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54
“우리는 어디로 가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으로…”
한제는 한 팔로 송세정을 안아 들더니 몸을 훌쩍 날렸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라면 흑석성 말인가요?”
송세정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몇 가닥이 한제의 뺨에 닿았다.
한제는 말없이 이 여인을 데리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 ★ ★
몇 달 뒤, 한제와 송세정은 도고 구역을 벗어나 시고 구역에 이르렀다.
고향에 돌아온 송세정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하지만 말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한제를 마주할 때는 침묵이 더 길어졌고 마음은 복잡해졌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상대는 수시로 줄기줄기 따뜻한 기운을 그녀의 체내로 주입해주었다.
처음에 송세정은 그 기운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체내에 융합한 한 가닥의 혼이 천천히 분리될 조짐을 보이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내 체내에서 이모완이라는 여인의 혼을 분리해내려는 거야. 그 혼이 완전히 분리되면 난 죽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죽기 전 고향을 볼 수 있다면 이모와 동매를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해.’
송세정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숨겼다. 마주하게 될 미래가 두려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또 몇 개월이 지났다.
“내일이면 흑석성에 도착하는 건가요?”
석양도 다 져버린 어두운 하늘 아래, 어느 황량한 산 위에서 송세정이 먼 곳을 내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세정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한제를 향해 돌아섰다.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해오면서 그녀는 청년과 같은 한제에게서 아주 오랜 세월이 느껴졌다.
“모완은 참 운이 좋네요. 당신과 그녀가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다음 날 오후, 저 멀리 흑석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은색 돌로 이루어진 도시를 보며 송세정은 고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을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한제가 도시로부터 1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착지하자 송세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제는 한동안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송세정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작은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 이내 두 손을 들어 한제의 얼굴을 쓰다듬던 그녀는 상대의 품에 자신의 고개를 묻었다. 한제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쿵쾅! 쿵쾅!
한제는 고개를 숙이고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체향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었을 무렵에야 고개를 든 송세정은 한제의 품에서 떨어졌다.
“제가 죽으면 부디⋯⋯.”
“넌 죽지 않는다.”
한제는 따뜻한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그녀의 미간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송세정은 이내 시야가 흐릿해졌고 곧장 잠든 듯 풀썩 쓰러졌다.
반 시진이 지나 다시 깨어났을 때, 송세정은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노을도 거의 다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뭔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송세정은 자신의 목에 따뜻한 기운이 담긴 옥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체내에서 모완의 잔혼이 이미 사라진 것을 느꼈다. 온전한 송세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어째서인지 슬펐다.
복잡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한참 뒤에야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흑석성, 자신의 고향을 향해…
흑석성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떠났을 당시와 똑같았다. 허나 성으로 들어가는 동안 경비병은 그녀를 막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송세정은 두 사람을 보게 됐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과 어린 소녀…
“이모, 동매야⋯⋯. 나 왔어.”
송세정은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미소를 지었다.
★ ★ ★
저 먼 곳에서 흑석성을 바라보던 한제는 곧 신식을 거두었다. 송세정은 모완의 잔혼과 융합되는 바람에 큰 손상을 입어 기억에 착란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자신이 누군지도 분간하지 못하게 됐던 불쌍한 여인이었다.
사실 한제는 그녀에게서 곧장 모완의 잔혼을 뽑아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송세정은 그대로 소멸했을 것이다.
수천 년간 수련을 해오면서 매섭고 냉혹한 성격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송세정에게 그런 짓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오는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송세정의 생기와 혼에 해가 가지 않게끔 자신의 힘을 주입해 모완의 혼을 분리해낸 것이다.
“그녀는 무고한 사람이야. 더욱이 그녀 덕분에 모완의 잔혼을 찾을 수 있었으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 목걸이에 담긴 내 신념이 그녀를 평생 보호해줄 거야. 계도 저 여인을 잘 보살피도록.”
한제가 말했다.
“양아버지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제의 뒤편 허공에서 돌연 파문이 일더니 나타난 계도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이미 흑석성주에게 그녀를 잘 수호하라 일러뒀습니다. 또한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제 사병도 몇 명 주둔시켜 놓았으니 마음 놓으시지요.”
