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716
한제의 얼굴에 더욱 짙은 슬픔이 드리웠다. 눈앞의 도시는 그의 기억을 전부 흩어버렸다.
말발굽 소라와 바퀴가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땅이 약간 진동한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마차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앞에서는 몇 마리 말이 이끌고 뒤에서는 몇 개의 찻간이 끌려가는, 평범한 마차들이었다.
맨 앞의 마차에는 백발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는데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아 무림 고수가 분명해 보였다.
그 노인은 수시로 채찍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속도가 빨라졌다.
노인은 심드렁하게 한제 일행을 힐긋 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떠나갔다.
마차가 떠난 후, 복잡한 눈빛으로 도시를 살피던 한제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문에서는 문지기들이 통행증을 확인하고 있었으나, 한제가 터덜터덜 걸어가는데도 그의 존재를 알아챈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성벽 너머는 길 양쪽으로 상점이 즐비했고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바삐 돌아다녔다. 매우 활기차면서도 번잡한 광경이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표정으로 한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든 광경이 낯설었다.
“모든 것이 변했어.”
한제는 슬픈 눈으로 한 상점을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이곳에 아주 오래된 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그 홰나무 아래 바위 위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넷째 작은아버지가 자신을 수련계에 들이려고 찾아왔던 날에도 그는 그 바위에 앉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의 그는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났다.
수백 년이란 수련자에게는 그다지 긴 세월이 아니지만 일반인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었기 때문인지 상점 안에서 심부름꾼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걸어 나왔다. 하지만 한제 뒤에 버티고 선 거구의 타산을 본 그는 움찔 놀라더니, 이어서 기이한 외모의 으스스한 소년까지 보고는 억지로 표정을 폈다.
다소 창백해진 얼굴로 심부름꾼 청년은 한제에게 말했다.
“여기는 옥을 파는 곳입니다. 사시려거든 들어오시고 사지 않으시려거든 그만 떠나주세요. 뒤의 저… 저 거인 때문에 입구가 다 막히겠어요.”
한제는 대답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전에 이곳에 오래된 홰나무가 한 그루 있지 않았나?”
심부름꾼은 짜증이 났지만 타산과 소년의 기세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홰나무라뇨, 전 어렸을 때부터 이 황조성에서 자랐지만 홰나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한제의 눈빛이 더욱 슬픔으로 물들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그는 성의 더 안쪽을 향해 걸었고 타산과 소년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심부름꾼 청년은 그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콧방귀를 뀌고는 상점 안으로 돌아갔다. 이제 상점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한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익숙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낯선 느낌만이 가득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 상태로 걷고 또 걷던 한제가 돌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마치 엄청난 공격을 받고 허약해진 것처럼 와해되고 무너져 내렸다.
그는 1천 척 너머, 돌담으로 둘러싸인 곳을 보고 있었다. 수많은 사병이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고 또한 수십 갈래 수련자들의 기운이 그 돌담 너머를 맴돌았다. 무척 중요한 사람이 있는 곳이 틀림없었다.
돌담 안의 풍경은 바깥과는 전혀 달랐다. 그곳의 방들은 한제에게 익숙한 옛 느낌 그대로였고 그 집 앞에는 봉분도 몇 개 있었다.
집으로
한제는 멍한 얼굴로 걸음을 내딛었다. 딱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가 담 안쪽에서 다시 나타났다.
석양이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때였다.
한제는 봉분 앞에 그대로 꿇어앉았다. 언제부턴가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그는 말없이 꿇어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 격한 슬픔과 그리움에 사무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시간도 천천히 흘러갔다.
타산과 소년은 말없이 그런 한제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몰랐지만 한제의 행동을 보고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허목의 집이었을 것이다. 평생 가족의 사랑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소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한제는 봉분에 세워진 영패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익숙한 방들을 둘러보았다. 동시에 1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진귀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정원의 문을 밀어 열자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달빛에 잠긴 정원이 드러났다.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밥상까지도 놓인 그대로였다. 다만 사람만이 없을 뿐이었다.
한제는 1천 년 전으로부터 전해지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한제야, 공부는 어떻게 되어가니? 열심히 하거라. 과거 시험이 내년이잖니. 이번 과거 시험에 모든 것이 달려 있지 않느냐. 이 아비처럼 평생 시골 촌구석에서 썩어서는 안 된다.”
“됐어요, 매일 잔소리. 우리 한제는 반드시 시험에 붙을 거라고요.”
“한제야, 너희 넷째 작은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다. 네 작은아버지가 도와준 덕에 이 아비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러니 앞으로 출세를 하게 되더라도 절대 넷째 작은아버지께 보답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단다.”
한제는 정원을 지나 수백 년 만에 보는 집으로 향했고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몸은 마치 노인처럼 노련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는 손으로 집의 문간과 벽, 어릴 적 뛰놀던 바닥 등을 매만졌다. 추억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몸서리쳤다.
타산과 소년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집안에 홀로 앉은 한제는 잠시 모든 것을 잊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어렸을 적의 즐거웠던 추억들, 부모님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절의 기억들뿐이었다.
