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1
31. Princess Run (6)
***
부서진 뼛조각이 사방에 튀고 살점과 뭉개진 뇌수가 후두둑 떨어진다.
그의 머리는 너무도 쉽게 폭발해 버렸다.
‘뭣···!’
쓰러진 마법사의 가슴에서 치익! 소리가 나더니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옷 속에 숨긴 아티팩트가 과부하로 타오른 것이다. 날것의 비린내 사이 살 타는 내가 섞여 들었다.
‘미친!’
남은 둘의 몸속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식은땀이 흘렀다.
마녀협동조합에서 ‘용과 싸우는 미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딱 한 번은 확실하게 카운터를 먹일 수 있는 마도구’임을 증명한 목걸이가 속수무책으로 뚫린 것이다.
그럼, 저 남자는 정말로 용인가?
‘아니, 그럴 리가!’
정체가 뭐든 엄청난 강자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방금 동료의 머리가 어떻게 터져 나갔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민준이 즐겨 쓰는 저주이며, 특정 부위의 체내기압을 급격히 상승시키는 주문임을 그들은 몰랐다.
결과물은 풍선처럼 터져버린 두부(頭部.)
“······!”
얼어붙었던 것도 잠시.
마법사들은 바로 주문을 외웠다. 마도구가 무용지물이니 살 방법은 선공뿐.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손발이 척척 맞았다. 나이 많은 흑마법사가 긴 주문을 외울 동안 옆의 남자가 시간을 번다.
잠깐이나마 민준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은 그가 입을 벌렸다. 이빨이 짐승이나 오크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그대로 팔뚝을 걷어 올리더니.
촤악!
망설임이 없었다. 그 이빨로, 자기 살점을 입안 가득 물어 뜯는다. 가슴팍을 비롯하여 온 몸이 흥건하게 물들고 천장까지 피가 튀었다.
“크으읍!”
위원회도 없던 먼 옛날, 그 시절의 원시적 흑마법은 술사 자신의 고통과 생명력을 바치는 형태였다 한다.
하지만 그 방식을 계속 고집했다가는 주문 몇 번 쓰고 생을 마감할 것이기에, 흑마법 발전의 역사는 술사의 부담을 공물에게 떠넘기는 방법론의 발전과 궤를 함께 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 민준을 제외한 흑마법사가 자기 몸을 일부러 상처 입히는 이유는 하나다. 가장 강력한 흑마법은 원형의 그것, 자기희생적인 마법이기에, 수명을 깎아서라도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것.
후르르르!
마법사가 입에 머금은 살점과 피가 핏빛 불꽃으로 바뀌었다. 몸에 이미 쌓여 있던 흑마력의 몇 배나 되는 힘으로 빚은 저주의 불꽃. 그가 입술 안의 불길을 민준에게 뿜으려는 찰나.
“······!”
그는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불을 입에 담은 채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더니 그 다음은 까맣게 변했다. 눈깔이 뒤집혀서 흰자가 드러나고.
화르륵!
마법사가 입과 귀, 콧구멍을 비롯한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핏빛 불꽃을 토해냈다. 저주가 담긴 불꽃은 술사의 의도대로 적을 공격하는 대신 그의 몸을 태웠다.
민준의 저주가 먼저 덮쳤기 때문이다. 피와 살점에 극도의 인화성을 부여하는 저주가 입 속 불꽃과 만난 결과는 자유분방한 화재였다.
치이이익!
털썩!
머리가 까맣게 탄 마법사가 쓰러진다. 이걸로 셋 중 둘이 손쓸 여유 없이 죽어버렸다. 여기까지 고작 몇 초.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들 중 가장 강한 마법사가 자신이 가진 최고의 주문을 완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화앗!
홀로 남은 흑마법사 어깨 위로 그림자가 휘몰아쳤다. 그것은 요동치며 끓는 증기처럼 흔들렸다.
금세, 허공에서 엉키며 형태를 만든다.
“······.”
