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67
268. 나의 가장 소중한 (3)
***
민준과 델이 엔델리온의 왕과 비밀 회담을 진행하던 그때.
아시프-1은 우주 공간을 맨몸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음, 여기도 아닌것 같군.’
주교들은 교황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함대의 바로 다음 목적지에서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지금 그가 있는 차원은 그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세계다.
아시프-1은 이번에는 평소처럼 한 번만 차원 방벽을 넘는 대신에 꽤나 많은 횟수를 반복하여 여기까지 왔다.
최근에도 창조주와 함께 방문했던 그곳, 차원계의 중심부.
위원회 본부 및 고대 종족들의 주거지가 위치한 장소.
‘한 번 더 텔레포트 해 볼까?’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신형이 사라지고.
잠시 후, 캄캄하고 드넓은 우주 공간을 관통하여 먼 좌표에서 다시 나타났다.
아시프-1의 두 눈에 흰 섬광이 번뜩인다. 물질계와 영계가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 민준이 소싯적 지구에서 외계 범죄자 추적을 위해 자주 써먹었던 그 방법으로, 좀 더 넓은 범위를 관측 중이다.
마법 보호구는 고사하고 우주복도 걸치지 않은 몸이지만 타격은 전혀 없었다. 덕분에 아시프-1은 이 육신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행성 파괴 병기를 선물하실 생각이었나?’
엔델리온의 공주 신분에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사재를 부어 넣은 게 분명하다.
드래곤조차 마법이 없으면 괴로워하는 초저온의 환경임에도 그는 쾌적하게 느꼈다.
창조주에게는 굳이 고백하지 않았지만, 사실 아시프-1은 예전에 스스로를 벌하겠다고 자기 몸을 활활 불태울 때도 통증을 전혀 못 느꼈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비밀로 부칠 것이다.
어쨌든, 그 정도로 튼튼한 몸이라는 뜻이다.
‘어라?’
영계에 걸쳐 있던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된다.
행성과 행성 사이 펼쳐진 드넓은 공간에 덧입혀진 영계 풍경.
그곳을 오가는 영적 파동을 아시프-1은 볼 수 있었다. 다른 종족이 같은 일을 시도해도 각 영파의 내용을 해석하거나 종류 별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워낙 변칙적이며,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월등히 어려운 난이도이기에.
아시프-1도 델에게 미리 배우지 않았다면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거잖아?’
그가 여태 찾던 것은 특정 패턴을 담은 파장이었다.
고대 종족은 다른 차원과 교신할 때 영계를 경유한 신호를 보낸다.
저것은 그중에서도···.
‘엔델리온 왕가의 고유 파장! 찾았다!’
시계가 없어도 아시프-1의 초인적 감각은 현재 시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와 외조모 간 살벌한 회담이 시작된 그 시간부터 아시프-1은 탐색을 시작했으며, 드디어 실마리를 잡았다.
‘저 흔적을 따라 이동하자!’
통신이 끊기기 전에 발신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왕이 있는 그곳으로.
굳이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쓰는 이유가 있다. 엔델리온들이 모여 사는 행성은 더이상 아시프-1이 한창 활동하던 옛날처럼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공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 자리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아시프-1은 투덜거렸다.
‘필요에 따라 행성 위치를 마음대로 옮겨버린다니. 그 보신주의자들은 옛날보다 더 지독해졌군.’
언제부터인가 다른 고대 종족, 그러니까 카바이트와 토드마저도 더이상 촉수 괴물들의 행성을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그 별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행적을 밟힐 것 같으면 이동 패턴을 바꿔서 또 엉뚱한 곳으로 별을 날려 버리기 때문이다.
아시프-1은 민준이 가득 불어넣어 준 생명력을 끌어 모은다. 그는 부활한 후로 요즘 가장 힘이 넘쳤다. 우주선 안에 꾸민 축사 덕이다.
그대로 다시 초장거리 텔레포트를 준비하던 찰나.
‘······어?’
기묘한 감각.
