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90
390
# 당한 만큼 받아 낸다
김영철이 묵고 있는 객실은 6층 스위트룸이었다.
욕실이 딸린 침실 하나와 거실 겸 응접실로 쓰는 공간이 있는 2룸 형식으로, 지금은 안전을 위해 거실에 임시 베드를 놓고 수행원 두 명과 함께 머무는 중이다.
쏴아아-.
틀어 놓은 수도꼭지에서 맑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김영철은 상반신을 노출한 모습으로 세면대에 기대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턱에 하얀 면도 크림을 잔뜩 묻히고, 신중하게 손을 한 번 놀릴 때마다 매끈한 살이 드러났다.
그가 면도를 반쯤 끝마쳤을 때쯤 밖에서 수행원이 문을 두드렸다.
“북경에 있는 부부장 동지한테서 전화입니다.”
“이리 줘.”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고 건네받은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전화 바꿨습니다.”
-김 동지, 날세. 갔던 일은 잘 끝났나?
“예. 물건을 가지고 오늘 출발할 예정입니다.”
-할당량은 다 채워졌겠지?
“물론입니다.”
대답을 들은 부부장은 흡족한 듯이 이야기를 했다.
-수고했어. 그럼 며칠 있다가 평양에서 볼 수 있겠군.
“예.”
-참. 그리고 내가 따로 맡긴 건 어떻게 됐나?
슬쩍 욕실 밖에 있는 수행원들의 동정을 살핀 김영철은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전부 다 처분했습니다.”
-잘했어.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하면 미리 이야기해 둔 계좌에다가 입금 시키도록 해. 수행원들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해야 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염려 마십시오.”
-좋아. 실수가 없도록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나중에 보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부부장 동지.”
스마트폰을 귀에서 뗀 김영철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위로 말아 올렸다.
임화룡 대사한테 받은 충성의 자금 말고 침대 옆에는 달러와 유로화 다발이 가득 들어 있는 검은색 헝겊 가방이 두 개나 더 놓여 있었다.
방금 통화를 했던 황정일 부부장이 출발 전에 맡겼던 금괴를 이곳에서 은밀하게 처분한 돈이었다.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39호실이 직접 관리하는 금광에서 나온 걸 황정일 부부장이 일부를 빼돌린 거였다.
금을 비롯해 북한에서 채굴되는 모든 광석은 김씨 일가의 것이기에 발각되면 반역죄로 총살까지 당할 수 있는 중범죄였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공산주의 밑바탕인 배급 체계가 무너지면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을 하게 되자 이런 식으로 딴 주머니를 차는 건 일반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뒤로 빼돌리는 액수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황정일 부부장이 직접 외국으로 가져 나와 처분할 수도 있었으나, 당 서열이 높은 만큼 감시도 심했기에 심복인 김영철한테 일을 대신 맡겼다.
그 대가로 황정일 부부장이 김영철의 뒤를 봐줬는데, 이번에 평양으로 돌아가면 승진을 시켜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호텔 지하 주차장.
넓은 주차장에는 갖가지 차량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평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여기저기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제일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흰색 밴 뒷좌석에 혁권이 선글라스를 쓴 채 앉아 있었다.
하킴과 다른 부하들도 함께 있었지만 다들 입을 다물고 있어 밴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소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혁권이 손으로 만지고 있는 지포라이터였다.
뚜껑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열고 닫기를 반복하는, 특유의 찰칵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딸캉. 딸캉.
마치 초침을 세는 것처럼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이어지던 그 동작은 알아바디가 밴 안으로 몸을 우겨 넣으면서 멈췄다.
“어때?”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 가짜로 붙인 콧수염을 떼어 내면서 알아바디가 그를 보면서 대답했다.
“타깃들은 예상대로 아직 객실에 있고 12시 전에 체크아웃을 한다고 프런트에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한 혁권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2시간 정도 여유가 있군.”
“공항까지 태워다 줄 대사관 직원이 오면 인원이 더 늘어나니까 그 전에 일을 끝내는 것이 나을 겁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호텔 안 경비 상황은?”
“로비에 사설 보안 직원 두 명이 있지만 곤봉과 가스총뿐이라서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각 층마다 복도와 엘리베이터 그리고 비상계단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1층 상황실에서 통제를 하다가 이상이 있으면 바로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경찰서가 두 블록밖에 안 떨어져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신고를 하면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경찰이 호텔에 도착할 겁니다.”
객실로 올라가 일을 끝내는 건 몰라도 안전한 장소까지 탈출하기에는 상당히 빠듯한 시간이었다.
“더 큰 문제는 호텔 앞에 상시적으로 머물고 있는 순찰차입니다. 만약 신고가 들어가면 이들이 바로 객실로 올라올 겁니다.”
“그렇겠지.”
경찰들을 처리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러면 조용히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애초 계획에서 어긋나는 거였다.
지난번에 당했던 걸 되갚아 주려는 거지 인터폴Interpol 적색 수배자 명단에 오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혁권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작전대로 움직여.”
“옛.”
부하들이 짧게 대답을 하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혁권도 여태 손에 쥐고 있던 지포라이터를 주머니에 쑤셔 박은 뒤 일행을 따랐다.
관광객으로 위장한 알아바디는 반팔 셔츠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편한 단화를 신고는 이제 막 싱가폴에 도착한 사람처럼 어색한 발걸음으로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와 로비에 들어섰다.