민준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법사의 머리 위에 괴물이 나타났다. 상반신만 조형된 검은 소환수. 입가에 흐르는 핏빛 안개가 공기를 물들이고, 흉포한 살의를 담은 시선이 쏟아졌다. 그림자는 묵직한 질량을 얻은 채 근육질의 트롤 같은 거체(巨體)를 과시한다.
비록 땀범벅으로 다리를 후들거렸지만, 흑마법사는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크르르!
그림자 괴물.
마법사라면 모를 수 없다.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가리지 않고 잡아 찢는 반칙에 가까운 소환수.
평생 공을 들인 덕에 이렇게 큼직한 형태로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손바닥 사이즈로 불러도 대학살을 벌일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
이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극한의 물리방어와 영적방어를 함께 펼쳐야 한다. 말 그대로 용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저 침입자는 이대로···.
‘응?’
마법사는 그제서야 위화감을 느꼈다.
공포 때문에 굳었다고 생각했던 민준의 표정에서 이상한 기미가 보였기 때문.
저것은 무서워서 얼어붙었다고 하기에는······.
“?!”
민준의 눈동자에 맺힌 무기질적 빛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지겨움.
그것은 진절머리나는 짜증과 지겨움이었다.
화르르!
민준은 이번에도 주문을 외우지 않았고 제물도 바치지 않았다.
이미 영과 육을 가득 채운 흑마력은 순식간에 어떤 존재를 소환했다.
그의 등 뒤에서 폭죽이 터지듯 검은 폭풍이 분다. 그것은 방향이 뒤집힌 산사태처럼 순식간에 공간을 잠식했다.
“······헉!”
마법사의 허파에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공간이 새카맣게, 지독하게도 검게 물들었다. 공포스러운 인지와 거북한 깨달음이 뒤따랐다.
크르르르!
천장에 머리가 닿고 방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존재.
마법사가 불러낸 소환수와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의 체급차이나 마찬가지였다.
기괴할 정도로 큰 민준의 그림자 괴물을 보며, 흑마법사는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다, 당신은···!”
그제서야 상대가 흑마법사임을 알았다는 사실이 둘 사이 실력차를 입증한다.
끄이이이이익!
흑마법사의 괴물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제는 왜소해 보이기까지 한 그림자는 발작하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려고 했다. 질겁한 몸부림. 그러자 당황한 마법사가 소환수를 향해 외쳤다.
“계, 계약 대로 날 위해 싸우시오! 도망치려 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맞서서···!”
그 장면을 보며 민준은 조소했다. 흑마법으로 불러낸 소환체를 공대하며 어르고 달래려 하니 통제가 잘 안되는 것이 당연했다.
쩔쩔매는 마법사와 대조되게도, 민준은 앞을 향해 성의 없는 턱짓을 한 번 했다.
그 즉시.
솨아악!
주인의 신호를 감지한 훈련된 사냥개처럼, 검은 섬광이 전면으로 달려들었다.
캬아아아악!
굶주린 상어에게 어린 양을 던진 풍경 같았다. 민준의 괴물이 두 손으로 검은 살점을 찢자 결을 따라 갈라졌다. 다음은 절규하는 목덜미를 크게 물어뜯었다. 핏물이 비처럼 내리고 그림자는 묽은 조각이 되어 곳곳에서 팔락거렸다. 작은 괴물은 순식간에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그리고 그 소환체와 연결된 술사는.
“쿨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가 핏덩이를 한 움큼 토한 순간 소환수의 잔해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쿨럭! 크억!”
힘을 잃은 마법사의 어깨 위로 민준의 말이 내려 앉는다.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고저가 미미한 목소리였다.
“그럼, 진실된 대화를 좀 나눠볼까?”
민준은 늘어진 그를 앉히고 묶었다.
오크 소년도 아직 깨지 못했으니 지금 이 건물에서 의식을 유지한 사람은 흑마법사와 민준 단 둘이다.
도용석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와 면담한 남자를 비롯한 다른 조직원들은 건물 곳곳에 싸늘한 시체가 된 채 누워있다.