계도 황자는 송세정이 한제에게 얼마나 중요한 여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시고 구역에 돌아온 이후 내내 이곳 흑석성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제가 이곳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2년여의 기다림 끝에 예상대로 이곳에서 한제를 만나게 됐다.
한제는 계도 황자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이라는 예측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쓸모가 없을 터. 그렇다면 그런 자가 시고 황존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움을 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가자.”
마지막으로 흑석성을 한 번 더 살핀 한제는 이내 먼 곳으로 나아갔다.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계도 황자가 뒤따랐다.
“폐관수련을 해야겠으니 적당한 장소를 마련해다오.”
한제는 앞으로 나아가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제 행궁 내에 밀실이 있습니다.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사람을 시켜 새로운 방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계도 황자가 얼른 답했다.
한제는 소매를 휙 휘둘러 계도 황자를 데리고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은 이미 계도 황자의 행궁에 이르러 있었다.
“이 밀실이면 됐다. 내 분부 없이는 누구도 들이지 말도록.”
행궁을 슥 둘러본 한제는 그중 한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밀실로 향하는 한제를 바라보던 계도 황자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듯했다.
“시고 황존이 되고 싶다면 시고 일맥 대천존인 송천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순조로워질 터.”
밀실에 들어가기 전 걸음을 우뚝 멈춘 한제는 계도 황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계도 황자는 쓰게 웃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하기라도 한 건지, 평소 송천 대천존은 저를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황궁에서 마주쳐도 쌀쌀맞게 대하시지요. 송존이 아끼시는 것은 제 동생 치만입니다. 녀석은 지금 원시산(原始山)에 머물고 있지요. 듣기로는 송존의 제자가 되었다더군요. 게다가 아바마마께서도 치만을 매우 아끼십니다. 이미 시고 일맥 모두가 그를 차기 황존으로 여기고 있는 셈이지요.”
계도 황자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계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제는 잠시 고민했다.
“각 부족의 대천존은 차기 황제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러한 규정에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 네게도 준비가 필요할 것 같구나.”
한제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번득인 순간, 계도 황자는 상대에게 모든 것이 꿰뚫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낱낱이 파악당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황제가 되는 데 실패하면 왕에 봉해진 후 밖으로 내쳐지겠지요.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기에 언제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황존에 오를 기회를 잃는다면 제게 두 번째 기회는 오지 않을 터. 게다가 재능으로도 봐도 심성으로 봐도 제가 치만보다 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녀석에게 복종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서 계도 황자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니 양아버지, 부디 도와주십시오. 제가 황존이 되면 이전에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겁니다!”
“동생 말고도 또 다른 적이 있겠지?”
한제는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도 있습니다. 형님이 태어났을 때 세상에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더군요. 이에 고도 대천존 역시 관심을 가지고 선물까지 내려주셨다고 하고요. 그가 황존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계도가 쓰게 웃었다.
“음, 네가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송천은 한번 만나볼 수 있다. 그에게 가서 너를 차기 황존으로 선택할 마음이 있는지 알아봐주마.”
그 말에 계도 황자는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런 모습에서 한제는 상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감정을 통제하는 데 능할 뿐만 아니라 분수와 처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강하고도 야심찬 인물이었다.
“폐관수련을 마친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별다른 일이 없다면 더는 나를 방해하지 말거라.”
말을 마친 한제는 시선을 거두고 밀실로 향했다. 문이 닫힌 밀실은 적막에 잠겼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계도 황자는 잠시 후에야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에서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양아버지의 수준이라면 송존의 생각도 바뀔지 모른다. 허나 내 나름의 준비도 멈춰서는 안 돼. 이번에는 반드시 맞서 싸워야만 한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2백 년 후에 이 계도는 시고 황존이 된다!’
숨을 몇 번 크게 들이마셔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그는 밖으로 나갔고 한제가 있는 밀실을 금지(禁地)로 선포했다. 심지어 적지 않은 경비병을 배치해 밤낮으로 지키게 했다.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