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17
“영의 씨앗⋯⋯ 영⋯⋯.”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노인은 전율했다.
“저… 저분은… 이가의 선조님이다! 주작성의 수호자! 수천 년간 일인자로 군림해왔던 이가의 선조, 이한제 님이야!”
한제는 약간의 고민에 빠졌다. 주작성 수련자들이 자신을 그토록 숭배하는 데는 분명 주무태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주무태는 한제가 자신에게 주작 자리를 넘겨준 것에 대해 감격했으나, 한제가 곧바로 주작성을 떠나면서 보답할 기회조차 없었다. 이에 한제의 후손과 그가 남겨둔 문파, 심지어 조나라를 지극히 보살핀 것이다.
여기에 주작묘에서 벌어진 일과 그 안에서 한제의 활약 등이 퍼져 나갔고 주무태는 한제에게 주작성의 수호자 주작성의 선조 등의 칭호를 붙여주었다. 이는 다른 수련자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
허나 주무태가 이렇게 한 것에는 은혜에 대한 보답 차원만이 아니었다. 주작이 될 당시 문정기에도 이르지 못했던 그는 역대 가장 약한 주작이었다. 이에 다른 수련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고 위엄을 세우기 위해 한제라는 수호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제 역시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주무태가 무슨 이유에서 이런 일들을 했건, 자신은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그게 바로 이한제였다.
말없이 한제의 뒤를 따르던 소년은 이곳의 수련자들이 진심으로 허목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았다. 만약 자신이 지금의 수준으로 가문에 돌아간다면? 아마도 다들 자신을 공손하게 대하겠지만 결코 진심은 아닐 것이다.
한제도 타산도 소년도 각자의 생각에 잠겨 이동하다 보니 저 멀리 거대한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똬리를 튼 거대한 용 같은 도시는 부귀해 보였고 검은 돌로 이루어진 성벽에서는 심지어 법술의 파동도 흐르고 있었다.
한제는 그 도시에 여러 개의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금제들이 한꺼번에 가동된다면 문정기 수련자라 해도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이곳은 주작성에서 선유족이 차지하고 있는 곳을 제외하면 주작국 내의 유일한 일반인 제국의 수도였다.
대이(大李) 왕조!
지어진 지 437년 된 이 나라는 선유족 부락 다음으로 강력한 일반인 제국이기도 했다. 4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고해졌고 병력도 상당했으며, 수많은 무림 고수도 있었다.
허나 무엇보다 이 나라를 가장 강력하고 유명하게 한 것은 대량의 수련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운천종(雲天宗)과 조나라의 각 문파를 위주로 수많은 문파가 뒷받침하고 있어, 이가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주작성 전체로 신식을 펼친 한제가 혈통의 이끌림을 느끼고 찾아온 곳이 바로 이 도시였다. 이곳에는 이가의 혈통이 매우 많이 응집되어 있었다. 허나 끝내 이산은 발견하지 못했다.
한제는 훌쩍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황성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번잡한 인파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집들을 바라보던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수도는 너무 사치스러웠다. 신식을 통해 살펴본 바로는 도시 전체의 길에 깔린 것은 귀한 청화석(靑花石)이었다. 게다가 사방의 나무들은 모두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매우 화려했지만 사실 지나친 낭비이기도 했다.
한제는 이 도시가 온갖 슬픔, 비통함, 분노, 공포 등 심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 오래 머물다보면 성격이 비뚤어지고 감정이 격해져 수명도 깎여나갈 것이 분명했다.
이는 일종의 원망의 기운이었다. 당시 청령성(靑靈星)에서 모든 사람의 원기(怨氣)를 흡수했던 한제도 지금 이 도시의 하늘을 가득 메운 원기에는 미간이 절로 구겨질 정도였다.
분노
넓게 퍼져나간 신식을 통해 한제는 주작성의 수많은 도시들이 원기를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부락과 집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와 응집된 그 원기는 주작성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특히 붉은 흙이 깔려 있고 도처에 시체가 즐비한 서북부에서는 더욱 많은 원기가 흘러나왔고 수도를 가득 뒤덮은 원기는 마염(魔焰)이 되어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이런 원기는 한제 정도 수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정신을 집중해야만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이상한 일이군.”
