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67
그리고 그 산 위로 흐릿한 인영이 하나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그 인영의 주인이 사내라는 것뿐이었다. 그가 두 손으로 안고 있는 시체 한 구와 그 시체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어째서인지 황량하고 슬퍼 보였다.
인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제는 그 익숙함에 몸을 떨었다.
그때,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 위에서 인영이 슬픔에 가득 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는 강력한 힘을 품은 채 사방으로 울려 퍼지다가 한제의 마음속에 파고들었고 이에 한제의 떨림은 더욱 격해졌다.
사내의 절규에 진동하던 어둑한 하늘에서는 수없이 많은 파문이 일어났다. 그 하늘도 사내의 절규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려 하는 것 같았다.
“세상⋯⋯.”
절규하던 인영이 그 한 마디를 외친 찰나, 한제의 귓가로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한제야, 일어나라!”
그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짐과 동시에 한제의 시야에 차 있던 산도 그 위에서 시체를 끌어안은 채 하늘을 향해 절규하던 인영도 사라졌다.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쾅 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내 이름은 이한제… 나는… 시고 조묘에서 두 번째 분신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 ★ ★
조묘 깊은 곳.
가부좌를 튼 한제의 전방으로 1백 척 떨어진 곳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온몸을 바르르 떨며 한 걸음씩 힘겹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의 옷차림은 현라와 똑같았으나, 매우 노쇠해 보였다.
“한제야, 일어나라!”
노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한제가 눈을 뜬 순간, 노인은 기쁜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쾅 하고 조묘 밖으로 튕겨나갔다.
“스승님⋯⋯.”
한제는 중얼거리며 현라가 있던 곳을 백발이 성성해진 스승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다한다 해도 현라의 은혜를 잊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뒤이어 고개를 번쩍 쳐든 한제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서는 다시금 대량의 빛들이 나타나 정수리 위에 응집되더니 빠른 속도로 인영의 윤곽을 형성했다.
한편, 조묘 밖으로 튕겨나간 현라는 고조 조각상 근처에 남아 있던 마지막 빛 고리가 점점 흩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지려던 순간 돌연 다시 응집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 빛 고리가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사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순식간에 열여덟 번째 빛 고리까지 전부 다시 나타났다.
시고 황성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허나 침묵은 짧았고 이어서 하늘마저 무너뜨릴 듯 격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응집에 성공했다!”
“열 번째 대천존은 살아 있어!”
그 환호성에 부응하듯 고조 조각상 근처로 열아홉 번째 빛 고리가 나타났다. 이어서 순식간에 스물일곱 번째 빛 고리까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빛 고리들은 파문을 사방으로 확산시켰다.
덕분에 이제는 시고 황성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원시산 역시 그 빛과 파문에 뒤덮였다.
현라는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하늘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를 위해 아직 더 할 일이 남아 있음을 세 번째 분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곳을 지켜야 함을 알고 있었다.
★ ★ ★
조묘 안. 한제의 정수리 위에는 빛의 인영이 떠올라 있었다. 그 크기는 첫 번째 분신을 마쳤을 때보다 수십 배는 커진 상태였다.
한제가 고개를 들자 인영 역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조묘를 지나 저 멀리 하늘 위에서 미소 짓고 있는 현라에게 닿은 듯했다.
“스승님⋯⋯.”
그렇게 한참이나 고개를 들고 있던 한제는 이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는 지금 자신이 이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보았던, 시체를 끌어안은 채 하늘을 향해 목이 터져라 울부짖던 인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인영이 누구인지, 그가 안고 있던 시체는 누구의 것인지, 한제는 알지 못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그는 자신이 조묘에 들어온 기간을 조용히 헤아려보았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68년이 지났군. 시간이 많지 않아.”
한제가 중얼거렸다.
한제는 깊은 숨을 내쉬면서 머릿속에 떠올랐던 인영과 관련한 생각들을 애써 몰아낸 후 세 번째 분신에 몰입했다.
두 번째 분신의 성공으로 인해 원신은 전보다 훨씬 더 커졌고 수준 역시 전보다 높아진 상태였다. 세 번째 분신에도 성공하고 그 원신을 육신과 융합시킨다면 전에 없던 수준에 이르게 될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고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굳건한 눈빛을 번득이던 한제는 이내 두 눈을 감았고 조묘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해진 원신은 세 번째 분열을 시작했다. 마지막 분열이기도 했다.
“첫 번째는 3년, 다음은 15년⋯⋯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한제가 세 번째 분신을 시작한 지 어느새 7년이 지났다. 계도의 황존 즉위까지 25년 남은 시점이었다. 이에 따라 시고 일맥 사람들의 관심은 고조 조각상으로부터 계도의 즉위로 옮겨졌고 이제 현 황존보다 계도가 더 많은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수백 년 후에 발발할지도 모를 전쟁에 앞서 계도가 조금이라도 황존이라는 신분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한제가 세 번째 분신에 돌입한 지 22년, 조묘에 들어선 지 90년이 지났다.
이 무렵, 시고 황존은 이미 막후로 물러나 있었다. 아직 즉위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시고 일맥의 모든 중요한 일은 계도가 맡아 진행하고 있었고 비록 관을 쓰지는 않았지만 어느덧 황포를 입은 상태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도는 매일 아침 조묘를 바라보는 습관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양아버지가 분신에 성공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 ★ ★
조묘 안. 한제의 주위로는 거대한 원신을 이루고 있던 빛이 산산조각 나 바스라지고 있었다.
