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06
“감사합니다!”
한제는 빙긋 웃으며 몸을 숙여 흙 한 줌을 저물대에 챙겨 넣었다.
“감사해야 할 것은 접니다. 허 형이 아니었다면 전 진즉 죽었겠죠. 노예 낙인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을 테고요!”
이원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보름 전, 멍한 상태로 정신을 차린 그는 점차 그간의 기억들을 떠올려냈다. 특히 노예 낙인의 잔혼에 의해 조종된 채 행했던 일들에 심신은 좀처럼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파악한 뒤 그는 한제에게 진심으로 감격했고 이에 자신이 알고 있는 금제들을 아낌없이 알려주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허 형을 데리고 전승 사당으로 갈 겁니다. 그곳에서 선조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파멸금을 드리는 것으로 이 큰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원은 밝게 반짝이는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제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이원을 향해 포권을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진중했다.
파멸금은 상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4대 금제 중 하나로 지난 보름 동안 이원은 그에 대해 한제에게 여러 차례 설명해준 바 있었다. 그 금제는 근본적으로 신통술과 거의 같았고 선술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지만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 금제를 배우기 위해서는 특정한 장소에 가야만 하는데 나천성역에서 파멸금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가였다.
“하지만 안타깝습니다. 이곳에 배치된 선금의 네 번째 방법은 완전하지가 않아요. 분명 오래 전 누군가가 해제했다는 건데 이 금제를 해제한 사람의 수법이 너무 거칠었던 모양입니다.”
이원은 땅을 살피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오른손 검지를 미간에 댔다. 곧 검은 선 한 줄기가 미간에서 나와 그의 손에서 어떤 문양을 이루었고 이내 땅에 찍혔다.
“파(破)!”
짧은 외침에 대지가 한 번 흔들리더니 이원이 지면에 댄 손가락을 중심으로 진흙이 마치 파도처럼 사방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순간 사방의 모든 것은 깨진 거울처럼 하나하나 무너져 내렸고 뒤이어 선산(仙山)과 아름다운 저택이 하나 나타났다.
높지 않은 산허리에는 화려한 궁전이 있었으나, 산 곳곳은 움푹 파인 상태였다. 각종 약초는 거의 다 뽑혀 나가 평범한 나무들만이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며 소슬한 기운을 더할 뿐이었다.
궁전 역시 망가져 있었지만 나름의 위엄이 느껴졌다.
“과연 제 생각대로군요.”
이원이 쓰게 웃으며 바라보자 한제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곳곳에 배치된 금제를 단박에 파악하다니, 이 형의 금제는 정말 놀랍군요. 비록 지금까지는 이미 다른 사람이 해제한 금제들뿐이었지만 언젠가 완전한 선인의 저택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낙인도 사라졌으니 수준까지 높아진다면 이 형은 천하를 오시할 수 있을 테지요.”
“4대 금술 모두를 최고 수준까지 익히면 강력한 신통력을 갖게 됩니다. 심지어 선마(仙魔)까지 봉인할 수 있지요. 매화십팔금은 파멸금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일찍이 외부로 흘러나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 겁니다.”
이원이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데 파멸금이 그렇게 강력하다면 이 나천성역에서 그것을 노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듯한데 지금까지 이가가 어떻게 이겨낸 것인지 궁금하군요.”
한제가 의아한 듯 묻자 이원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우리 가문이 노예로 전락한 지난 오랜 시간 동안 파멸금은 일곱 번이나 외부인에게 전수되었답니다! 매번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말이죠. 허나⋯⋯.”
이원은 한제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비록 금제의 구결을 속이지도 않았고 정확한 전승 장소에서 그들을 가르쳤으나 체내에 심금(心禁)을 갖지 못한 이상 진정한 파멸금을 익혔다 할 수는 없습니다! 심금은 역대 가주(家主)들만이 전승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번에 뇌의 선계에서 나가면 저는 단 한 번도 외부인에게 알려진 적 없던 그 심금을 허 형에게 드릴 생각입니다!”
한제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이원을 향해 포권을 했다.
이원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으려다가 돌연 고개를 돌려 선산의 궁전을 바라보았다.
“저기를 보십시오!”
한제는 고개를 들어 이원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파괴된 궁전에 특별한 부분은 없었지만 잠시 보고 있자니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궁전 뒤쪽의 저 나무, 왼쪽은 흔들리고 있는데 오른쪽은 꼼짝 않는군요!”
한제가 조심스레 말하자 이원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형은 파금술을 배우기 전 그 관찰력만으로도 금제의 대가 여럿을 능가하시겠습니다.”
한제는 대답 없이 웃었다.
“우리의 운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이원은 환하게 웃으며 곧장 선산으로 향했다.
궁전 앞에 이르렀을 때, 한제는 정지된 듯 꼼짝도 않는 나무 반대편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 기운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도 직감했다.
한제와 이원은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아래에는 두 개의 백골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가죽 재질의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갑옷은 약간 조잡해 보였고 자연적으로 생긴 균열이 조금 있었다.
한데 그 피갑(皮甲)을 본 한제의 눈은 보기 드물게도 휘둥그레졌다.