‘뭐지?’
육체에 심어진 무언가 반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군가와의 연결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새로이 누군가와 연결된 것 같기도 한.
‘혹시··· 두분 쪽에 무슨 일이?’
아시프-1의 표정이 굳었다.
***
윰투스를 비롯한 주교들은 근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지휘선 내에 모였다.
그들이 응시하는 닫힌 문 너머에는 화신과 성모가 있다. 둘 중 후자 쪽의 상태가 지금 매우 좋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심란한 이들은 세눈박이들만이 아니었다.
=윰투스··· 공주님은 정말 괜찮은 거야? 죽으면 어떡해?=
=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마! 나도 울 것 같잖아.=
=많이 다치신 거야? 어쩌다가? 아까 또 땅이 울린 게 그것 때문이었어?=
윰투스의 등에는 작은 촉수 생물들이 해암(海巖)에 착생한 따개비 군락처럼 바짝 들러붙어 있었다.
그들은 168명 중 가장 용감한 엔델리온이다. 나머지는 델을 걱정하면서도 자신들 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무서워서.
비록 윰투스와 사제들에게 익숙해졌어도, 그들이 득시글거리는 바깥으로 몸을 노출시키는 건 또 다른 단계의 공포인 모양이다. 자주 봐서 뱀 몇 마리 정도는 태연하게 다룰 수 있게 된 사람도 수천 마리의 뱀 떼가 엉켜 우글거리는 뱀 굴을 보면 기겁하듯이.
누군가 중얼거렸다.
=공주님이 안 계시면··· 우리도 엄마 아빠를 못 만나는 거잖아.=
꼭 그것 때문에만 슬픈 건 아니지만, 역시 그 생각을 떨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윰투스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사실 너희가 엄마 아빠로 생각하는 그 촉수 괴물들은 향후 운이 좋으면 스물 여섯 개의 능선을 자랑하는 소금산맥이 될 테고, 운이 좀 나쁘면 식물도 동물도 아닌 애매한 형태로 고통받을 것이며, 운이 정말 나쁘면 죽어서도 붙잡혀서 고문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생각은 목구멍 아래로 삼키며, 대신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아라. 화신께서 직접 돌보시니 반드시 완치하실 거다. 본래 신의 계획은 어긋나는 일이 없단다.”
아이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학교에서 신 같은 건 없다고 배웠단 말이야.=
그리 투덜거린 순간.
다른 아이들이 기겁하며 즉각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야! 야! 그만! 하지 마! 멈춰!=
=멍청아. 신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말은 윰투스 앞에서 금지라는 거 몰라?=
=그래! 저번처럼 또 몇 시간 동안 우리한테 설교할 거라고!=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윰투스는 그들에게 지긋지긋한 ‘불신지옥론’을 떠들 수 없었다.
신에게 반항하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거짓말로 낙인 찍힌 지 오래인 그 이야기를 이번엔 꺼내지 못한 것이다.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화신이시여!”
사제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교황이 부재중인 지금, 신이 직접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교 등에 붙어 꼼지락대던 아이들도 말미잘 촉수 감추듯 쏙! 완벽하게 숨어버렸다. 아이 특유의 직감 때문인지 그들은 예전부터 민준을 두려워했다.
대표로 신께 아뢴 이는 윰투스였다.
“성모께서는 괜찮으신지요?”
민준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일단 목숨은 건졌다.”
사제들 사이에 안도의 기운이 번졌다.
그들은 오늘 목격한 끔찍한 광경을 생생히 기억했다. 분화가 시작된 화산지대에 떨어진 듯한 풍경. 그야말로 지옥도에 가까웠다.
실로 끔찍하게도, 쩍쩍 갈라지던 것은 땅이 아니라 성모의 살갗이었으며 그 틈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용암이 아니라 그녀의 피였다.
사제들은 총동원되어 신성력을 펼쳤다. 델을 주변으로 황금색 돔이 생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속도를 약간 늦출 수는 있었지만, 반경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엔델리온의 육신이 터지고 조각나는 것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신성력의 섬광 속에서도 두드러지는 한 줄기의 빛이 번뜩였다.