이 외롭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어렸을 적의 일들이 떠오르며 한제의 심신은 한 차례 씻겨나갔다.
잠자코 앉은 한제의 얼굴에는 기쁜 듯 미소가 드러나기도 했고 비통한 슬픔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의 즐거움은 외로운 것이었고 그의 웃음은 소리 없는 슬픔과 애통함이었다. 눈물이 흘러 땅에 떨어지면서 흔적을 남겼다.
달이 물러가고 하늘 끄트머리에서 해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서 어둠이 차차 가셨다. 대지를 물들인 햇살이 황조성까지 뒤덮었다.
창밖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한제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멍한 눈으로 사위를 살피던 그는 이내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머리 큰 소년의 눈에 복잡한 빛이 가득했다. 지난 밤, 그도 끊임없이 기억을 되새겼다. 특히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경멸스런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으나, 이제 그 아픔도 꽤나 옅어진 상태였다.
한제와 두 종은 모습을 숨기지 않았기에 날이 밝아지자 병사들의 눈에 띄었고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살기를 드러냈다. 동시에 축기기에서 최고 화신기까지 서로 다른 수준의 수련자 열댓 명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각자의 신식을 한제 일행에게 고정시켰다.
“감히 황실 조상의 집에 난입하다니, 겁도 없구나! 구족을 멸할 대죄임을 알렸다?”
돌담 밖에서 분노한 목소리와 함께 번득이는 검광들이 나타났다.
“네놈들이 어디 소속 수련자들이건 이가에 잠입한 죄는 용서치 않겠다! 이곳은 이가 사람 외의 누구도 출입을 불허한다는 것을 몰랐더란 말이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상공에 나타난 열댓 명 중 유일하게 화신기에 이른 노인이었다.
타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소년은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봉분에서 시선을 거둔 한제는 방금 나타난 수련자들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불쑥 물었다.
“이 묘는 누가 만든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수련자들의 귀에는 하늘의 위엄처럼 우렁차게 느껴졌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수련자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특히 화신기에 이른 노인은 그 한 마디에 마치 경지가 삼켜지는 듯했다.
만약 이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는 느낌에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일반인 세상의 황족이 지은 곳으로 황족의 선조가 살던 곳이다! 우리 주작성의 주인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한데 그 순간, 한제를 자세히 살핀 노인은 어딘가 낯익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상대를 직접 만난 적이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한제는 말없이 부모님의 묘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하늘로 솟아올랐다. 타산과 소년을 데리고 이곳을 떠날 작정이었다.
바로 그때, 돌연 하늘 저 멀리서 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구름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그와 동시에 잔뜩 분노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히 우리 현도종(玄道宗)이 지키고 있는 이가의 저택에 침입하다니! 네놈을 기필코 처단해주마!”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구름 안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중 백발이 성성하고 두 눈에서 밝은 빛을 번득이는 노인은 영변기 초기 수준이었다.
그 노인이 나타나자 모든 수련자는 매우 공손하게 부복했다.
“현도종⋯⋯.”
한제는 돌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영변기 수준에 이르렀군. 조나라도 5성 수련국으로 승급된 건가?”
잔뜩 분노한 채 달려왔던 노인은 순간 흠칫 놀라더니 미간을 팩 구겼다.
“우리 조나라가 5성 수련국이 된 것은 3백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주작성 안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 넌 누구냐!”
한데 노인은 어디선가 상대를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5성 수련국이라⋯⋯.”
한제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다보았다. 그가 어렸을 때는 3성 수련국에 불과했던 조나라가 수백 년 만에 5성 수련국이 되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데 한제는 그 영변기 노인에게서 미약하게나마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한제 자신에게 속한 기운이었다.
그는 당시 조나라에서 화신기에 이르렀을 때 영(靈)의 씨앗 열 개를 남겨뒀던 것을 떠올렸다. 눈앞의 노인은 당시 그 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요즘 너희 현도종이 이곳을 지키고 있단 말이냐? 이곳의 수련자들은 모두 현도종의 제자들인 건가?”
한제가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노인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어째서인지 분노가 흩어져 사라졌다. 또한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친근감에 노인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현도종만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지. 주작성 모든 문파에서 천부적으로 자질이 가장 뛰어난 이들만이 바로 이곳, 이가의 저택을 지키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노인은 자신이 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 채 자세히 설명했다.
한제는 주위의 수련자들을 훑어보았다. 분명 모두 천부적 자질이 훌륭한 이들이었다.
한제는 약간 감동한 듯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말을 마친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원력이 한 줄기 뿜어져 나와 빛으로 부서지더니 주위의 수련자들은 물론 무기를 든 채 땅에 서 있던 병사들 체내로도 스며들었다.
수련자들은 흠칫 놀랐으나, 이내 체내에 흐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는 표정이 기이하게 변해갔다.
“당신은⋯⋯?”
그 순간, 영변기 노인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이 더욱 커졌다.
“훌륭하구나. 당시 네게 영의 씨앗을 남겨서 다행이다.”
말을 마친 한제는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타산과 소년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내 세 사람은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