈을 뜨고 있고 세상은 눈을 감은 상태에 이른다면 나는 불후(不朽)하지만 세상은 잠든 상태에 이른다면 선인이 될 수 있을 터!”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두 눈을 번쩍 떴다.
“나는 삶과 죽음을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 속을 걸었으며, 거짓과 진실 속에서 고통의 바다에 빠진 나를 찾았지. 허상의 본원 중 네 번째 본원이 있다면 아마도 윤회일 거야. 허나 내가 일찍이 깨달았던 생사윤회가 아닌 세상의 윤회, 황천에서 특정 영혼을 건져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만물의 윤회를 가리키는 대도겠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이내 빗속에서 걷기 시작했다.
“천도의 수감자는 생을 거듭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벌을 받아야 한다. 깊은 지옥에서 떠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모든 생명은 영원히 나아가며 현생을 풀어야 한다. 하늘의 의지에서 벗어나고 삶의 길을 얻어야 한다. 하늘의 의지를 봉하고 어두운 시기를 새겨라. 모든 생명이 진정한 도를 얻지 못하고 고통의 바다에 침잠되며 진정한 길을 찾지 못한다. 얌전히 수련의 길을 기다려라.”
한제의 귓가와 심신에서는 돌연 동부계에서 들었던 기이한 도경의 구절이 떠올랐다.
그는 깨달았다. 워낙 복잡한 도경이라 당시에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선강 대륙 동림종의 작은 산 위에서 비를 맞고 있는 지금, 그는 그 도경의 함의를 깨우칠 수 있었다.
“내가 깨달은 삶과 죽음은 한 가닥 끈이야. 끈의 양 끝은 각각 삶과 죽음이고 두 끝을 한데 모으면 하나의 원이 된다.”
“내가 깨달은 원인과 결과는 하나의 그물이야. 셀 수 없이 많은 삶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그물. 만물은 그 안에 갇혀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지.”
“내가 깨달은 진실과 거짓은 꿈의 장막이야.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꿈의 장막을 하나씩 가지고 있기에 깨어 있다 생각할 때도 사실은 세상이 한바탕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지.”
“모든 것은 꿈의 일부야. 만물은 깨어날 수 없는 각자의 꿈에 갇혀 있는 셈이지. 마치 몸 주위에 둥근 원을 하나 그려놓은 것처럼. 그 원은 겹겹이 싸여 있기 때문에 하나의 원을 벗어난다고 해서 깨어났다고 할 수는 없지.”
한제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독백을 이어갔다.
“당시 이천매가 했던 세 개의 질문에 이제는 답을 해줄 수 있겠군. 난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연결하여 원인과 결과의 그물을 형성했어. 그리고 진실과 거짓이라는 꿈의 장막 안에 그 그물을 던져 중생들의 꿈의 장막으로 이루어진 윤회 속에서 한 마리 물고기를 낚으려 하고 있지. 그 물고기는 바로 나야!”
한제의 두 눈이 밝게 번득였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유금표와 관련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기만책의 도와 대조해볼 수 없었더라면 한제는 아직까지도 혼란 속에서 자신의 세 가지 허상의 본원을 간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금표는 한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히 짚어내기는 힘들었다. 이전의 한제가 한 층의 안개에 휩싸인 듯 제대로 볼 수 없고 그저 느껴지기만 한 존재였다면 지금은 꿈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동림종은 매우 신비로운 곳이야. 이곳의 제자들은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고 수련에만 몰두하지. 그게 이 종파의 규칙이자 풍습인 줄 알았다. 허나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익숙함을 느낌과 동시에 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어. 이 모든 것은 내 마음 상태와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이 공간과 더 큰 관련이 있을 터!”
작은 산의 광장 위에 선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궁전 꼭대기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동림종의 절반 정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동림종은 매우 넓었다. 한제는 빗속을 오가는 수많은 수련자와 각자의 처소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더 많은 수련자를 보았다. 또한 내리는 빗속으로 아름다운 산과 식물들의 생기도 보았다.
풍광을 살피던 한제의 눈에 어느새 슬픔이 배어 나왔다.
“소도영, 당신이 있었을 때의 동림종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동림종은 죽었습니다. 모든 것은 꿈일 뿐. 동림종이 신비주의를 고수하고 제자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동림종이었다.
죽은 종파
푸른 산은 죽어 버린 민둥산으로 깨끗한 물은 악취가 풍기는 썩은 물로 변했다. 심지어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부패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름다웠던 누각과 대전은 먼지가 뽀얗게 앉아 생기를 잃은 채 쇠락했으며, 작은 산 위의 돌계단도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빗속을 오가던 동림종 제자들은 사실 광장과 대전, 계단 위에 놓인 해골들에 불과했다. 죽은 지 한참은 지난 듯 오롯이 뼈만 남은 상태였다.
각자의 처소에 가부좌를 틀고 좌선을 하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종파는 죽었다.”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죽음의 기운만 짙게 풍겼다.
하지만 동림종을 채운 짙은 죽음의 기운 아래에는 꿈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동림종 제자들의 생전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그 꿈속에서 계속해서 수련을 하고 있던 것이다.
‘허나 이곳의 실체를 파악한 사람은 이전에도 분명 있었을 터.’
한제도 허상의 본원을 깨우치지 못한 상태였다면 실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의 그는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던 한제가 다시 두 눈을 떴다. 동림종을 채웠던 부패와 죽음의 기운은 사라져 없어지고 그 대신 흘러넘치는 듯한 생기와 좌선하고 있는 동림종 제자들이 다시 나타났다.
“가자.”
한제가 성큼 걸어 나가자 이곳의 실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있던 유금표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걸음을 옮기는 한제의 몸에서 파문이 발산됐다.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이 파문은 한제가 이곳에 드리운 꿈의 장막에 녹아들기 위해 스스로 방출한 것이었다.
그와 유금표가 동림종에 내려서자 저 멀리서 두 갈래의 빛이 휙 다가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는 한 쌍의 남녀였다.
무척 준수한 사내는 공손한 태도로 포권을 했고 곁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 역시 포권을 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제와 유금표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선조의 명령에 따라 동림전으로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