주교들이 시간을 번 사이 민준이 달란트를 태웠던 것이다.
“영혼은 일단 잘 안착되었지만.”
민준은 설명한다. 문제는 델이 준비한 인형의 상태였다.
그것은 여러모로 완벽하지 않았다.
“저 호문쿨루스를 좀 더 손봐야 할 것 같군.”
민준은 사제들에게 몇 가지 귀한 재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대부분은 화물실에 고대 종족이 미리 채워두었던 종류이기에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다.
화신은 그것을 가지고 다시 델에게 돌아갔다.
***
델은 꿈속에서 과거를 보았다.
당시 그녀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한 상태였다.
– 세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시도한 ‘몸갈이 공장 테러 및 구출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족의 끔찍한 만행은 계속 자행되는 중이다.
노동교화형을 끝내고 기억을 되찾은 델은, 왕가의 후계라는 지위를 가지고도 가능한 일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내가 왕이 된다고 한들 뭔가 나아질까? 그 전에, 내가 과연 왕위에 오를 날이 올까?
고대 종족의 후계는 비상 상황을 대비한 백업(Back-up)에 가깝다. 모왕이 노쇠하여 자연사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날까지 기다리며 버티고 싶지도 않았다. 그토록 길게 살기 위해서는 델 역시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니까. 그리고 단언컨대 한 두 명 정도의 희생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럼, 이대로 늙어 죽을 것인가?
– 아니,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미련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카인!’
당시 델은 그가 태초의 종족임은 알게 되었지만, 그의 몸이 의체가 아니라 진짜라는 비밀은 모르는 상태였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의 의지를 굳힌다.
‘내 남은 삶은 그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쓰자.’
일단 위원회의 손아귀에서 그를 탈출시키고 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델은 가용한 재산을 은밀히 움직여 호문쿨루스를 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희망을 한 자락 더 얹었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기원이었다.
– 이 몸을··· 설사 완성하더라도 내가 쓸 일이 있을까?
그녀의 눈앞에는 수형자 시절을 그대로 흉내 낸 여인의 몸이 있었다.
– 헛수고에 불과할지도 몰라. 이 작업은, 추억을 재료로 한 끄적거림에 그칠지도 모르지만.
델은 시도를 멈출 수 없었다.
언젠가 양쪽의 호문쿨루스를 완성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다면.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도망가자고 제안한다면.
카인은 그것을 수락할까?
델은 인형을 바라본다.
그 다음 순간, 그녀의 의식은 인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호문쿨루스를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호문쿨루스 안에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동시에 델의 의식은 더 먼 과거로 향했다.
– 놀라지 말고 차분하게 들어.
배경은 아쉬탈.
둘이 부부의 연을 맺었던 차원.
작은 집의 부엌에 서로 마주 앉아, 여든 번째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던 카인이 느닷없이 말했다.
– 델, 나 오늘 위원회에 그동안 모은 30만 달란트를 납세했어.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델은 되물었다.
‘뭐라고?!’
텔레시아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카인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위원회는 당시 아쉬탈에 파견된 수형자 부대를 축소 개편하려는 계획이었다. 당장 금년부터 점진적으로 수를 줄여 나갈 계획이며, 대상자는 다른 차원으로 이전 배치될 것이다.
카인은 그 누구보다 이 차원에 계속 남고 싶어했다. 델이나 그 중 누구 하나만 재배치되는 경우 부부는 강제로 생이별을 해야 한다. 설사 두 명 다 재배치가 되더라도 함께 이동할 확률 보다 각자 다른 차원으로 배정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앞으로 3년 내, 현재 아쉬탈에 머무는 수형 자 중 9할이 이 차원을 떠나야 한다는 소식은 카인을 절망케 만들었다.
그런데.
– 한 명 당 15만 달란트를 내면 이곳에 여기 남도록 보장해 준다고 했어.
