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394
393화.
케일은 무시당하거나 말거나 걸음을 옮겨 근처 의자에 앉았다.
“앉으시죠.”
그리고 로잘린에게 다른 의자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왕세자야! 내가 여기로 온다고 했다! 마지막 영상 통신구 연결했었던 좌표로 왔다!”
“…그러셨습니까.”
알베르는 라온이 위풍당당하게 외치는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 분 전. 갑자기 케일에게서 연락이 와 침실로 온다고 했을 때, 알베르는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했었다.
하지만 이어진 용건을 듣는 순간, 그는 얼른 케일에게 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곧 올 거야.”
누가 여기로 오는지에 대해서 묻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저하, 이 쿠키 맛있는데요?”
테이블 위 바구니에 있는 쿠키를 오독오독 먹는 케일의 표정은 편안했다. 꼭 제집에 온 것 같은 태평스러움이었다.
“로잘린 씨도 드세요. 맛있네요.”
“괜찮아요, 공자.”
“아니면 차라도 드실래요?”
“음.”
로잘린이 알베르를 힐끗 쳐다봤다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좋죠.”
“…잠시만 기다리시죠.”
한숨과 함께, 알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한편에 마련된 찬장으로 향했다. 그 아래에는 간단한 마법 조리 기구들이 있었다.
늘 늦게까지 일하는 알베르가 긴 밤을 멀쩡히 보내기 위해서는 차가 제격이었다. 찬장에는 꽤 많은 차들이 있었고, 알베르는 능숙하게 찻주전자를 불에 올리며 차를 우려낼 물을 끓였다.
“익숙하시네요.”
로잘린이 왕세자가 직접 차를 끓이는 것도, 침실에 이런 물건들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모두 의외라는 듯 말하자 알베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차를 좋아해서 많이 끓여 마셨죠.”
아.
로잘린은 튀어나오려는 탄식을 삼켰다.
왕세자 알베르 크로스만. 그는 유복하다고 평하기에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를 잃고 홀로 궁에서 자랐을 알베르 크로스만에겐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줄 사람이 겉으로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물론 지금에야 타샤를 비롯한 다크엘프들이 알베르를 뒤에서 도와줬다고 하지만, 그래도 알베르 왕세자는 대외적으로는 홀로 자라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어릴 때 본인이 직접 해야 할 일이 꽤 많았을 거야.’
어쩌면 알베르는 로잘린의 생각 이상으로 고생하며 컸을지도 몰랐다.
겉모습은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살았을 법한 외양이었지만, 로잘린은 이 또한 자신의 편견임을 알았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벌써부터 저하께서 끓여주실 차가 기대되네요.”
“뭐, 변변찮은 솜씨입니다.”
어색한 미소로 대답하는 알베르의 뒤를 이어 케일과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저도 한 잔요.”
“왕세자야! 주스는 없나?”
어이구야.
알베르는 머리가 아파왔다.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잔을 두 개 더 꺼냈다.
그리고 냉장 마법이 되어 있는 상자에서 사과 주스를 꺼내 잔 하나에 따랐다.
“오오! 왕세자야, 역시 넌 좋은 왕세자다! 나는 사과 좋아한다! 특히 사과 파이 최고다!”
“…사과 파이도 드릴까요?”
“나한테 많다! 내가 준다!”
알베르는 앞발로 주스 잔을 든 채 케일 옆으로 날아가 의자에 내려앉더니 주스 잔을 홀짝이는 라온을 그냥 한번 쳐다보고는 찻주전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라온은 마법으로 아공간에서 사과 파이를 꺼내어 테이블 위 쿠키 바구니에 가득 채워놓았다.
“인간아! 사과 파이 많이 먹어라!”
“어.”
케일은 사과 파이 한 조각을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
로잘린은 그런 케일과 알베르를 가만히 바라봤다.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찻주전자를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에서 알베르 왕세자의 고뇌가 느껴졌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떠난 브렉 왕국을 떠올렸다.
그녀가 걷어찬 자리를 맡게 된 동생.
동생의 뒷모습도 알베르와 비슷하지 않을까?
현재 서대륙에서 정세를 조금 안다는 왕국 주요 수뇌부들은 고민과 불안감이 컸다.
특히 하얀 별의 존재를 아는 왕국들은 더욱더 그러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무서웠으니까.
한 나라를 짊어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케일 공자도 그렇겠지.’
로잘린이 보기에 지금 가장 많이 괴로울 이는 케일 헤니투스였다. 그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할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간의 여유 동안 그저 멍하니 사과 파이를 먹어대는 케일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술을 많이 먹어 망나니라고 소문났던 이가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그렇다고 무슨 취미 생활이 있는 것도, 노는 것도 아니고.
바쁘게 일하다가 잠깐 여유가 생기면 침대 위에서 그냥 먹고 자고 쉬고.
