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49
현라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제는 자신을 가로막았던 진이 사라진 순간, 송세정을 데리고 곧장 하늘로 솟구쳐 올라 떠나가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그는 돌연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저 아래 도고 일맥 사람 중 한 사내가 감개무량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눈을 맞춘 순간, 한제는 우뚝 멈춰 섰다.
“너는⋯⋯?”
미래의 황존
한제와 눈이 마주친 것은 아주 평범한 사내였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눈에 잘 띄지도 않았고 수준은 아직 신성에도 이르지 못한 8성급 고신 정도에 불과했다. 흔해빠진 사람으로 도고 황궁의 전송진을 통해 도고 일맥 사람들이 몰려든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을 터였다.
허나 지금, 수많은 사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덤덤한 얼굴로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제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눈에는 감개무량한 빛이 어려 있었다.
사내의 체내에는 많지 않은 도고 황족의 혈맥이 한 줄기 담겨 있었다. 엽막으로부터 기인하는 혈맥이었다. 황족인 엽막이 피로 만들어낸 동부계 후손들은 많건 적건 하나같이 그 황족의 피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었다.
“라진⋯⋯.”
한제의 두 눈에서도 감개무량한 빛이 드러났다.
그와 눈을 맞추고 있는 사내는 라진이었다. 망월과 융합한 뒤 한제에게 고신의 별을 주어 그가 성년 고족이 될 수 있도록 해준 사람. 그런 라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한제의 머릿속에서는 동부계에서의 일들이 스쳐갔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송세정을 꼭 끌어안은 채 라진 곁으로 내려왔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재빨리 물러나 주위를 비워주었다.
라진 앞에 선 한제는 그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라진, 선배님을 뵙습니다.”
라진이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너⋯⋯ 언제 망월의 체내에서 분리됐지?”
한제가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현존을 따라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현존께서 저와 망월을 분리시켜 주셨습니다.”
라진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하며 한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당시만 해도 자신보다 훨씬 약했던 상대는 이제 대천존이 되어 도고 황존을 죽이고 도고 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성황조마저 그런 그를 저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째서 나를 찾아오지 않았나?”
한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찍이 한제가 도고 황성에 왔다는 것은 알고는 그를 찾아가볼 생각도 했다. 허나 현라의 유일한 제자이자 장차 도고 일맥의 수호자가 될 한제에 비해 자신은 한없이 평범한 인물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라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한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좀 도와다오.”
이내 그가 조용히 말했다.
“분부하시지요.”
라진은 포권을 하며 결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엽막의 존재를 알고 있겠지?”
한제의 말에 라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고 일맥으로 돌아온 뒤 현라를 통해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자신이 가진 혈맥의 기원을 알게 된 상태였다.
“나 대신 엽막의 후손들을 잘 보살펴라.”
한제는 고개를 들어 도고 황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명 받들겠습니다. 사실 저는 엽막님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라진이 곧장 답했다. 그는 당시 도고전에서 내려온 뒤 혈맥의 감응을 따라 엽막의 후손을 찾은 바 있었다. 황족이지만 몰락한 엽막의 후손에게는 저택만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엽막의 후손은 자신을 찾아온 라진을 받아들였다.
한제는 미소를 지었다. 추억과 따스함이 담긴 미소였다.
그는 은빛이 번득이는 왼손으로 다시 만난 옛 친구의 가슴팍을 눌렀다. 그러자 온몸을 바르르 떨던 라진의 전신에서는 은빛이 격렬하게 번득였다.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이 눈부신 은빛에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혼혈!”
성황조 엽미의 표정이 급변했다.
현라 역시 가늘게 뜬 눈으로 한제와 라진을 바라보다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경련하듯 몸을 떨던 라진은 한제의 손바닥을 통해 자신의 체내로 따뜻한 기운 한 줄기가 주입되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그 기운은 곧장 혈맥과 융합해 그의 혈맥을 순수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원래 그가 가지고 있던 황족의 혈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해져 도고 황존과 같은 혈맥의 위엄을 폭발시켰다.
자신의 혼혈의 힘을 라진에게 조금 넘겨 그의 혈맥이 도고 황존과 같은 자격을 갖도록 만든 한제는 한참 뒤에야 손을 거두었다.
“당시 너는 내게 고신의 반점을 주었고 이에 황족의 혈맥으로 보답했으니, 이제 나를 대신해 엽막의 후손을 보살피길 바란다.”
이내 말을 마친 그는 소매를 휙 휘둘러 송세정과 함께 하늘로 솟구쳐 올라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도고 일맥 사람들은 한제가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현라 또한 한제가 사라진 쪽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깊은 슬픔이 담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더니 입을 다문 그는 라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라진이라고 했나?”
“현존을 뵙습니다.”
라진의 온몸에서 번득이던 은빛은 점차 흩어져 사라지면서 그의 체내에 응집되고 있었다. 이때 현존의 목소리를 들은 라진은 곧장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런 라진을 바라보던 현존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를 선택하지!”
그리고는 라진을 가리키며 성황조 엽미에게 말했다.
엽미는 잠시 망설이며 라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참 후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난 폐관수련을 이어가야 하니 황존의 선택은 현존이 알아서 하게.”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돌아서더니 보라색 빛 속에 떠 있는 관으로 돌아갔다. 보라색 빛이 흩어져 사라지면서 관 또한 다시 땅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도고 황궁에서 있었던 이 모든 일에 고도 대천존은 끝내 관여하지 않았고 마치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처럼 사자도 보내지 않았다.