인권연대의 하위조직이 단 한 명의 손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묶인 흑마법사가 생기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오슬로 학파의 마스터가 대체 왜 인권연대를 적대하는 게요?”
그 눈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을 품고 있었고, 민준은 저 인간우월주의자가 자신의 정체를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가 지금 언급한 자는, 26개국 정부와 여덟 명의 엘더 드래곤이 뒤를 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검거되지 않은 악명 높은 흑마법사다.
“······.”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테오 크리스티안센’으로 오해당한 것은 억울할 만도 했지만 민준은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손가락에서 해피 버그를 부화시켜서 마법사의 콧구멍 안에 쑤셔 넣을 뿐이었다. 평소처럼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택한 것.
그런데.
주르륵!
이번에는 민준이 기대했던 것처럼 손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마법사의 콧구멍에서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미 죽었는지 꼼짝하지 않는 해피 버그가 함께 쓸려 나오는 걸 보며 민준이 혀를 찼다.
‘역시 소사이어티 같은 놈들이랑은 수준이 다르군. 나름 비밀결사라 이건가?’
조직원 뇌 속에 저항 수단을 심어 둔 것이다. 그걸 해체하려면 뇌를 헤집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상대를 죽여야 하니 이 방법은 봉쇄된 것이나 마찬가지.
인상을 찌푸리자 마법사가 클클대며 웃었다. 짧게 숨을 토할 때마다 입가에 피거품이 부글거렸다.
“크큭!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날 죽이시오! 그 벌레는 내게 통하지 않소.”
힘겹게 쿨럭대다 다시 말을 잇는다.
“설마 고문으로 정보를 캐내겠다는 생각은 안 하겠지? 당신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지만 나도 흑마법사라오. 그런 방법으로는 입을 열 수 없지. 헛수고하지 마시오.”
수련 방법의 특성 상 흑마법사가 고통에 익숙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민준도 흑마법사이니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옵션을 배재할 생각은 없었다.
민준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아, 방법이 없네. 이러면 진짜 고문해야겠네.”
“크클! 소용없···.”
“그래, 이것도 네 팔자지 뭐. 하필 머릿속에 그런 걸 심어 놔가지고···. 어떡하냐?”
그렇게 말하는 민준의 목소리에는 마법사가 예상 못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허세나, 공포를 유발하는 수작이라고 보기 힘든 어투였다. 그는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요 1년 간 내가 봤던 가장 불쌍한 양반은 용이거든?”
민준은 오른손에 검은 돌칼을 꺼내 쥐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상대가 알 리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 살에 가까운 양반이 쫓기다가 다른 세계로 튀려고 자세 잡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딱 하루가 어긋나서 잡혀 죽었어. 다구리 맞고 죽었다고. 구백 몇십 년 장수한 드래곤이 딱 하루 차이로 뒤진 거라니까? 머리 아프지?”
마법사는 그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민준은 자신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원하는 이야기를 토해내게 만들 수 있다고.
“그런데··· 아무래도 네가 오늘 갱신하겠다.”
검은 칼을 천천히 들이민다. 담담하게 혀를 차면서.
“차라리 뇌에 벌레 하나 심고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 쯧.”
민준은, 스스로 기억하는 세월만 합해도 흑마법사로 800년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
흑마법사를 고문할 수 있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을 한 명 꼽자면, 그것은 당연히 민준이어야 했다.
“?!”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공포감. 마법사의 눈동자에, 안쓰럽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민준의 표정이 비쳤다. 그 감정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고, 그 사실이 마법사를 더욱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민준의 칼 끝이 늙은 마법사의 피부 위를 지긋이 누른 그 순간.
마법사는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
“네, 여보세요? 저 예민준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민준은 피비린내가 가득한 방 안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젠킨슨의 비서실장.
“원래 이런 식으로 중간보고해가면서 일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더 진행하기 전에 알고 가셔야 할 것 같아서요.”
