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610
사실 그는 혈조가 죽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이미 생각해둔 상태였다. 비록 자신이 한제를 돕고는 있지만 주체는 아니었으니, 금제를 모두 배치한 뒤로는 멀리 떨어져 있기로 한 것이다. 한제에게 입은 은혜는 컸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그로서는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이원은 신중한 표정으로 사당으로 돌아와 긴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오른쪽 소매를 휘둘러 수정처럼 생긴 금제의 공을 한제에게 건넸다.
“허 형, 파멸금으로 이 저물대 공간에 총 1465개의 붕괴지점을 만들어놓았습니다. 허 형이 선력 한 움큼만 토해내면 그 금제 공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금제를 폭파시켜 한순간에 이 공간을 완벽히 무너뜨릴 겁니다!”
한제는 그 금제 공을 받고 신식으로 한 번 훑어 확인한 뒤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이원은 약간 어두운 얼굴로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 형, 사실 만약 혈조에게 잡히고 싶지 않다면 그럴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어느 동굴 안에 숨어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됩니다. 혈조가 그 원한을 다 잊을 때까지요.”
한제는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형이 마음 써주신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혈조에 대항할 방법이 더 이상 없게 된다고 해도 이 형에게 피해가 가도록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원은 한참이나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옥패 하나를 꺼내 한제에게 건넸다.
“허 형, 이것은 우리 가문의 파멸금이 기록된 옥패입니다. 비록 전승 사당에서 심금을 드릴 수는 없게 됐지만 이를 연구한다면 금제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신의 기운을 숨기는 방법도 몇 가지 들어 있습니다.”
한제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 든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원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결인을 그려 전송진을 하나 만들어냈다. 이 전송진은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불안해 보였다.
“허 형, 이 전송진은 딱 세 차례만 가동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원은 다시 한 번 한제를 바라본 후 전송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만약 이 일에 제가 연루되지 않을 수 있다면 이곳에 남아 우리 가문의 금제가 정열기 수준의 수련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켜봤을 겁니다. 허 형, 몸조심하십시오!”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쉰 그의 모습이 이내 전송진 안에서 사라졌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무심한 눈길로 하늘을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혈조, 요석설⋯⋯. 단언컨대 너희들에게 혈혼단이 있다 해도 이 저물대 공간이 무너져 내릴 때 발생하는 그 파멸적인 힘에는 절대 다시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한제에게는 요석설에게서 얻은 저물대가 하나 있었다. 다만 이 저물대를 열 수 없어서 그는 금제로 이를 봉인하여 그 안에 새겨진 낙인의 기운이 발산되지 않도록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진짜 혈혼단이 몇 개 더 들어 있을 터였다.
“이 하늘을 거스르는 약은 혈조라 해도 많이 가지고 있지는 못할 터. 거기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쓰기도 했을 테니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몇 개 되지 않을 것이야.”
한제는 차게 웃으며 저물대에서 요석설을 감금해놓은 금제의 공을 꺼내 잠시 살피더니 대충 내던졌다. 금제의 공은 저 멀리 어느 산맥에 떨어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제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전송진으로 들어섰다.
“혈조, 네가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면 전력을 다해 너를 멸할 것이다!”
전송진이 번쩍 빛나더니 이내 한제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침내 오다
전송진에서 나와 보니 낯선 세상이 펼쳐졌다. 하늘은 어두웠고 전광이 맴돌았으며, 땅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허나 낯설기는 해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곳은 여전히 뇌의 선계로군! 이원의 실력이 대단하구나!”
한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껏 그를 감탄하게 한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이원의 금제술은 정말이지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인이 만들어놓은 저물대 공간에 전송진을 배치하려면 금제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한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한제는 한손으로 전송진을 건드렸다. 그러자 진은 곧장 줄어들다가 결국에는 주먹만 한 결정체로 변했고 그는 그 결정체를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제는 먼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 조각에서 며칠을 지내며 지형을 신중히 살핀 그는 어느 산맥에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그는 주위에 아무 이상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땅속으로 들어가 요석설의 저물대를 숨겼고 그 자리에 몇 개의 금제를 더 걸어놓은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한제는 이어서 땅속을 빠르게 헤치며 나아가다가 어느 평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산맥을 바라보다가 눈을 번득이며 먼 곳으로 날아갔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했고 조각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는데도 멈추지 않고 곧장 허공의 사슬을 타고 이동했다.
