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33
533
환기를 위해 살짝 열어 둔 창문 틈 사이로 찬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밤이 되니 아무래도 조금 서늘하여 얇은 웃옷을 하나 더 걸친 혁권은 창문을 닫으려 일어섰다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2층 침실에서는 별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전나무 숲 전경이 매우 잘 보였는데, 낮에는 그저 울창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어둠이 내려앉자 하늘에 둥글게 떠 있는 커다란 달과 맞물려 신비로운 풍광을 자아내었다.
어디선가 동물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아무리 도심에서 좀 떨어져 있는 교외라고 해도 그 정도로 야생 짐승이 쉽게 어슬렁거리진 않는지 이따금 새가 날개를 퍼덕거리는 기척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숲을 크게 흔들고 지나가자 나뭇가지에 달린 잎들이 휘청거리며 파도처럼 춤을 추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혁권은 협탁에 올려 두었던 위성전화기를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 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에~ 여보세요.
짧은 신호 끝에 소현의 경쾌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나야.”
‘오랜만이지.’라는 말도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아 면목이 없어진 혁권은 인사를 속으로 삼켰다.
일주일에 한 번도 얼굴을 보기 힘든 연인 관계라니, 이래서야 어디 가서 애인이라고 명함이나 내밀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일 때문이라는 훌륭한 핑계가 있었으나 소현은 아직 20대 초반이고 한창 알콩달콩하게 연애하고 싶을 텐데, 자기 때문에 괜히 참는 건 아닌지 항상 걱정이 됐다.
“좋은 일이라도 있어? 목소리가 밝네.”
-잠깐, 그거 내 거잖아! 아, 치사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건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누군지 모를 상대방에게 너무하다고 툴툴거린 소현은 ‘잠시만요.’ 하고선 조용한데로 자리를 옮기는 듯했다.
-혁권 오빠, 미안해요. 지금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거든요.
SNS에서 유명한 케이크 카페에 왔다며 소현이 자랑했다.
-드라마도 끝났고 모처럼 쉬는 기간이잖아요. 활동할 때는 거의 쫄쫄 굶다시피 하니까 이럴 때만이라도 평소에 먹고 싶었던 걸 먹어 줘야죠.
무려 한 달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며 말하는 목소리에 들뜬 기색이 완연했다.
“그런데 아까 그건 무슨 소리야?”
-그게 있죠, 각자 케이크를 한 종류씩 시켜서 나눠 먹기로 했는데, 치사하게 지수가 내 거에 있던 딸기를 쏙 찍어서 홀랑 가져가지 뭐예요!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입안에 있었다며 소현이 너무하지 않냐고 투덜거렸다.
보이진 않아도 울상을 짓는 표정이 눈에 선해 혁권은 저도 모르게 큭큭 웃어 버렸다.
“딸기는 언제라도 먹을 수 있잖아.”
-여기 딸기는 특별하다고요. 금가루를 뿌려서 장식도 얼마나 예쁘게 되어 있었는데! 아무튼 도연이가 뭘 그런 걸 가지고 싸우냐며 하나 더 시켜 준 덕분에 결국 먹긴 했지만…….
사소한 걸로 싸웠다가 화해했다가 하는 것이 영락없는 여고생들 같았다.
셋이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꼭 저렇게 행동했겠지 싶어서 혁권은 속으로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암튼 저는 잘 먹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데, 혁권 오빠는 어때요?
“나도 괜찮아. 지금은 저녁인데 바깥에 바람이 좀 부네.”
혁권은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등을 떼고 일어서서 장식장에 있는 술을 꺼냈다.
위스키 잔에 얼음을 채우고 술을 따르니 불빛에 황금빛 액체가 반짝였다.
잔을 슬슬 흔들면서 얼음이 서로 맞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혁권은 다시 편하게 자리에 앉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무들이 위로 쭉쭉 뻗은 게 멋진걸. 여긴 한겨울에 와도 풍경이 예쁘겠어.”
-시내에 있는 호텔이 아닌가 보죠?
“조용한 게 좋아서 일부러 좀 떨어진 곳으로 숙소를 골랐어.”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면서도 좀처럼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는지 소현에게서는 별말이 없었다.
대신 가벼운 잡담을 나누고 마지막엔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하라는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끝내가 갑작스레 잠이 몰려왔다.
그렇게 커피를 마셔 대는데도 역시 육체적 피로에는 못 당하는지 눈이 자꾸만 슬슬 감기려고 했다.
같은 시각,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리려는 듯이 싸늘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어두운 숲속에서 혁권이 머물고 있는 별장을 주시하고 있는 인영들이 있었다.
“여기에 있는 것이 확실하겠지.”
짙은 눈썹에 얼굴이 각이 진 게라슈첸코의 말에 가까이 있던 조직원이 얼른 대답을 했다.
“예. 호텔을 나와 저희 눈에서 숨어 보려고 한 모양인데 그래 봤자 손바닥 안이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게라슈첸코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몸을 뒤로 돌려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조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포로는 필요 없다. 싹 다 죽여 버리고 별장은 불태워 버려라.”
“옛.”
족히 서른 명은 넘는 조직원들이 내뱉는 숨소리와 살기가 숲 안을 가득 채웠다.
“좋아. 시작해!”
정면에 위치한 별장을 노려보면서 게라슈첸코가 명령을 내리자 조직원들이 그를 지나쳐 앞으로 움직였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인 총성이 울린 건 혁권이 막 빈 술잔을 내려놓고 침대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타아앙!
