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95
“아이가 아직 뭘 잘 몰라 그러는 거니 개의치 말아요. 아이 아버지는 약초를 캐러 갔어요. 그쪽 몸이 너무 약해서 보양을 시켜줘야 한대요. 그러니 안심하고 여기 머물러요. 몸이 충분히 회복된 후에 떠나도 늦지 않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보름이 지나갔다. 보름 동안 중년 남자가 치료하고 살펴준 덕분에 한제의 몸에는 천천히 힘이 붙어갔다.
어느 날 깊은 밤, 한제는 나뭇간에서 나가 중년 남자의 처소를 한 번 살펴보며 마음에 새기더니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갔다.
★ ★ ★
보름 동안 모아놓은 마른 식량을 등에 맨 한제는 달빛을 벗 삼아 마을을 빠져나갔다.
문득 5백 년 전의 어느 날 밤이 떠올랐다. 대산파에 선발되지 못했던 그 때도 지금처럼 깊은 밤에 몰래 집을 떠났고 그 길은 5백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었다.
또다시 한숨을 내쉰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당초 전송진으로 이송된 터라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영맥이었다. 영기를 통해 체내의 영력을 보충시키면 봉인과 경지를 풀어낼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깊은 밤, 찬바람이 몰아쳐 한제는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일반인이나 느낄 이런 감각을 느껴본 것이 얼마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화범(化凡)하여 일반인으로 살았을 때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았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이 차서 중간에 몇 차례나 휴식을 취하다보니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 뒤에도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있었다.
체내에 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감각은 있어서 이동하는 동안 영력이 있는 곳을 몇 군데 찾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서는 아무리 호흡을 해보아도 체내에 조금의 영력도 생성되지 않았다.
‘어쩌면 수련자 문파에 가야 짙은 영력이 자리한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한제가 씁쓸함을 삼키며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몸으로 문파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피어오르는 절망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곧 그 절망감을 억지로 억누른 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역국, 거마족…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이 빚은 열 배로 되갚아주겠다.”
그는 굳건한 눈빛을 번득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계속해서 걸었다.
한데 그때, 갑자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밤중이라 그런지 그 소리는 너무도 크고 명확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검은 말들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말 위에 앉은 건장한 사내들은 관자놀이가 높이 솟았고 흉악한 눈빛을 번득였다. 한제의 곁을 스쳐가던 그들 중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 한 명이 갑자기 말고삐를 잡아당기더니 한제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 흉측하게 생긴 녀석이군. 돈이 되겠어!”
말을 마친 그는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어 한제의 옷깃을 잡아채었다.
“뭐하는 거야!”
전방에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제가 돈이 될 만한 것을 잡았습니다. 흉측하게 생긴 녀석이니 다리를 잘라 천위 표국의 길을 막게 하면 우리 애들을 쓰는 것보다 좋을 것 같은데요.”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가 히히 웃으며 발로 말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말은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형님, 보십시오!”
앞쪽으로 다가간 칼자국 사내는 손에 쥔 한제를 내보이며 웃었다.
한제는 두 눈을 감고 속으로 분을 삭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 고수들 몇몇이 그에게 욕을 내뱉으며 희롱했다.
선두의 말 위에는 체격이 건장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는 한제를 힐긋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데려간다.”
18명의 사내가 말을 탄 채 소리를 지르며 달렸다.
3리 정도 이동한 그들은 갈림길에 이르자 말고삐를 당겨 멈추더니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말의 입에 재갈까지 물린 채 사방으로 퍼져나가서는 이내 은밀히 숨어들었다. 익숙하고 숙련된 움직임이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한제를 쥔 칼자국 사내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게 됐다.
“여섯째야, 이 형님의 말을 끌고 가라!”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가 말을 마치자 비쩍 마른 사람 하나가 옆에서 튀어나와 말을 끌고 빽빽한 숲속으로 사라졌다.
“운이 나빴구나!”
칼자국이 난 사내는 한제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한제의 턱을 치더니 두 손으로 한제의 두 다리와 어깨를 연이어 두들겼다.
쩌적 소리와 함께 한제의 다리뼈와 어깨뼈가 가루로 부서졌다. 극심한 통증에 한제의 이마에 콩알만 한 식은땀이 맺혔다. 한제는 두 눈으로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 상대의 모습을 마음 깊이 새겼다.
사내는 코웃음을 치더니 품에서 가루약을 꺼내 신중하게 한제의 상처에 뿌렸다. 그리고 몸을 훌쩍 날려 숲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제는 땅에 나뒹굴었다. 깊은 살기가 천천히 무르익어갔다. 일평생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도 약했다. 한제는 이를 갈며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한 시진 뒤, 먼 곳에서 마차 바퀴가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추더니 말 한 마리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 위의 잘생긴 청년 하나가 멈춰 고개를 숙여 한제를 살피더니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두목, 시체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말에서 내려 한제를 걷어찼다. 한제는 길 가장자리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말에 오른 청년은 일행들에게로 돌아갔다.
마차를 포함한 그들 일행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한제가 있던 곳을 막 스쳐가던 그때, 갑자기 사방에서 횃불이 연이어 피어오르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위 표국, 너희가 우회해서 움직이면 내가 어쩌지 못할 것 같았더냐?”
