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55
한편, 밀실을 휙 둘러본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대량의 금제를 소환했다.
금제들은 주위를 맴돌며 밀실을 완전히 봉쇄했다. 대천존이라도 한제에게 들키지 않고 이 금제를 뚫을 수는 없을 터였다.
뒤이어 바닥에 가부좌를 튼 한제는 두 눈을 번득였다. 그가 이곳 시고 구역에 와 계도 황자를 돕기로 선택한 것은 송세정을 고향에 데려다 주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한 방울의 혼혈로는 모완의 육체를 태고 신경에 데려갈 수 없다.”
그는 자양종에서 지내는 몇 년 동안 쌍자 대천존이 모은 수많은 책을 통해 태고 신경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언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태고 신경에는 한 줄기 막대한 압력이 있다. 세상의 운행을 가릴 만큼 어마어마한 그 압력 때문에 그 안에서 죽은 사람의 혼은 윤회의 굴레로 들어가지 않는다. 즉, 그곳은 윤회도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고 국사의 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진을 가동해 태고 신경을 여는데도 한제가 내버려둔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모완의 육신은 태고 신경의 압력을 감당할 수 없을 거야. 혼혈로 보강할 수는 있겠지만 한 방울로는 부족해. 어쨌든 도고 국사가 모완을 미끼로 삼아 나를 태고 신경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적어도 모완에 관한 이야기에는 거짓이 없을 것이다.”
한제가 중얼거렸다. 이는 그가 계도를 돕기로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고족의 조묘(祖廟)에 들어가 고족으로서의 세 번째 손겁을 통과하면 고조로부터 한 번 더 인정받고 두 번째 손겁에서 그랬던 것처럼 혼혈을 얻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미 도고 구역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됐고 대천존에게는 조묘를 열 권리도 없지. 그 권리를 가진 것은 황존뿐. 허나 라진이 도고 황존이 되더라도 도고 구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도고 일맥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현라에게까지 생각이 미친 한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극고 일맥과는 접점이 거의 없지. 그러니 내가 택할 수 있는 건 시고 일맥뿐. 계도는 야심이 있으나 감히 내게 역심을 품거나 배반할 녀석은 아니니까. 5백 년⋯⋯ 마지막 5백 년!”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부드러운 빛과 함께 반짝이는 관이 하나 나타났다.
그 안에는 모완이 잠든 듯 누워 있었다. 한제는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왼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그러자 미간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에는 흐릿한 허상이 담겨 있었다. 바로 이모완의 잔혼이었다.
“모완아, 이제부터 네 혼은 완전해질 거다. 난 반드시 너를 깨울 거야. 완전하게…”
이내 한제는 왼손을 뻗어 이모완의 미간으로 빛을 쏘아 보냈다.
잔혼과 융합된 모완은 금방 깨어날 것처럼 돌연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그저 그 눈가에서만 반짝이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뿐이었다.
한제는 모완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훔쳐냈다. 수정 같은 눈물이 그의 손가락에 맺혔다.
한제는 모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고 시간이 흐르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마음이 차차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뒤이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눈빛은 단호하게 번득였다.
그는 몸을 살짝 기울여 모완의 창백한 입술을 매만지다가 그녀의 귓가에 오직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였다.
잠시 후, 그는 손을 휘둘렀고 관 안의 모완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사라졌다. 밀실에 남은 것은 한제뿐이었다.
벽에 걸린 채 스스로 수천 년을 타고 있는 기묘한 등불이 일렁이면서 한제의 긴 그림자도 일렁였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제는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한 줄기 금빛을 소환했다. 두 눈을 감고 있는 선황의 혼은 온몸이 금빛으로 휩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스름한 회색 기운이 느껴졌다.
이 혼을 바라보던 한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벌려 한 줄기의 초록색 화염을 토해냈다. 그의 영혼의 화염은 곧장 선황의 혼을 뒤덮고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혼에 드리운 저술의 위력을 제거할 수 있다면 꽤나 쓸모가 있을 터. 어쨌든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영혼의 화염에 휩싸인 선황의 혼을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둔 한제는 가만히 앉아 두 눈을 감았다.
★ ★ ★
눈 깜짝할 사이 3년이 흘렀다. 그동안 한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밀실에서 호흡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체내에서는 고족의 힘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지만 고도산에서 융합되어 형성된 한 줄기 선고력은 아직도 한 바퀴를 채 순환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제의 영혼의 화염으로 불살라지고 있는 선황의 혼에도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였다. 다만 혼 안의 어스름한 회색 기운은 전보다 느릿해진 상태였다.