두 번째 분신에서 교훈을 얻은 한제는 이번에는 육신에 한 줄기 신식을 남겨 놓았다. 중요한 순간에 그를 깨워줄 신식이었다.
수십 년간 분열된 원신으로부터 기인한 통증을 견뎌내며 한제는 심지어 이제 그 통증에 무뎌지고 있었다.
또다시 5년이 지났다. 한제가 조묘에 진입한 지 95년에 접어든 해였다.
시고 일맥 사람들이 5년 후에 있을 새로운 황존의 즉위식을 준비하기 시작한 이때, 한제의 원신은 마침내 완전히 분열됐다. 이제 마지막 융합을 시작할 때였다.
두 번째 분신에서의 경험 때문에 한제는 융합에 매우 신중했다. 원신을 한 번에 융합하려 하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 융합하고 응집할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또 하나의 계획이 있었다. 반드시 원신을 융합하는 와중에 진행해야만 하는 계획이었다.
또다시 1년이 자났을 때, 한제는 원신을 3할 정도 응집한 상태였다. 응집된 원신의 크기는 고작 손바닥만 했으나, 그 위력은 두 번째 분신을 마쳤을 때보다도 훨씬 강했다. 만약 이 원신을 완전히 융합한다면 한제는 정말로 전에 없던 수준에 이르게 될지도 몰랐다.
다음 해, 5할 정도 응집된 한제의 원신은 전보다 적잖이 강력해져 있었다. 이제 조묘에 들어온 지 100년이 되는 날까지 1천여 일 남은 시점이었다.
성대한 의식을 앞둔 시고 일맥의 강자들이 황성으로 몰려들면서 황성은 열띤 분위기였다.
허나 정작 이 중대한 행사의 주인공인 계도는 조묘 근처 앞에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좌선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남은 3년 동안 해야 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양아버지의 곁에 머무르기를 택한 것이다.
머지않아 극고 일맥과 도고 일맥의 사절단까지 몰려들었지만 오래전부터 금지로 설정돼 수많은 황궁 경비병들로 둘러싸인 조묘 주위는 적막했다.
계도는 시끌벅적한 바깥 분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묵묵히 좌선에만 집중했다.
“양아버지, 앞으로 3년만 더 있으면 저는 시고 황존이 됩니다.”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꾸준히 흘렀다. 어느덧 한제가 조묘에 진입한 지 꼬박 1백 년이 지났다.
시고 황성 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고조 조각상 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조각상 주위의 빛 고리가 아니라 그곳에 있는 그들의 새로운 황존이었다.
새로운 황존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찾아온 수많은 이들이 광장을 빽빽하게 채웠으나 황성 전역은 고요했다. 극고 일맥과 도고 일맥의 사절단을 이끄는 것은 황족이나 그에 준하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나, 이들조차 공손한 태도로 새로운 시고 황존을 기다렸다.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솥이 있었다. 솥은 부드러운 흙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위로 거대한 향이 하나 꽂혀 있었다. 그 향에 불을 붙일 자격을 가진 사람은 계도뿐이었다.
이 향은 황권향(皇權香)으로 불이 붙었을 때 피어오른 연기는 응집되어 하늘을 진동시킬 북이 된다. 이 북을 두드릴 자격 또한 계도에게 있는데 그는 이 북을 아홉 번 울려 모든 시고 일맥 사람의 절을 받아야 한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폐하, 이⋯⋯.”
시고 황존 곁에 서 있던 몇 사람 중 한 노인이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다려라! 우리 시고 일맥의 황존 즉위식에 정해진 시간은 없다! 계도가 오는 때가 바로 즉위식의 시작이다!”
퇴위를 앞둔 시고 황존은 거친 목소리로 노인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노인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조묘 앞. 계도는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오늘 자신의 즉위식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의 뒤로 검은 갑옷을 입은 경비병 한 부대가 다가왔다.
“폐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경비병들이 한쪽 무릎을 꿇었고 선두의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허나 계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경비병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각이 지났을 때, 계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눈을 떠 조묘를 바라보던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조묘를 향해 바닥에 머리를 세 번 찧었다.
“양아버지⋯⋯ 저는 갑니다.”
다시 일어서서 조묘를 바라본 계도가 돌아서자 경비병들도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그 무렵, 조묘 안의 한제 위로는 크지 않은 빛의 인영이 번득이고 있었다. 이 허상은 이전까지만 해도 손바닥만 했으나 지금은 마치 분신처럼 한제와 똑같은 크기로 불어난 상태였다.
그 인영은 이미 융합을 완전히 마친 듯 밝은 빛을 발산했다. 하지만 원신의 두 눈은 꼭 감겨 있었다.
한제는 1년 전 이미 융합을 마칠 수 있었다.
이번 융합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한제는 곧장 융합을 마무리하지 않고 그 상태로 잠든 듯 1년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두 번째 분신을 진행했을 때 보았던 흐릿한 세상을 일곱 가지 색채의 눈이 내리던 산과 그곳에서 본 인영을 다시 보고 그 인영이 내지르던 말을 제대로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어떻게 그 세상에 들어가게 됐는지, 심지어 그곳에 대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기에 그저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그 흐릿한 세상을 다시 보게 됐을 때는 계도가 막 경비병들을 이끌고 떠나갔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