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392
391화.
놀라는 라온과 반대로 싱텐 상단주 플라빈 싱텐은 놀라기는커녕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얀 가면의 남자가 ‘성의’를 언급했으니까.
‘그럼 자네의 성의를 한번 알아볼까?’
이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이미 십여 년 넘게 온갖 곳에 ‘성의’를 보이거나 ‘성의’를 받아왔던 플라빈 싱텐에겐 어쭙잖은 소리보다 성의를 표현해 달라는 말이 더 편했다.
서로 척하면 척 아니겠는가?
플라빈은 하얀 가면 남자에게 살갑게 말했다.
“일단 자리에 앉으-”
상단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는 차마 하얀 가면에게 자리에 앉으라 말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를 하다 만 테이블 위.
그리고 갑작스러운 경고음에 놀란 수하가 치우다 만 시체가 흐트러져 있는 의자 하나.
플라빈의 얼굴 위로 난감함이 드리웠다.
“바로 대화를 하기에는 상황이 썩 좋지 못하군요.”
그 순간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하얀 가면의 남자는 플라빈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플라빈 뒤에 서 있던 암살자 심복들이 멈칫했지만, 하얀 가면은 그런 부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플라빈은 하얀 가면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돌렸다.
“의자가 좋군. 비싼 건가 봐?”
플라빈은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그를 쳐다보는 하얀 가면이 보였다.
의자 팔걸이를 여유롭게 두드리며 웃는 하얀 가면의 모습은 플라빈이 여태껏 비굴하게 굴어야 했던 빌어먹을 권력가 놈들을 빼다 박아 있었다.
“네, 비싼 겁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플라빈은 곧바로 하얀 가면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손짓하자, 수하가 황급히 심복의 시체를 치운 의자를 플라빈에게 대령했다.
플라빈은 그 의자에 앉았다.
아직 갓 죽은 이의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플라빈의 열기만큼 뜨겁진 않았기에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건 계약서이고, 이건 남은 잔금을 받을 어음이지.”
하얀 가면의 남자는 아공간 마법 주머니에서 ‘불의 결정’ 거래 계약과 관련된 문서들을 내보였다.
“계약서가 있고, 내 목소리도 기억할 테니 내가 누구인지나 이 계약서가 진짜인지는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플라빈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증명은 필요 없습니다. 카로 왕국에서 제가 뵈었는데, 그걸로 확인이 됩니다.”
그는 살갑게 답하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한 가지. 이 남자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이 비밀 저택을 어떻게 알아내서 침입했냐?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쿵. 쿵. 플라빈은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혹시.”
플라빈과 하얀 가면의 눈이 마주쳤다.
“혹시, 어디까지 닿아 계신지 알 수 있는지요?”
플라빈은 이 남자가 태양신 교단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어디까지 어떻게 갈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플라빈은 하얀 가면 남자의 입가에 맺히는 미소가 보였다.
“어디까지 닿아 있냐라.”
케일은 제 가까이로 의자를 가져와 그를 쳐다보는 플라빈의 눈동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 심복이 방금 죽었건만, 그 의자에 앉아서 새로운 권력을 탐하다니.
-인간! 이놈, 많이 이상하다!
그래, 라온의 말대로 이상하고 못된 놈이다.
적어도 제 사람에게는 잘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케일은 지금 플라빈 상단주가 심복을 아끼든 말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눈앞의 상단주를 탈탈 털어먹을 작정이었다.
300억?
왜 그걸로 끝내겠는가?
이놈이 로운 왕국 기예르 영지에서 벌인 인신매매 짓은?
지은 죄가 큰 놈을 봐줄 필요는 없었다.
케일은 저를 동아줄처럼 바라보는 놈에게 그가 원하는 바를 말해주기로 했다.
“내 위치는.”
플라빈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전 교황이 숨겨둔 보물의 위치를 알 정도?”
역시!
플라빈은 그 대답에 충분히 만족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플라빈 상단주는 마법 폭탄 테러로 죽은 전대 교황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위선자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가 자신이 바친 뇌물을 남들이 다 볼 장소에 숨겨두겠는가?
아주 은밀한 곳에, 아주 극소수만이 알아챌 수 있을 만한 곳에 숨겨두었을 것이다.
‘이 하얀 가면이 최소 교황의 비밀 장소에 접근해 물건을 수월하게 빼돌릴 만큼의 위치에 있다는 말이지.’
그렇기에 플라빈은 이 남자에게 존댓말을 하며 극진한 예를 표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군.’
반면 플라빈의 마음속에 작은 실망감도 일어났다.
하얀 가면의 남자가 꽤 높은 위치인 것은 맞았으나, 남쪽 연금술 탑과 태양신 교단 둘을 모두 노리거나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작정이었던 플라빈의 욕망을 채워주기에는 한 가지가 부족 했다.