한제는 밀실 밖의 그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밀실은 여러 명의 경비병이 경계를 서며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계도 황자 역시 지난 3년간 행궁에 남아 있었다. 이따금 몇몇 사람이 그를 찾아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눈 뒤 잔뜩 흥분한 채 떠나갔다.
또한 계도 황자는 지난 3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이른 아침마다 밀실을 찾아와 반 시진을 공손히 서 있다가 물러났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두 줄기 번득이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그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오행 진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제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었다.
오행 진신은 완전한 오행 본원이 융합되어 이루어진 존재로 한제가 가진 본원의 가장 강화된 상태, 말하자면 거의 한계치에 이른 상태였다. 여기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완전한 진신(眞神)이 될 터였다.
가부좌를 튼 오행 진신은 두 눈을 감은 채 한제의 본체와 함께 호흡에 집중했다.
또다시 3년이 흘러 한제가 이 밀실에서 폐관수련을 한 지도 6년이 됐다. 이 무렵, 그의 몸에서 살육의 기운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이 분리되어 나왔다.
이 천둥번개의 진신은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냉랭한 얼굴로 한쪽에 가부좌를 틀었다. 이제 밀실 안에서는 똑같이 생긴 세 명의 한제가 삼각형을 이루고 앉아 눈을 감고 호흡을 하고 있었다.
한편, 6년간 불살라진 선황의 혼에 깃든 회색 기운은 전보다 더 느릿해진 상태였다. 언젠가 정말로 그 기운이 완전히 멈추고 흩어져 사라질 때가 온다면 한제는 비로소 선황의 혼을 천천히 제련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또다시 3년이 흘렀다. 한제가 폐관수련을 시작한 지 9년째 되는 해였다.
어느 날, 한제의 본체에서는 또 다른 허상이 분리되었다. 아직 진신으로 완벽하게 응집되지는 않아 흐릿한 빛 형태인 이 허상은 한제의 뒤로 10척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떠 주위의 세 본원 진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9년 동안 자신의 수준과 고족의 힘을 최고 수준으로 높이고 동시에 이 세 본원 진신 역시 균등하게 최고 수준으로 높여놓는 데 주력했다.
지금 그는 완벽한 상태의 도일 대천존과 싸우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상대를 압도할 수 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라면 대천존 중 가장 약한 도일보다는 확실히 강할 것이다. 구제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무봉과는 비슷할 터. 스승님, 그리고 그분과 비슷한 시고 일맥 송천 대천존과는 큰 차이가 아닐 거야. 여기에 분신까지 사용한다면…?”
한제는 영혼의 화염에 불살라지고 있는 선황의 혼을 힐끗 바라보았다.
“역시나 효과가 있긴 하지만 너무 느려.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
선황의 혼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오행 진신에 대해서는 당분간은 걱정할 것이 없다. 도고 황성에서 완성되면서 내 수준을 공겁기 절정까지 올려놓은 것을 보면 내 추측이 맞았다는 뜻이니까. 수준을 더 높이려면 이번에는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을 완성해야 해.”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을 바라보던 한제의 눈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스승님께서는 당시 나를 데리고 고족 구역 곳곳을 돌아다니시면서 원하는 것들을 충분히 얻을 수 있게 해주셨지.”
또다시 현라를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해진 한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도고 구역 쪽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밀실의 벽을 뚫고 도고 황성, 도고전 뒷산에 자리한 노인에 닿아 있는 듯했다.
한제는 한참 후에야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수준이 높아지기 전까지는 이곳을 나가지 않을 작정으로 시작한 폐관수련이었다. 수준을 높여야만 송천 대천존을 이길 힘을 갖게 되고 고도 대천존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송천 대천존이 계도 황자를 차기 시고 황존으로 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황존이 된 계도 황자를 통해 조묘에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태고 신경에서 도고 국사의 목적을 간파해낼 힘이 필요했다.
“고도 대천존의 태도는 분명 이상하다. 도고 황궁에서의 일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어. 어쨌든 힘을 키워야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터. 절대로 다른 사람의 의지에 따라 내 생사와 의지가 좌우되게 하지 않겠다.”
한제는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을 바라보며 눈을 형형하게 번득였다.