“이건⋯⋯?”
충격적인 변화
“고신의 가죽!”
백골에 걸쳐진 그 피갑을 본 한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뭐라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피갑을 본 순간, 한제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한제는 그것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명한 고신의 가죽으로 만든 피갑이었다. 몇 성급 고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보자마자 한제는 자신의 본신이 떠올랐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제는 고개를 저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모릅니다. 그저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것과 비슷해서요.”
이원은 더는 캐묻지 않고 백골 옆의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순간, 한 줄기 금제가 그의 손에서 튀어나와 열여덟 송이의 매화로 변하더니 그 나무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매화들이 하나둘 떨어지자 나무 주위의 공간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왜곡되었고 나무 아래에 놓여 있던 백골도 비틀리기 시작했다.
쨍강!
이내 거울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나무도 백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 대신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전송진 하나가 나타났다.
“선금팔법 중 세 번째 방법이군요. 신기루 위주로 구성된 금제입니다. 방금 우리가 본 백골은 사실 정말로 나무 아래에 뉘어져 있던 것이 아니었어요!”
이원은 그 전송진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골을 미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이 금제로 죽이는 거군요.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었을지 짐작할 수조차 없겠습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만약 그 백골이 정말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절대 여태까지 그 상태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살인용 금제인 셈이죠. 그렇다면 백골에 걸쳐져 있던 그 피갑은 뭇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법보인 모양입니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 금제가 선인이 만들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왔던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한제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이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찌되었든 이 금제는 처음으로 해제된 모양입니다. 해제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이 금제가 만들어진 지 오래된 까닭에 자체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닐까요? 그로 인해 금제의 빛이 밖으로 새어나갔고 그 안의 흔적이 드러난 것일지도⋯⋯.”
한제의 의견에 이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 형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이 7할 정도는 되겠군요. 물론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의 법보를 빼앗기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설치해놓은 금제일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되겠지만요.”
한제와 이원은 모두 민감하고 꾀가 많은 사람들로 대략적인 탐색을 통해 진실에 상당히 가까워졌다.
한데 그때, 금제를 해제하면서 드러난 전송진이 살짝 안정을 잃었다. 심지어 그 가장자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미세한 회오리가 나타난 상태였다. 이는 붕괴 직전의 징조였다. 그 회오리를 통해 보이는 환상들은 조각조각 난 모습들이었지만 오래된 건물과 시체의 잔해들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거의 동시에 그 광경을 발견한 한제와 이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 형의 추측이 맞는 모양입니다! 가서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원이 웃으며 말했다.
한제가 대답을 하려던 그때, 갑자기 강력한 신식 한 줄기가 외부에서 달려들었다. 이 신식은 내부에 신통력을 품은 듯 그 기세가 굉장했다.
하늘의 구름마저 그 신식의 심기를 거스르기 싫다는 듯 일제히 물러났고 신식은 막힘없이 대륙 전제를 훑었다.
신식이 다가오자 이원은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어졌다. 마치 상대의 신식이 태산과 같은 실체를 갖추고 자신을 압박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체내의 선력조차 통제에 따르지 않고 끓어올라 이원은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냈다.
한데 그저 훑고 지나가려는 듯했던 신식이 이곳을 가두었다.
한제 역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신식에서 익숙한 느낌이 풍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기에 한제는 몸을 훌쩍 날려 전송진으로 돌진했다. 이원 또한 창백하게 질려서는 얼른 그 뒤를 따랐다.
한데 그들이 전송진 바로 앞에 이른 그때, 예의 그 신식이 더욱 미친 듯한 기세로 반경 1천 척 안에 든 세상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붉은 연기가 군데군데에서 피어오르며 꿈틀거리다 각각이 혼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이 혼들은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금제!”
한제는 크게 외치며 한손으로 이원의 뒷덜미를 잡고 전송진으로 돌진했다.
눈치가 빠른 이원은 한제가 뭘 원하는지 단박에 파악했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한제가 속도를 내고 이원이 공격을 하는 편이 유리했다.
이원은 곧장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셀 수 없이 많은 금제를 발휘했다. 그 금제들은 발휘된 순간 각각 열여덟 갈래로 갈라지면서 엄청난 위력을 냈다.
대량의 금제는 붉은 연기에서 나타난 혼들을 가로막았고 그 사이 한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원을 붙잡고 전송진 안으로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냉랭한 코웃음 소리가 그 신식 안에서 흘러나왔다.
“흥! 어딜 가려는 게냐? 피의 공간, 응축!”
그 외침이 울려 퍼진 순간, 반경 1천 척은 곧장 뭔가에 억눌린 듯 빠르게 수축했다. 마치 1천 척 안의 모든 것이 몸을 꽉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제는 전송진까지 단 한 걸음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그는 마치 하늘의 위엄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힘에 짓눌려 옴짝달싹하기도 힘들었다.
한제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저 저쪽 허공에서 붉은 빛 한 줄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빛 안에서는 하나의 인영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었는데 인영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살기가 느껴졌다.
생사가 위급해진 순간, 한제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미간의 세 번째 눈에서 붉은 빛을 발산했다. 빛은 미친 듯이 번쩍거리면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