한제는 어두운 얼굴로 걷기 시작했다. 가문의 후손이 번성하여 호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기뻤으나, 이토록 짙은 원기의 영향을 받느니 차라리 이런 부귀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 돌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행인들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비켜섰다. 한제는 역시 몇 걸음 물러나 말없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몇 마리 말들이 내달려 오고 있었다. 그 위에는 청년들이 올라 있었고 뒤로는 수많은 종들이 따랐다. 이 종들은 말을 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청년들을 뒤따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을 탄 청년들의 복장은 하나 같이 화려했고 특히 선두의 청년은 용모도 매우 준수했다. 그러나 그의 날렵한 눈썹과 반짝이는 눈 아래에는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한제는 단박에 그 검은 기운을 간파했다.
그때, 하늘에서 두 갈래의 검광이 날아들었다. 그 위에는 축기기 수준의 두 수련자가 올라 말에 탄 청년을 위해 길을 터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한제의 미간이 구겨진 것은 화려한 복장의 청년 말 뒤에 매인 철사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 철사의 반대쪽 끝에는 한 사람이 묶여 있었다. 머리가 마구 흐트러진 데다가 얼굴도 더러워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체형으로 미루어 사내인 것 같았다. 사내가 질질 끌려간 자리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말을 탄 청년들은 잔인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에 박차를 가했고 그들이 떠나간 뒤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헐레벌떡 그 뒤를 쫓으면서 바닥에 남은 혈흔을 지웠다.
그들 무리가 모두 지나간 뒤 행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재수도 없지! 또 어떤 세상 물정 모르는 이가 16황자를 화나게 했을까? 도시를 한 바퀴 돌고 난 뒤에는 또 죽이겠지?”
“여기서는 황족이 하늘인데 뭘 어쩌겠어? 몇 달 전에 국사(國師)께서 밤하늘을 보고 서북쪽 하늘에서 흉성(凶星)이 나타났다고 한 마디 한 것만으로 그쪽에 사는 평민 수십만 명을 죽였을 정도인데…”
“하긴, 아직도 서북쪽에는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다더군.”
행인들의 말을 들은 한제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 화려한 차림의 청년에게서 한제는 분명 가문의 피를 느꼈다.
“타산, 저자를 데려와!”
한제의 덤덤한 목소리가 끝나는 순간, 타산은 두 말 않고 몸을 훌쩍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좀 전의 그 화려한 옷차림의 청년이 놀라움과 두려움,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엄하다! 감히 이가 사람의 몸에 손을 대다니! 네놈들은 어느 문파의 수련자냐? 컥!”
타산이 말없이 앞으로 떠밀었고 청년은 바닥에 엎어져버렸다.
이 광경에 행인들은 경악했고 즉시 한참 떨어진 곳까지 거리를 벌린 후에야 이쪽을 힐끔거렸다.
화려한 복장의 청년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타산을 노려보았다. 그는 무척 놀란 듯했지만 겁먹은 기색은 아니었다.
“감히 이가 사람인 나를 다치게 했겠다!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 순간, 청년의 얼굴에서는 짙은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한 마리 뱀이 되어 혀를 날름거리다가 타산을 향해 소리 없이 쉭쉭 거렸다.
수련의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제대로 이 모든 것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이 청년의 몸에서 음산한 기운이 폭발하듯 솟아오르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서 커다란 호통과 함께 좀 전에 지나갔던 청년의 일행이 달려들었다.
두 갈래의 검광도 하늘을 가르며 접근해왔고 그 아래에는 종노릇을 하고 있는 무림 고수들이 살기를 짙게 풍기며 돌진해왔다.
“저 반역자들을 잡아라!”
말에 탄 청년들이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암살자다! 황자님을 보호하라!”
번득이는 검광들 위에서 두 수련자는 이를 악문 채 타산에게 달려들었다.
좀 전에 그들은 미처 손을 써볼 틈도 없이 타산이 황자를 데려가는 모습에 찬 숨을 들이마셨다.
운천종 제자인 두 사람은 황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만큼 자칫하면 문파 내에서 큰 벌을 받게 될 터였다. 그러니 이를 악물고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타산은 냉랭한 얼굴로 커다란 손을 대충 휘둘렀다. 순간 불어온 광풍에 두 수련자의 검광은 곧장 흩어져 버렸고 비검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두 수련자 역시 엄청난 타격에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그 무렵, 맹렬히 달려들던 무림 고수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하나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타산의 손짓 한 번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죽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이 광경을 바라보던 황자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버럭 호통을 쳤다.