프런트에 있는 직원이 룸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며 바꿔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젊은 여자 둘을 상대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곁눈으로 확인하고는, 재빨리 로비를 훑어 보안 직원이 있을 위치를 가늠했다.
호텔 유니폼을 입은 직원과 캐주얼한 차림새의 손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검은 슈트를 입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한 자리에 서 있는 사내를 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는 손님들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일부러 찾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구석진 곳에 있었는데,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 회색 문을 항상 시야에 두고 있는 위치였다.
저 직원용 출입구 너머에 통제실이 있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모자를 눌러쓴 알아바디는 마른 입술을 한번 혀로 핥고 자연스럽게 보안 직원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척하다가 보안 직원과 시선이 딱 마주치는 순간, 알아바디는 흥분한 것처럼 빠른 말투로 아랍어를 쏟아 내었다.
일순 움찔해서 당황한 그가 ‘쏘리.’라든가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라며 그나마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말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알아바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더욱 목청을 높였다.
프런트에서는 여전히 앞의 손님 때문에 반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중이었고,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낯선 언어로 지껄여 대는 외국인은 무슨 대책을 내주지 않는 이상 계속 그를 붙잡고 늘어질 기세였다.
손바닥을 펴서 일단 진정하라는 표시를 한 보안 직원은 일단 이 골칫덩이를 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손짓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프런트엔 영어 말고도 다른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으니 그쪽으로 넘겨 버릴 심산이었다.
로비를 가로지르는 보안 직원을 쫓으면서 알아바디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지키고 있는 사람 없이 비어 버린 복도는 침입자에게 환영 인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백성균이 검은색 백 팩을 매고는 직원용 출입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보니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좁은 복도를 따라 걸어가던 백성균은 벽 한쪽에 철제로 만들어진 커다란 컨트롤 박스가 설치되어 있는 걸 보곤 그리로 다가갔다.
다행히 이쪽 구역은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는 사각지대였기에 아무도 백성균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자 만능키를 꺼내서 열쇠를 따고는 바로 컨트롤 박스를 열었다.
그러자 여러 개의 LED 불빛이 반짝이는 전자 장치와 함께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전기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호텔 건물 곳곳에 설치된 CCTV 영상을 통제실로 보내 주는 장치였다.
“제대로 찾았군.”
눈을 반짝이며 양쪽 손을 살짝 비빈 백성균은 백팩에서 신용카드 크기만 한 기폭장치를 꺼내 컨트롤 박스 안에 붙였다.
그러고는 다시 원래대로 컨트롤 박스를 닫고 복도 코너를 돌아가 벽에 등을 기댔다.
그 상태로 원격 컨트롤러를 꺼내 손에 쥐고는 버튼을 눌렀다.
순간 컨트롤 박스에서 불꽃이 튀면서 폭음과 함께 하얀 연기가 새어 나왔다.
파지지직. 펑!
통제실에 있던 보안 직원들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여러 개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신호가 끊기면서 먹통이 되어 버리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이거 왜 이래?”
“기계는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당황한 얼굴로 콘솔을 이리저리 조작하고 있는 보안 직원의 말에 책임자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럼 왜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야! 당장 원인을 찾아서 고쳐놔.”
“예. 옛.”
서슬 퍼런 호통에 보안 직원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다급히 뭐가 잘못됐는지 장비를 점검했다.
-CCTV가 제거됐습니다.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리는 백성균의 목소리에 혁권은 눈에 이채를 띠면서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눌렀다.
“알아바디하고 합류해서 퇴로를 확보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교신을 끝낸 혁권은 고개를 들어 가까이 서 있는 하킴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 차례야.”
그러자 작게 머리를 끄덕인 하킴을 선두로 부하들이 미리 잡아 두고 있던 화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6층 버튼을 누르고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던 문이 닫히자 혁권은 허리춤에서 꺼낸 권총에 소음기를 끼우며 심호흡을 했다.
층수를 나타내는 전광판에 뜬 번호가 연달아 바뀌더니 이내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재빨리 내린 하킴이 주위를 살핀 뒤 안전하다는 수신호를 하자 혁권과 부하들이 밖으로 나갔다.
일을 끝내고 신속하게 탈출하기 위해서 부하 한 명이 컨트롤러를 조작해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켜 놓는 사이에 그는 다른 부하들과 함께 복도 반대편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깔려 있는 붉은색 카펫 덕분에 발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복도 천장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컨트롤 박스를 망가뜨린 후라 통제실에서는 혁권과 부하들의 행동을 전혀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앞서 가던 하킴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멈춰 서서는 턱짓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깁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객실 문에 609호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혁권이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지시를 내렸다.
“시작해.”
하킴이 머리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부하들이 등에 맨 백팩에서 수류탄처럼 생긴 걸 하나씩 꺼내 들었다.
그 역시 언제든지 권총을 쏠 수 있도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하킴이 호텔에서 쓰는 카드키하고 똑같은 걸 손에 들고는 손잡이 밑에 나 있는 흠에다가 찔러 넣었다.
띠딕.
짤막한 기계음 뒤에 철컥하며 문이 열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킴이 객실 문을 당기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어느새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안으로 집어 던졌다.
퍼펑! 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