본래는 존재하지 않던 제도였다. 그 의도를 당연히 의심할 법도 했지만, 그는 알면서도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남기 위한 비용은 특별 증여세를 면제하여 30만 달란트.
그리고 당시, 그의 수형자 계좌 잔액은 31만 달란트였다.
설명을 듣던 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30만 달란트를 냈다고?
카인이 웃는다.
– 그래, 널 위한 선물이야.
그녀는 되물었다.
– 동반 유임이 보장된다면, 얼마나 오래? 원하는 만큼 무기한으로?
위원회가 그런 선의를 베풀 리가 없었다.
보장된 기간은 고작 100년이었다.
그럼 그 후에는? 100년 후에도 함께 하려면 또 달란트를 내야 할 터다. 만약 위원회가 그 금액을 인상하면?
– 이건 안 돼.
그녀는 되뇌었다.
이건 근본적인 방법이 아니야.
이런 식이면 카인은 영원히 퇴직금을 모을 수 없다. 얼마인지 아직도 털어놓은 적이 없지만, 터무니없는 액수인 것은 확실하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할 지금 그런 거액을 써 버렸다고?
– 나 때문에 당신 계좌에서 계속 거금이 빠져나가면··· 언젠가는 생존세도 내지 못하고 영혼 소거를 당할 수 있어.
이건 방법이 될 수 없다.
수형자, 델은 결심한다.
– 카인···.
자신은 그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한 점의 미련도 남기지 않게, ‘분리’는 자의적이고도 불가역적이어야 마땅했다.
그렇게 생각을 굳힌 순간.
파앗!
그녀의 시야에 빛이 가득 찼다.
***
“누, 눈을 뜨셨다!”
의식이 현실로 내던져지는 듯한 충격.
델은 신음을 흘렸다.
그 직후, 주변에서 목소리와 정신파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그녀가 의식을 되찾은 사실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제각기 한마디씩 던져댄다.
“성모님!”
“오오, 일어나셨군요!”
“역시 화신께서 계획하시는 일에는 한치의 흠도···.”
=공주님! 공주님! 나 좀 봐요! 나 보여요? 나 여기 있어요!=
=일어났어! 깨어났어! 할머니 안 죽었어!=
델은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 느릿하고 무겁게. 전신의 감각이 혼란스럽게 흘러 넘쳤다.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태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엔델리온의 그것과는.
시야가 몇 번이나 흐릿해졌다 다시 선명해지며 초점이 바뀌었다. 제일 먼저 모함 내 병실의 천장이 보였고, 이어서 엘라후-프라가 교단의 사제들과 엔델리온 아이들이 보였다. 걱정과 기쁨이 뒤엉킨 표정.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에 델은 잠시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녀를 감싸는 신경계의 자극은, 전까지 경험한 적 없는 종류의 색채를 입고 있었다.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살았구나.’
이토록 감각이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몸이 바뀌었기 때문에.
‘영혼이 호문쿨루스로 전이되었어.’
그는 결국 자신을 살려냈다. 미완성의 인형이었음에도, 혼을 담을 그릇으로 개조한 것이다.
델은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기뻐하며 눈물짓는 사람들의 면면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 너머에는.
“······.”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 민준이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여기 모인 다른 누구보다 훨씬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델이 눈을 뜨고 몇 시간 뒤, 엔델리온의 왕이 예고한 것처럼 영계 통신을 통해 위원회의 정식 협상안이 도달했다. 내용은 미리 들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위원회는 참으로 빠르게 아시프-666의 회신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사전에 녹화된 일종의 영상 편지였다. 한자리에 모여 그걸 시청한 위원들은 일순 당황했다.
화면 속 세눈박이 사제들이 병충해에 시달리는 연분홍색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장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게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위원들이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벌레가 우글거리는 껍질이 일그러지며 그 틈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실로 소름끼치는 어조로 한 음절씩 발음된 그것은 카바이트의 고유어였다.
“죽··· 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