민준은 오른손으로는 폴더폰을 쥐고 빈 왼손에는 옅은 불꽃을 일으켜서 묻은 피와 기름을 씻어내고 있었다. 아른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설명한다.
결과부터 말하면 이랬다.
마법사는 인권연대에서 젠킨슨에게 수작을 부리려고 계획을 짠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일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상세한 정보도 몰랐다.
수없이 많은 점조직으로 쪼개진 비밀결사 특성상 가담하지 않은 작전의 디테일은 알지 못했던 거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알 상층부의 접촉 정보를 캐내야 했는데, 문제는 이 마법사에게 그럴 권한이 없었다. 그저 위에서 일방적으로 통지하면 그에 따라 움직이는 레벨에 불과했던 것. 반대 방향으로 접촉할 방법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수확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간, 인권연대가 큰 사고 하나 칠 거랍니다.”
정확한 날짜도 방법도 알지 못했지만 마법사는 그 타겟이 누군지는 알았다.
“그 슈탄인 공주 있죠? 며칠 전 입국한 그 외계인이요. 네. 그 여자를 칠 거라고 하더군요. 목적이 납치가 될지 암살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유는 뭐··· 8차 집단이민을 저지하겠다는 명목이구요.”
중요한 것은 인권연대가 이번 작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거물들까지 동원될 예정이라는 부분.
그들 중에는 분명 금고털이에 동원된 장본인도 있을 터다.
“이제 전화드린 이유를 알겠죠?”
이민국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
외계에서 귀빈으로 모신 공주에 대한 테러 첩보가 입수된 상황.
상식적인 수순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공주를 본래 차원으로 즉시 돌려보내는 것이다. 터미널 봉쇄령도 공주 일행에 한해서 예외를 둘 수 있었다. 외계의 VIP이시니.
다만 그렇게 되면 인권연대가 꼬리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목표를 잃게 되는 셈이니까.
“어떻게 하실 겁니까?”
민준은 묻고 있었다.
외계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이대로 돌려보낼 것인지, 아니면 그 손님을 미끼로 삼아서 젠킨슨 재산을 훔쳐간 도둑을 잡는 일에 이용할 것인지.
민준은 이 질문이 블레어의 권한 밖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젠킨슨에게 물어보겠다는 답이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요원님, 죄송하지만 의뢰 내용에 한 가지 추가할 수 있을까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블레어는 바로 원하는 바를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민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는 각오를 단단히 한 모양인 걸?”
수화기를 귀에서 떼자 짙은 혈향 너머로 웅얼거리는 노인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주··· 주여주··· 주여줘······.”
콰직!
이제 쓸모가 없어진 그의 이마에 제례단검을 날려 희망하는 대로 만들어 준 뒤, 민준은 고민했다.
‘괜히 한다고 했나?’
잠깐 더 생각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째 일이 점점 더 커지고 있고, 더군다나 복잡하게 바뀌는 양상이며, 자신 입장에서는 더 귀찮아지는 것 같지만··· 그가 품을 들인 만큼 사후에 철저하게 비용을 청구하면 그만이었다.
민준은 젠킨슨의 달란트 잔고를 걱정하지 않았다.
‘모자라면 빌려서 지불하겠지, 뭐.’
드래곤이라는 종족적 특징이, 다른 세계의 은행 입장에서는 튼튼한 신용의 증거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
“안녕하세요. 예민준 요원님이시죠?”
민준은 삼성역의 호텔 로비에서 드워프 여인과 악수했다. 베르미 공주의 통역을 맡았다는 그녀는 올가라는 이름이었다.
“갑자기 이민국에서 경호 인원을 늘려 주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공주님도 매우 만족하고 계세요. 이 나라 이민국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요원님이시라면서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준은 올가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가 최상층의 버튼을 누르자, 투명한 승강기 벽면 너머로 1층이 빠르게 멀어진다. 그 광경을 보며 민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슈탄인 공주 호위 임무라니. 참··· 별의별 짓을 다 하네.’
블레어가 민준에게 요청한 것은 간단했다. 베르미 공주의 경호를 지금부터라도 맡아 달라는 것.