큰 고함 소리가 숲속에서 터져 나왔고 뒤를 이어 숲속에 숨어 있던 18명의 흉악한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
횃불이 밝혀진 순간, 한제의 몸에 뿌려진 가루약이 녹아내리더니 무색무취의 기운을 풍기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가루약의 기운은 마차를 포함한 천위 표국을 뒤덮었다.
“화운독(火雲毒)이다.”
천위 표국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뒤이어 천위 표국 사람들은 하나둘씩 온몸이 시큰거리면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것은 우리 화운의 열여덟 영웅이 쓰는 전용 독이지. 흐흐, 피로 활성화시키고 불로 확산시킨다. 오늘 너희들 중 누구도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한 차례의 살육이 벌어져 단 1각 만에 천위 표국 사람 중 반이 죽어버렸다. 비명과 신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횃불 아래 언뜻 보이는 18명의 악한들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칼을 휘둘러댔다.
“하하, 형님, 계집도 셋이나 있습니다. 이번에는 재미를 실컷 볼 수 있겠어요.”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가 칼을 휘둘러 누군가의 머리를 잘라낸 뒤 마차 안에서 한 명의 여인을 끌어냈다. 제법 아름다운 여인이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하 웃던 칼자국의 사내는 오른손으로 그 여인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음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등에 들쳐 멨다. 여인은 사내의 등 위에서 발버둥을 쳤다.
이때 다른 두 명의 사내가 빠르게 달려들어 마차 안에서 두 여인을 더 끌어냈다. 하하 웃던 그들은 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고 그 소리에 숲 속에 숨어있던 말들이 달려왔다.
신체가 건장한 사내는 마차 안에서 찾은 상자 하나를 열어보더니 만족한 듯 웃었다.
“얘들아, 가자!”
분분히 말에 오른 그들은 세 여인의 울음소리와 함께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어깨에 여인을 들쳐 멘 칼자국 사내는 한제의 곁을 지나던 그 때 웃으며 말했다.
“형님, 이 녀석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요? 데리고 가서 며칠 치료했다가 다음에도 다시 써먹을까요?”
건장한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고 빠르게 움직였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가 한제를 걷어차자 다른 사내 하나가 다가와 챙겼다. 그들은 낄낄대며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죽은 채 쓰러져 있는 시체들뿐이었다.
이른 아침, 첫 해가 떠오를 무렵, 18명의 사내들은 어느 산봉우리에 이르렀다. 그 산허리에는 큰 마을이 있었고 그 위에는 「화운 마을」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내가 돌아왔다. 문을 열어라!”
마을의 대문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열렸고 18명의 사내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온 마을이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는 여인과 함께 말에서 내린 뒤 웃으며 말했다.
“형님, 저는 먼저 재미 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내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크게 웃었다. 남은 두 여인 역시 다른 사내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한제는 마을 뒤쪽에 있는 물 감옥에 내던져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떤 빛도 어떤 소리도 없었다. 텅 빈 어둠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력하게 그 어둠 속에서 부유하던 한제는 부어오른 머리를 움직여 보았다. 사지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타오르는 화염이 뼈와 살 사이를 오가는 듯했다.
화운(火雲) 마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며 깨어났다.
멀리서 비명이 약하게 들려왔다.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 미약했지만 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몇 번이나 메아리치며 끊이지 않았다.
사방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영력도 없고 원신도 붕괴된 터라 한제의 두 눈은 이전처럼 모든 것을 관통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한제는 자신이 아주 좁은 방 안에 갇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두 팔은 줄로 결박되어 있었고 몸 역시 어딘가에 묶여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에 담겨 있었다.
무슨 색인지도 알 수 없는 물은 목 아래까지 차 있었다. 구역질나는 비린내가 풍겼다. 흐르는 물은 이따금씩 미약하게 출렁거리면서 한제의 입과 코에 이르렀고 그의 몸에 난 상처도 적셨다. 우물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한제는 숨을 참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비명도 어느새 사라져 사방은 마치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모든 것을 잃은 수련자는 일반인보다 못한 처지구나.”
한제는 덤덤한 눈으로 마음속에 차오르는 분노를 깊고 더 깊은 곳으로 숨겨버렸다.
비바람을 부르며 세상을 호령하던 이한제는 이제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영력을 잃고 원신마저 붕괴된 채 닭 모가지 부러뜨릴 힘조차 없는 일반인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저물대조차 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저물대는 18명의 사내 중 누군가가 가져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류미는 화운 마을 위를 지나갔다. 그녀는 심지어 고개 한 번 숙이지 않았다. 자신이 찾는 사람이 이 산에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한제는 고통이 조금 가라앉고 정신이 돌아오면서 어디선가 느껴지는 영력을 감지하고는 눈을 번득였다. 마을을 떠난 뒤 찾아간 그 어떤 곳보다 진한 영기였다. 그리고 그 영기는… 바로 그의 몸이 잠긴 물에서 풍기고 있었다.
한제는 번득이던 눈을 감고 조용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매우 고요해 수련자로서 폐관수련을 하는 장소와 상당히 비슷했다.
한제의 목 아래쪽으로는 완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고 그의 호흡에 따라 한 줄기 한 줄기의 미약한 영력은 물속에서 느릿하게 늘어났다. 하지만 한제의 몸은 얇은 막 하나로 덮여 있는 것처럼 영력의 흡수를 계속해서 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