한제는 이에 대해 의아해하고 있었다. 만약 고도 대천존이 나타난다면 허무에 있는 분신을 소환할 생각까지 해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봐야 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한데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왜일까?’
고조의 손가락에 절반으로 갈라진 황량한 산을 향해 질주하며 한제는 그 의혹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은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봐야 답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고 눈앞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고 일맥의 국사가 과연 누구인가!’
한제는 일단 송세정을 저물공간에 거두었다. 곧 닥쳐올지도 모를 위험에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어서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몸을 날렸고 다음 순간 절반으로 갈라진 황량한 산 근처에 이르렀다.
그는 곧장 아래의 황량한 산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손바닥이 콰쾅 하고 황량한 산을 두들겼다.
땅과 산이 마구 요동치며 무너져 내렸고 절반 이상은 소멸되어 버린 것 같았다. 덕분에 아래쪽에 자리한 거대한 진이 드러났지만 그 진에서 번득이는 열 가지 색채의 빛으로 이루어진 안개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한제가 소환한 손바닥의 힘은 그 안개에 닿자마자 기포로 변해버리며 흩어져 사라졌다.
“왔구나.”
한제가 무너져 내린 산 아래 빈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 불안정하고 거친 목소리가 안개에서 흘러나와 폐허가 된 산 주위로 울려 퍼졌다.
안개 밖에 선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약간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낯선 목소리에 추측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다.
“도고 국사! 네가 이 일의 원흉이다! 모든 것은 분명 이 이한제를 노리고 한 짓일 터! 이제 내가 왔으니 이만 모습을 드러내라! 안개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은 내가 네 정체를 알아볼까 두려워서인가?”
한제의 서늘한 목소리에 안개 속 목소리는 웃기 시작했다. 거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안개가 꿀렁꿀렁 요동쳤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구나.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이모완의 혼을 취했는지, 어떻게 그녀의 혼을 이곳 선강 대륙까지 가져왔는지, 그리고 내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겠지.”
거친 목소리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들어와라. 이 안개를 헤치고 들어와 내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네 의혹을 풀어주마!”
한제는 심신이 진동했으나 여전히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초록색 연기가 흘러나와 손가락을 맴돌았다. 그렇게 형성된 초록색 연기 고리는 곧장 안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금극도 목극도 수극도 토극도 역시 하나하나 발산됐고 여섯 번째 극도인 생사극도도 나타났다.
여섯 개의 극도는 하나로 합쳐져 흑백의 도안을 이루더니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며 열 가지 색채의 빛으로 이루어진 안개를 향해 날아갔다.
쿠르릉!
극도의 도안과 닿는 순간, 안개는 들끓듯 꿀렁거리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는 성난 흉수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 듯한 기세로 확산되는 동안 한제가 쏘아 보낸 도안은 안개에 집어삼켜진 듯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나 한제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만약 안개 속의 저자가 정말로 그가 예측하고 있는 그 사람이라면 이 안개는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닐 터였다. 게다가 그 사람은 워낙 교활해 자신을 쉽게 그 안으로 들여보내 줄 리도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안에 머물면서도 황궁과 연결된 진을 배치했어. 선조의 금제 안에서도 이런 기이한 진을 만들어냈다면 분명 엄청난 음모가 있을 터! 또한 아직도 떠나지 않고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이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는 뜻이야!’
한제는 안개를 응시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돌연 안개 속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치듯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쾅!
급속도로 꿀렁거리던 안개에서는 이내 사자의 몸통에 사람의 머리를 단 흉수가 튀어나왔다. 새카만 몸에서 검은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녀석에게서는 강력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 거대한 흉수에이어 한제가 쏘아 보냈던 여섯 극도의 문양도 튀어나왔다. 문양은 허공에서 회전하면서 거대한 흉수를 짓누르기 시작했고 흉수는 끊임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문양에 충돌했다. 천둥소리는 바로 이 충돌음이었던 것이다.
“역시 만만치 않구나. 허나 진짜 선조의 팔극도라면 모를까, 겨우 여섯 개의 극도만으로는 내가 배치한 무현진(霧玄陣)을 파괴하기는 힘들 게다.”
안개 속에서는 굉음과 함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소리는 작았음에도 우렁찬 굉음을 뚫고 또렷하게 들렸다.
한제는 곧장 소매를 휘둘러 오행진신을 소환했다. 오행으로 융합된, 한제와 똑같은 모습의 진신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두 눈을 서늘하게 번득이더니 안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어서 눈 깜짝할 사이 문양과 충돌하고 있는 거대한 흉수 근처에 이르더니 손바닥을 쭉 뻗었다. 그러자 금속, 나무, 물, 화염, 흙의 다섯 가지 성질을 띤 본원 신통술이 발휘됐다.
순간 허공에서 나타난 수많은 금색 단검들이 한 줄기 검의 폭풍을 형성해 짙은 금속의 본원의 힘을 풍기면서 거대한 흉수를 가격했다. 흉수는 이에 저항하다가 위에서 내리 떨어진 문양에 짓눌리면서 움찔했고 그 틈에 검의 폭풍에 휩쓸리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캬오오!”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온 순간, 열 가지 색의 안개는 다시 격렬하게 꿈틀대더니 거대한 네 마리 흉수를 내보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뱀의 몸통에 사람의 머리가 달린 흉수였다. 이 거대한 흉수는 갓난아이와 같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붉은 기운을 토해내 오행진신을 에워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