본래 그가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급이 안 맞는다고 판단하여 젠킨슨이 의뢰하지도 않았던 임무다.
‘외계 VIP를 미끼삼아 적들 앞에 달랑거리며 흔들기에, 지금 경호 수준으로는 마음이 안 놓인다는 거지.’
이민국은 두 가지의 어려운 목표를 모두 달성하고 싶어했다.
베르미 공주를 노리고 인권연대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유인하는 동시에, 공주의 안전을 완벽하게 확보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요원은 자신밖에 없다는 계산을 내린 것이다.
민준은 품 안의 백지수표가 하루하루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경호 대상에게는 비밀로 부친 상태라니.’
젠킨슨과 블레어가 위험한 외줄타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노력한 대가를 받을 테니 손해 볼 일 없었다.
설사 이번 사건 때문에 차원 간 정치적 풍랑이 일더라도 휩쓸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그럴 경우 그가 증오하여 마지 않는 위원회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다. 수형자는 위원회의 소중한 자산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둘은 공주 방 앞에 도착했다. 드워프가 문을 두드린다.
“공주님, 올가입니다. 경호팀에 새로 합류한 요원이 도착했습니다.”
드워프는 카드키를 가져다 댄 뒤 방문을 확 열었다.
“실례합니다.”
올가가 인도하는 대로 민준이 방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베르미 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그녀 뒤에 서 있던 브래들리의 표정이 굳었다. 문을 보며 입을 꿈뻑거린다. ‘···너?!’
그리고 베르미 공주와 민준의 눈이 마주쳤다.
“······.”
그를 본 공주가 숨을 들이마시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
오늘은 공주가 차원 멀미를 다스리기 위해 호텔에만 머물기로 한 마지막 날로, 그녀는 브래들리를 만났을 때와 달리 컨디션을 꽤나 회복한 뒤였다. 따라서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에 있는 수많은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고 비가 막 그친 촉촉한 공기를 만끽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바람이 꽤 부는 날 창문을 연 채 현관 문까지 열었을 때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 공주의 방 안에서도 재현되었다. 바람이 지나갈 통로가 생기자 맞바람이 거세게 분 것이다.
휘이잉!
바람줄기가 현관으로 몰리며 민준의 앞머리가 하늘하늘 흩날렸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만사에 무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캐시는 인생 다 산 노인네 눈 같다고 구박하며 투덜거리지만, 취향이 독특한 이들은 ‘사연 있는 남자’ 같다고 수근거리곤 하는 눈빛이 공주에게 머물렀다. 한편, 아무도 없던 방문 입구에 그가 들어서자 머리 위 센서등이 작동하여 빛을 뿌렸다. 가정집처럼 쨍하고 흰 형광등이 아니라 부드럽고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금색의 무드등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곁에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건넸고, 드워프가 콘크리트 바닥에 철제 선반 끄는 소리를 내며 그 말을 통역했다.
“······.”
그런데, 공주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생각보다 침묵이 길어지자 드워프가 다시 고막 찢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하지만 공주는 입을 아주 약간 벌린 채 멍하니 민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응?’
민준은 방 안에 흐르던 비린내와 다른 독특한 향기가 갑자기 코를 자극하는 걸 느꼈다.
‘잠깐, 이거 뭐야?’
그 정체를 파악한 순간 민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그것은 그의 예민한 코가 오류 없이 잡아낼 수 있는 화학물질 중 하나였다.
‘이 와중에 왜? 근처에 다른 슈탄인 남성이 있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눈에 띄는 악어도, 다른 성별의 개체가 내뿜는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았다.
‘?!’
그제서야, 민준은 어떤 불길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쿵! 쿵! 쿵!
아주 작고도 낮게,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종족의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뛰면 판막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음이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역시나 앞에서 소금기둥처럼 굳어버린 공주.
‘어이, 잠깐만.’
모든 정황증거가 한 가지 추론으로 그를 유도하고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페로몬은 공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