“……!”
깜짝 놀란 혁권이 고개를 뒤로 돌리는 것과 동시에 격렬한 총성이 적막에 차 있던 밤공기를 뒤흔들면서 연이어서 울렸다.
쨍그랑!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침실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산산조각 나자 그는 얼른 자세를 낮추고는 바지 뒤춤에 꽂아 둔 글록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서는 벽에 몸을 붙이고 바깥 상황을 살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가운데 경비를 서고 있던 부하들이 습격을 해 온 적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번쩍이는 총구 화염을 보며 혁권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리면서 하킴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보스!”
“여기야.”
그가 권총을 손에 든 채 소리치자 하킴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습격입니다!”
“나도 알아. 그것보다 어디서 온 놈들이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십중팔구 파블로프 조직일 가능성이 큽니다.”
“제길!”
혁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만남을 가진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먼저 습격을 해 오다니 제대로 허를 찔린 격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수先手는 빼앗겼지만 쳐들어온 걸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지.”
별장으로 접근해 오는 시커먼 그림자를 향해 그는 가차 없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그러자 적이 가슴과 허벅지에 핏줄기를 내뿜으면서 섞은 고목나무처럼 그대로 바닥에 쳐 박혔다.
“보스,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나 혼자만 뒷짐을 지고 빠져 있을 수는 없어!”
단호하게 말을 내뱉은 그는 벽에 기대선 채 적을 향해 계속 권총을 쏴 댔다.
물러나 있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에 하킴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반대편 창가에 서서 함께 아군을 지원했다.
타타타탕!
“아악!”
“크흑.”
처음 경비를 서고 있던 인원을 죽이고 별장 돌담을 지나 정원 안으로 밀고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금방 상대를 쓸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대가 곧장 반격을 해 오고 언제 자동소총까지 구해 놨는지 예상보다 강력한 화력에 피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총을 쏘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조직원 한 명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흙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에 게라슈첸코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악을 썼다.
“멍청한 놈들. 뭘 하는 거야? 어서 더 세게 밀어붙여!”
눈을 부라리면서 조직원들을 독려했지만 쏟아지는 총탄에 각자 엄폐해 있는 곳에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게라슈첸코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조금이라도 돌담 위로 몸을 드러내면 여지없이 총탄이 날아와서 목숨을 위협했다.
기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총탄을 낭비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걸 보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제대로 훈련을 받은 것이 확실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쪽이 훨씬 수가 많은데도 제대로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젠장.”
상대를 너무 쉽게 본 것이 패착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쪽이 우세한 데다 안에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만큼 계속 압박을 가하다보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혁권이 아닌 게라슈첸코의 편이었다.
돌담 위로 상체를 살짝 내민 게라슈첸코는 총구 화염을 본 2층 창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서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조직원들을 독려했다.
“계속 쏴서 한 놈도 남겨 놓지 말고 다 죽여 버려라!”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흘러갈수록 열세를 이겨 내지 못하고 조금씩 상대편에 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으아악!”
총탄이 바닥에 맞아 희뿌연 돌가루가 튀자 화단에 엄폐해 있던 사내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옆으로 뒹굴었다.
처음과 달리 날아오는 예광탄 줄기가 눈에 띄게 줄어 있는 걸 확인한 게라슈첸코는 이제야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줄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놈들의 기세가 꺾였다. 자! 공격.”
게라슈첸코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지르면서 한쪽 팔을 흔들어 대자 움츠려 있던 조직원들이 용기를 내 엄폐물 뒤에서 나와 앞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쳇! 막아. 적들이 건물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총을 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함단이 부하들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한계였다.
벌써 절반 가까이가 죽거나 크게 다쳐 전력에서 이탈해 버리는 바람에 총을 쏘고 있는 인원은 다섯이 채 되지 않았다.
폭풍이라도 쓸고 간 것처럼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버린 실내.
그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부하들의 모습에 함단의 입에서 연신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길, 제기랄!”
그런 가운데 적들은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서서히 목을 조여 오듯 본채 건물 가까이 거리를 바짝 좁혀 왔다.
탕! 탕! 탕!
밖으로 튕겨 나온 탄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지만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적을 끝내 맞히지 못했다.
오히려 이쪽을 발견한 적들의 총탄 세려에 방 안 곳곳이 벌집처럼 구멍이 나고 물건들이 부서졌다.
피슝! 퍼퍼퍽.
철컥.
어느새 탄창이 비어 공이가 빈 공간을 치는 쇳소리가 들리자 그는 짧게 혀를 차곤 몸을 뒤로 뺐다.
매캐한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혁권이 새 탄창을 꺼내 권총에 갈아 끼우자 하킴이 창밖을 향해 총을 몇 발 쏘고는 옆에 붙어 섰다.
“틀렸습니다. 늦기 전에 여길 빠져나가야 됩니다.”
“안 돼. 더 버틸 수 있어.”
“머뭇거리다가 적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때는 늦습니다.”
“으음.”
습격을 받았을 때부터 곧장 은신처를 버리고 이동하는 편이 낫다는 것쯤은 혁권도 알았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감정은 다른 법이라,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에 마지못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적들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혁권은 자꾸만 고개를 쳐들려는 호승심을 애써 억누르며 하킴에게 말했다.
“좋아. 오늘 당한 건 이자까지 쳐서 나중에 제대로 갚아 주도록 하지.”
총구를 내린 혁권은 하킴과 함께 몸을 낮춘 자세로 재빨리 침실을 빠져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