사슬을 따라 이동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한제의 눈앞에는 또 다른 조각이 들어왔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곧장 토둔술을 이용해 그 조각의 땅속으로 들어가 적당한 위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금제를 하나하나 쏘아 보냈다.
지난 한 달간 이동하면서 한제는 이원이 남겨준 옥패를 연구했다. 그중 기운을 숨기는 금제는 당장 자신에게 요긴한 것이었기에 그는 그 금제를 연구하는 데 열중했다.
물론 혈조 정도 되는 수련자에게서 완벽히 숨을 수는 없었으나, 잠시 동안은 가능할 만한 금제였다. 그리고 지금 한제의 계획에 이 금제를 함께 사용한다면 상대의 눈을 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금제가 줄기줄기 나타나 원형의 금제 공을 이루었다. 한제는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금제의 공이 닫히는 순간, 그의 그림자에서 선위 꼭두각시가 빠져나왔다.
선위 꼭두각시를 바라보던 한제는 전송진의 결정체를 던진 후 천천히 눈을 감고 원신을 분리해내 선위의 체내에 녹여냈다. 이는 선위 꼭두각시의 신통력 중 하나로 제련자의 원신을 그 안에 녹임으로써 선위 꼭두각시를 통제할 수 있었다.
원신이 분리된 한제가 눈을 감은 순간, 그의 오른손에서 마지막 금제가 한 줄기 튀어나와 금제의 공 안을 채웠다. 이 공은 한 번 번쩍이더니 빠르게 쪼그라들어 빛 부스러기로 변하더니 몇 번 깜빡이다 이내 사라졌다.
한편, 선위는 전송진의 결정체를 집어 꿀꺽 삼키고는 곧장 지면 위로 솟아올랐다.
아직은 선위의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 약간 불편하고 어색했다. 선위의 몸을 빌린 한제는 신식으로 지하를 한 번 훑어봤지만 본신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선위의 육신이 없었다면 혈조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겠지. 하지만 내가 먼저 행동을 취했으니 혈조는 분명 이 체내의 원신에 시선이 끌리게 될 거야.”
한제는 자신의 원신이 깃든 선위의 육신을 살피다가 이내 유성처럼 긴 잔영을 남기며 몸을 날렸다. 신식을 펼쳐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 그는 깊은 밤의 반딧불처럼 눈에 띄었다.
그는 경계심 따위는 없는 듯 방자하게 굴었다. 나천성역에 들어온 뒤 줄곧 억눌러온 태도였다. 이곳을 떠난다면 연맹성역의 늙은이들이 곧장 자신을 추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한제가 지금까지 신중하게 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혈조가 찾아온 마당에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강력한 선위의 육신을 가지고 있다. 이 육신은 본신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다른 수련자들보다는 훨씬 강했다.
“혈조!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이 이한제가 널 기다리고 있다!”
한제는 전보다 더 서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그는 상대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살기와 육신의 기운이 이미 음의의 경계에 이르러 있어서 그런지 주위의 수련자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피해 멀리 돌아서 가곤 했다.
한제는 지금 어떤 법보를 찾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속력으로 수많은 조각들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새로운 조각에 도착할 때마다 그는 신식을 활짝 펼쳐 탐색했다.
눈 깜짝할 사이 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한제는 이곳이 제 세상인 양 활개치며 돌아다녔다. 중대사를 앞둔 터라 일부러 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지만 먼저 덤벼드는 사람은 절대 호락호락하게 보내주지 않았다.
강인한 육체에 더해진 신식을 통한 신통력은 한제의 힘을 거의 절정에 이르게 했다. 특히 법보에 비견할 만한 강력한 육체까지 더해지니 그를 마주친 자들은 대부분 미간을 찌푸리며 피해 갔다.