이를 눈앞의 하얀 가면도 알아챘을까.
“실망한 것 같군.”
“네? 아, 아닙니다.”
“아니긴.”
여유롭게 웃는 하얀 가면에 플라빈은 심기를 거스른 것인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직 내 말은 안 끝났어.”
하지만 하얀 가면은 플라빈의 생각을 뛰어넘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면, 자네가 태양신의 대리자를 만날 수 있을 정도?”
뭐?
순간 플라빈 상단주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나 싶었다. 놀라움이 일었지만 그는 최대한 마음을 억눌렀다.
태양신의 대리자.
지금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이는 오로지 단 한 명이었다.
그는 결국 다시 한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리자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하얀 가면은 그에게 확신을 안겨주었다.
“음, 대리자보다는 모고르의 새로운 빛이라고 하면 되려나?”
모고르의 새로운 빛이자 태양신의 대리자. 이를 가리키는 이는 단 한 사람이었다.
성자 잭.
태양신 교단의 새로운 교황으로 거의 내정된 사람이었다.
즉, 차기 태양신 교단 권력의 중심을 뜻했다.
‘성자 잭을 만날 수가 있다고? 내가? 이 남자가 움직이면?’
플라빈은 마음 같아서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왜냐고?
자신이 잡은 줄이 황금으로 된 줄이었으니까.
“변함없는 마음을 비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태양신 교단도 전대 교황 아래에서의 태양신 교단과 비슷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결국 한번 부패한 단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 플라빈 상단주. 자네는 성의만 보이면 돼.”
케일은 제 말을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상인에게 당근을 많이 던져줄 작정이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케일은 상단주를 성자 잭 앞에 정말로 데려다줄 것이다.
벌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아마 성자 잭 앞에 서는 순간이 플라빈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때일 것이다.
“어떤 성의를 보이면 되겠습니까?”
이미 플라빈에게 케일이 내보인 계약서와 어음은 중요치 않았다. 저 금액이 아니라, 이제부터 보일 성의가 진짜였다.
“내가 말이야.”
역시!
플라빈은 곧바로 입을 여는 하얀 가면을 보며 그가 원하는 뇌물이 있음을 파악했다.
이런 부패한 자를 다루는 것쯤이야 플라빈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아직 태양신 교단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고, 새 교황의 즉위식도 치르지 않았는데 뇌물부터 챙기다니.’
플라빈은 속으로는 하얀 가면을 비웃으며 공손하게 하얀 가면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하얀 가면이 말했다.
“지금 150억 카운드의 마정석이 필요해.”
플라빈의 몸이 멈칫했다.
150억 카운드의 마정석.
그것에도 놀랐지만 더 놀란 부분이 있었다.
“지금 말입니까?”
한밤중엔 그 정도의 마정석을 구할 수 없었다. 수도 안, 제국 곳곳에서 마정석을 가져오려면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한다고 해도 하루 정도는 필요했다.
“왜? 불가능해? 시간 늘려줘?”
케일이 툭 던진 말에 플라빈은 바로 반응했다.
“그래주시면 저야-”
“그럼 내일까지 200억 카운드의 마정석.”
그러나 이어진 말에 플라빈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루가 늘어나면 그 대가는 50억 카운드였다.
그는 하얀 가면 속 케일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온몸을 옥죄는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고대의 힘, 지배하는 아우라가 플라빈을 덮쳤다.
상단주는 여전히 여유 만만한 하얀 가면만이 보였다.
“내일도 힘들다면, 모레는 300억 카운드의 마정석이다.”
다시 하루가 늘면 100억이 더 늘어났다.
“어때?”
플라빈은 하얀 가면의 셈법에 숨이 턱 막혀왔다. 그는 깨달았다.
‘…그냥 뇌물만 바라는 만만한 놈이 아니야!’
그 사실을 알아채자, 플라빈은 이 황금 줄에 대한 탐욕이 더욱더 일었다.
그 순간, 케일은 부드러이 플라빈에게 말했다.
“하지만 난 자네가 꽤 마음에 들어. 왜냐면 살길을 제대로 탈 줄 아는 자니까.”
살길은 얼어 죽을.
탈탈 털리고 가시밭길이 열릴 거다.
케일은 털어먹을 놈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내일까지 150억 카운드의 마정석을 준비해 둬.”
“가, 감사합니다.”
플라빈은 절로 감사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이자의 분위기는 고압적이었으며 거부하기 힘들었다. 더불어 신뢰감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래, 내일 내 수하가 받으러 올 테니 건네주면 돼.”
딱!
케일의 손가락이 맞부딪치는 순간, 테라스 창 밖에서 검은 가면에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나타났다.