“감히 나를 해하려 들다가는 결코 살아서 이 주작성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황자의 오만방자한 말에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가볍게 뺨을 휘갈겼다. 수련자로서의 힘은 전혀 실리지 않은 손짓이었다. 그 순간,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졌던 뱀은 흩어져 사라졌다가 곧바로 다시 응집되었다. 그러더니 황자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 한제를 집어삼키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다만 이 광경은 한제와 두 종을 제외한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누가 우리 이가 사람의 몸에서 원령(怨靈)을 사육하고 있는 것인지 봐야겠구나!”
한제는 이 오만한 청년의 혼백은 한참 전에 이미 다른 존재에게 흡수되어 원기로 이루어진 영물로 대체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뱀이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든 순간, 한제는 가볍게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뻗었다.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검은 뱀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검은 뱀은 곧장 머리를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더니 한 덩어리의 검은 원기(怨氣)로 변했다. 한제가 그 원기를 쥔 채 가볍게 손에 힘을 주자 뭉개진 기운은 검은 낙인으로 변했다.
“우웩!”
검은 뱀이 사라진 순간, 황자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허나 이미 다른 존재에 영혼을 흡수당한 청년의 눈은 빛을 잃고 어두워져 매우 멍한 상태였다.
신식으로 사방을 훑었을 때도 어떤 이상도 감지하지 못했지만 한제는 이미 누군가가 이가 사람의 생명을 대가로 원령을 사육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비검을 제련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영(靈)으로 삼고 원기를 흡수하여 원령으로 만드는 이 신통력은 흡수한 원령의 수가 많을수록 그 위력은 무시무시해진다.
수도에 들어온 뒤부터 느꼈던 짙은 원기와 이 상황을 결합해본 한제는 이곳이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기가 많을수록 그 누군가는 더욱 강한 원령을 배양해낼 수 있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한제가 싸늘한 눈빛으로 원기로 이루어진 검은 낙인을 내던지자 낙인은 어디론가 느릿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제는 낙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고 그의 뒤로 타산과 소년이 바짝 따라붙었다.
그 무렵, 사방에서 줄기줄기 검광들이 모여들었다.
그 검광 위에 선, 주작성 각 문파 수련자들은 한제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법보를 꺼내 들었다. 그들에게 상대는 수도 한복판에서 황자를 살해한 흉악한 살인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제는 덤덤하게 소매를 한 번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 수련자들이 꺼내 들었던 법보는 모두 나가떨어졌고 수련자들 역시 순식간에 광풍에 떠밀려 수만 리나 밀려난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그런데 방금 그자… 왠지 눈에 익단 말이지.”
이들은 정신을 차린 후로도 감히 한제를 다시 뒤쫓을 엄두는 내지도 못한 채 검광이 되어 각자의 문파로 돌아갔다.
한편, 한제는 주체하기 어려운 분노를 품은 채 점차 황성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수련자가 달려들었지만 그는 그저 소매를 휘둘러 그들을 멀리 보내버렸을 뿐 결코 해하지는 않았다.
그 무렵, 황성의 대전에는 용포를 입은 한 중년 사내가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서 있었는데 그녀의 두 눈에는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그리고 주위에서는 수많은 이가 사람들이 비단옷을 입은 채 음산한 눈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대전 밖 광장에는 병사들이 숙적을 기다리는 듯 빽빽하게 모여 있었는데 그들에게서는 짙은 살기가 흘렀다.
“대체 누가 감히 우리 가문을 건드렸단 말이냐!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냈느냐?”
용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손에 들고 있던 벼루를 매섭게 내리치며 호통을 쳤으나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의 적막이 흐른 후, 한 백발노인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와 포권을 했다.
“그자들의 정체는 아직 조사 중이오나, 분명한 것은 수준이 매우 높은 수련자들이라는 겁니다.”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 중년 사내가 냉소했다.
“흥! 보아하니 우리 가문이 그동안 너무 관대했던 모양이군. 무명소졸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말이야. 국사는 어디에 있는가?”
사내의 투덜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폐하께서는 심려치 마시지요. 이 일은 제 제자들이 처리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