하지만 한제는 맹목적으로 아무 데나 쏘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신을 숨겨놓은 그 조각의 주위만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때문에 그의 행동반경은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는 두 가지 장점이 있었다.
우선 무작위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니 혈조가 그를 놓칠 리 없었다.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본신을 혈조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너무 멀리까지 나가 있을 때 혈조가 자신의 본신을 발견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이 펼쳐질 터였다.
한편, 한제가 혈조를 찾고 있듯 혈조 역시 한제를 찾고 있었다. 자연히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혈조는 마치 순간이동처럼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의 침착한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덤덤했지만 붉은 두 눈동자는 점점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다 해도 그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나, 그런 그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외동딸 요석설이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그는 하늘과 싸울 수도 있었다. 심지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는 것과 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혈조는 망설임없이 딸을 택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와 능천후, 천운자의 다른 점이었다. 그들이었다면 반대로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세 번째 단계에 이르는 것을 택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딸을 위해 자존심마저 꺾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약조 했던, 절대로 나천성역에는 발도 들이지 않겠다는 맹세마저 어긴 것이다.
“아버지, 제게 굳은 맹세를 하게 하셨으면서 어찌 나천석 하나를 남겨주셨습니까?”
사실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생각에 잠겨 빛처럼 이동하던 혈조는 어느 조각에 발을 디딘 순간 또다시 신식을 활짝 펼쳐 이 조각을 맹렬하게 훑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한없이 침착하던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내다보던 그에게서 실체화된 살기가 번득이기까지 했다.
“이한제⋯⋯.”
그의 살기는 너무나 짙어 전방의 산봉우리도 그 살기에 붕괴해버렸다.
★ ★ ★
혈조가 이 조각에 발을 들인 순간, 한제 역시 유성처럼 빠르게 몸을 날리며 다른 한쪽에 자리한 뇌광의 사슬로 달려들었다. 그가 신식을 펼치자 온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시커먼 구름이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온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조각에 있던 모든 수련자들은 순간 영혼까지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음의의 수련자도 양의의 수련자도 마찬가지였다.
한제는 우뚝 멈추더니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그러던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드리웠다.
“마침내 왔군!”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빽빽하게 몰려든 구름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양쪽으로 갈라지듯 밀려났다. 그 안에서 피처럼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강력한 신식이 폭풍처럼 조각 전체를 휩쓸었다.
두 번째 단계의 신통력까지 배어 있는 강력한 신식에 이 조각은 무너질 기미를 보였다. 구름층으로부터 배어 나온 붉은 빛은 눈부시게 번득였다. 조각 전체가 붉은 빛에 뒤덮여 물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1천 척 앞에서 그 붉은 빛이 응집되기 시작하더니 한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인영은 붉은 옷에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썹의 준수한 중년 사내가 되었다.
독특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는 덤덤하게 한제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제는 상대의 두 눈에 타오르는 빛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혈조는 말없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그 작은 손짓에 하늘은 찢어지듯 쩌적 하는 소리를 냈고 엄청난 기세가 한제의 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한제의 입이 열렸다.
“날 죽인다면 요석설은 혈혼단을 가지고 있다 한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혈조는 냉랭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손가락 끝으로 허공을 눌렀고 엄청난 압박감이 한제 3촌 앞까지 다가왔다.
펑!
거대한 폭발음에 이어 한제는 한 움큼 선혈을 토해내며 끈 떨어진 연처럼 먼 곳으로 나가떨어졌다. 허공에서 몇 바퀴나 뒤집히던 그의 몸이 떨어지자 지면이 갈라졌다.
“크윽!”
한제는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도 끊임없이 뒤로 밀려났고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많은 균열이 일어났다. 그는 1천 척이나 뒤로 밀려난 후에야 겨우 안정을 찾았으나, 입가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그의 앞 지면은 온통 균열로 가득했다. 혈조의 손짓 한 번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같았다.
혈조는 한 발 앞으로 나섰고 어느새 한제의 1백 척 앞까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