수련자로서 그의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는 완전히 달랐다. 스스로 모색하고 직접 걸어 나가는 길로 오직 그 자신만이 스스로를 지도할 수 있고 그 자신만이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 정할 수 있었다.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은 특수 본원으로 응집해낸 진신이다. 그중 천둥번개의 본원은 이미 진신이 되어 있지만 나머지 넷은 그저 본원으로만 완성되었을 뿐. 살육, 묵멸, 태초, 금제⋯⋯.”
중얼거리던 한제는 오른손으로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은 돌연 바르르 경련하더니 천천히 분열되기 시작했다.
순간 진신을 뒤덮은 전광이 호 형태로 흐르면서 진신으로부터 네 덩어리의 안개를 분리해냈다. 그중 한 덩어리의 안개는 나타나자마자 밀실 안을 서늘하게 만들면서 한 줄기 광기 어린 살육의 기운을 퍼뜨렸다.
‘살육의 본원…’
또 다른 안개 덩어리에서는 수많은 기이한 문양이 번득였다. 안개가 꿈틀거리면서 더 많은 문양이 드러나고 있는 이것은 금제의 본원이었다.
나머지 두 덩어리의 안개 중 하나는 빛을 뿜어냈고 다른 한 덩어리는 어두웠다. 각각 태초와 묵멸이었다.
“이 네 개의 본원을 진신으로 완전히 응집해내 융합하면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이 완성되면서 내 수준을 한층 높여줄 거야. 어쩌면… 단번에 대천존이 될 수 있을지도…”
한제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천존과 약천존의 구분은 그저 공겁기 절정에 이른 후 대천존에 등극하기까지의 구간을 나눠놓은 것에 불과했다. 천존도 약천존도 엄밀히 따지자면 공겁기 절정의 수련자인 것이다.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밀실의 천장 쪽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밀실 천장이 순간 하늘처럼 변했다.
하얀 구름이 펼쳐진 푸른 상공에는 태양이 없었다.
한제는 태초의 본원을 움켜쥐어 휙 던졌다. 그러자 이 안개 덩어리는 곧장 천장으로 날아가 허상의 하늘에 녹아들어 마치 태양처럼 빛을 내뿜었다.
고개를 든 한제는 하늘이 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아래, 하늘은 마치 세상의 규칙에 따르듯 변화를 보였다. 그렇게 하루가 끝에 이르렀을 무렵, 태양이 된 태초의 본원은 석양이 되어 지기 시작했다.
하늘신호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진 순간, 한제는 묵멸의 본원을 집어 들더니 내던졌고 하늘에 녹아든 안개 덩어리는 스르륵 흩어져 사라졌다.
천장에 허상으로 나타난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번득인 한제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유월⋯⋯.”
그가 직접 창조한 신통술인 유월이 순간 1천 년의 세월을 되돌렸다.
수련자로서 세상의 운행을 통제하기란 힘들었다. 한제처럼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하늘과 땅을 만들어내고 밤과 낮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충격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도망족은 동부계를 열 수 있고 대천존은 허공에 자신에 속한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지. 여기에 내 유월을 더하면 그 세상을 운행시킬 수도 있어. 게다가 난 밀실의 천장에만 세상을 만들어냈으니 통제하기에 더욱 수월하지.”
한제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짧은 순간 낮과 밤이 수십 차례 뒤바뀌었다.
“이 방법으로 태초와 묵멸의 본원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제가 중얼거리며 이마를 두드리자 그의 원신 한 줄기가 솟구쳐 하늘에 녹아들어 교차되고 있는 낮과 밤의 변화를 느꼈다.
한제는 더는 깨달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사실 깨달음이란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년 후, 천장으로 쏘아 보냈던 원신을 다시 거두어야만 세월 안에서 무르익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금제의 본원⋯⋯.”
한제는 계속해서 기이한 문양을 번득이는 안개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고신의 땅에서부터 줄곧 그와 함께해온 금제의 본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현라가 자신을 데리고 방문했던 장소들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얻은 대량의 금제는 본원을 성장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이어서 한제는 오행 진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두 눈을 번쩍 뜬 오행 진신은 한제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다섯 갈래의 반짝이는 빛으로 금제의 본원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한제를 대신해 금제의 본원을 강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제의 시선이 닿은 것은 살육 천둥번개의 진신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예측할 수 없는 살육의 본원이었다.
“육묵⋯⋯ 녀석은 스스로를 육묵이라 칭했지. 그리고 도고 국사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