마법으로 변장한 최한이었다.
-인간아! 내가 최한한테 연기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다! 난 똑똑해서 최한 연기하면 안 되는 거 안다!
역시 용은 똑똑했다.
케일은 최한을 쳐다보며 침을 삼키는 플라빈을 바라봤다.
플라빈은 창밖 테라스에 홀연히 나타난 검은 가면을 보며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왜냐면 자신이 기척을 못 느끼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의 심복인 암살자들도 저 검은 가면의 존재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플라빈은 하얀 가면이 가진 무력도 엄청남을 깨닫자, 두려움과 욕망이 들불처럼 일었다. 그런 그에게 케일은 최고의 당근을 하사해 주었다.
“그리고 2주 뒤, 자네가 모고르의 새로운 빛을 만나뵐 수 있게 해주지.”
플라빈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성자 잭을 2주 뒤에 만날 수 있다!
그러면 플라빈 자신은 최고 상단의 상단주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인이라면 알겠지?”
그는 하얀 가면의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성의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지.”
케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테라스 창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플라빈은 그를 배웅하려다가 케일의 제지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달캉.
테라스 창이 잠겼다.
케일은 검은 가면의 최한과 함께 곧바로 테라스 난간을 밟고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플라빈은 그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상단주님.”
암살자의 부름에 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테라스 밖을 확인해 봐.”
심복 암살자들이 곧바로 테라스 밖을 확인한 후 아무도 없다고 보고했다. 플라빈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플라빈의 입꼬리가 한없이 위로 올라갔다.
그는 마침내 목소리를 높여 심복들에게 지시했다.
“당장 마정석을 있는 대로 모아와! 내일까지 150억 카운드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아야 돼! 아니, 2주 동안 타국에서라도 구해 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남쪽 연금술 탑은 지금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고 더 가까워지는 것은 피해야 해.”
왜냐면 그에겐 태양신 교단이라는 새로운 떠오르는 힘이 존재했으니까.
플라빈 싱텐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겐 더 이상 식은 저녁 식탁 음식들도, 심복의 시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이야, 대단한데?”
다시 황태자궁으로 돌아온 케일은 용병왕 버드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케일을 따라 플라빈 상단주를 보고 왔던 버드는 술을 마시며 연신 감탄을 흘려댔다.
“플라빈 싱텐은 본인이 2주 뒤에 죽으러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돈을 있는 대로 모아 바치면서 신나게 따라갈 거 아냐? 진짜, 대단해.”
버드 옆에 있던 라온이 날개를 파닥이며 자신만만한 포즈를 취했다.
“용병왕아! 우리 대단한 거 이제 알았나? 난 위대한 라온 미르다!”
“네, 역시 라온 미르 님은 대단하십니다! 크하하하하!”
“히히히!”
술주정뱅이와 어린 용이 뭐라 하든 말든, 케일은 묘한 얼굴로 아직 마법을 풀지 않은 제 붉은 머리칼을 매만지는 최한에게 말했다.
“내일 이 시간에 버드와 함께 가서 마정석을 받아와,”
“네, 케일 님.”
케일은 최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온에게 손짓했다.
달칵.
동시에 침실의 문이 열리며 메리와 로잘린이 들어섰다. 로잘린의 손에는 여러 문서가 들려 있었다.
라온은 테이블 위에 놓인 영상 통신구를 향해 마나를 뿌렸다.
“인간! 연결한다!”
우우우웅.
영상 통신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곧 통신구 위로 화면이 나타나며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드디어.’
그 광경을 버드가 기대 어린 눈동자로 바라봤다.
영상 통신구 화면에 백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클로페 세카. 드디어 북부 수호 기사를 보게 되었군.’
버드는 케일을 따라 서대륙으로 건너와 유명한 인물들을 만났고, 지금 또다시 유명한 인물을 보게 되었다.
클로페 세카.
작년부터 떠오른 로운 왕국 출신들과 달리 오래전부터 유명했던 북부의 수호 기사.
케일과의 싸움에서 패해 휠체어를 타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 순간, 버드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됐다.
그리고 클로페 세카와 케일의 눈동자가 마주한 순간.
-오, 케일 님.
버드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클로페 세카는, 백발의 고결해 보이는 남자는 두 손을 맞잡은 채 환한 미소와 함께 케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케일 님, 그간 케일 님께서 동서대륙에서 이룩하신 영광스러운 전설을 들어왔습니다.
뭐야?
버드는 혼란스러웠다.
클로페 세카. 분명 그가 맞는 것 같은데,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그 순간 버드는 케일의 입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하아.”
케일은 한숨을 내쉬었고.
“역시! 여전히 맛 갔다!”
라온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버드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클로페 세카는 기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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