로잘린은 괜히 쿠키 바구니를 케일 앞으로 밀어주었다.
탁.
그런 그녀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감사합니다, 저하.”
“아닙니다.”
알베르는 로잘린에게 별것 아니라는 듯 손짓해 보이곤 남은 차 한 잔을 케일 앞에 놓으며 로잘린과 케일 사이, 상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툭 던지듯 말했다.
“멍 때리냐?”
“네.”
단호하게 답한 케일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좋은데?’
케일은 짱돌 저택에서 쉬게 되면 테이블 위에는 항상 쿠키로 가득 찬 바구니를 놓고, 이 찻잎도 왕세자한테서 털어와 비크로스나 론에게 줘야겠다 마음먹었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똑.
작게 침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라온이 서서히 투명화를 한 후 알베르의 침대로 갔다. 폭. 침대 한쪽이 눌렸지만, 잘 보이지는 않았다.
“들어와.”
알베르의 말에 침실 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러자 알베르의 심복 중 하나인 다크엘프가 인간화한 채 두 사람을 방 안으로 들였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낯선 분도 계시고, 오랜만에 뵙는 분도 계시는군요.”
쾌활하게 인사한 이는 케이지였다.
‘영웅의 탄생’에서는 미친 신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그저 케이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고르 제국에서 태양신 쌍둥이와 헤어진 후, 다시 친우 테일러의 집에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차분하게 인사한 이는 테일러 스텐이었다.
스텐 후작가의 다리를 다친 장남. 버림받았던 후계자는 다리가 나은 후, 이제 로운 왕국 서북부 귀족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케일 공자님.”
테일러 스텐은 케일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이제는 후작이 되었음에도 케일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케일은 그가 내민 손을 흔쾌히 맞잡았다.
고래족 위티라와 영상통신을 하고 난 후, 케일은 로운 왕국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영상통신을 연결했다.
그중에 알베르, 케이지, 테일러가 있었다.
“다들 앉지.”
알베르가 상석에 앉았고, 다른 이들도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테일러 스텐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뵈어서 정말 반갑지만, 저에게 이리 갑자기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시선이 케일에게로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놀라움, 반가움, 동경, 기쁨.
꽤 긍정적인 감정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리를 고치기 위해 친우 케이지와 함께 로운 왕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케일을 만났고, 그 뒤로 모든 것들이 잘 풀렸다.
케일은 그에게 행운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하나의 롤모델로 삼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테일러는 오늘 기꺼이 왕세자의 침실에 방문했다.
“갑자기 연락을 해서 놀라셨습니까?”
케일의 물음에 테일러는 씨익 웃어 보였다.
유약하지만 굳건해 보이는 인상은 여전했다.
“네, 조금 놀랐습니다. 그것도 고대의 힘 관련으로 연락이 올 줄 몰랐습니다.”
케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금빛 팽이채를 손에 넣은 바람섬.
검은 신전의 천장 벽화를 보고 고대 하얀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때 케일은 현재 고대의 힘에 대해서 가장 해박한 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곧바로 떠오른 이가 테일러 스텐이었다.
테일러는 제 무릎을 매만졌다.
“제가 고대의 힘과 고대에 대한 연구를 꽤 했죠. 특히 고대의 힘에 관해서만큼은 로운 왕국 안에서 제가 제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저한테 바위의 수호자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그때 수도에 함께 왔었지요.”
알베르는 손에 턱을 괸 채 케일과 테일러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참으로 온화한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에 빠져들려는 찰나, 그는 파문당한 신관 케이지가 품이 넓은 소매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내 들려다가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술잔?’
그는 본인이 제대로 보았나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을 오래 품고 있을 틈이 없었다.
테일러의 차분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짜 고대 문서를 위조해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케일은 미소를 그렸다.
“안 되겠습니까?”
“불법입니다.”
테일러는 유약하지만 강단 있는 눈동자로 케일을 직시했다.
“하지만 해보겠습니다.”
알베르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왕실 안에서 귀족들이 불법 소리를 잘도 해대는군.”
그는 케일과 테일러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반대한다는 소리는 아니고.”
케일은 그런 알베르를 불경스럽지 않게 외면하고는 테일러에게 이어 말했다.
“스텐 후작님은 고대의 문서가 어떤 형태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겁니다.”
고대의 힘에 대한 기록이 남겨진 서적이 얼마나 낡았고 어떤 종이 질감인지, 어떤 형식으로 기록되는지.
테일러는 그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수준급이었다.
다들 곁다리 힘이라 관심을 두지 않았던 고대의 힘만을 애타게 찾고 연구하던 이였으니까.
“제가 그 고대 문서에 무엇을 남기면 됩니까?”
테일러의 물음에 케일은 안주머니에서 문서를 하나 꺼내 들었다.
테일러는 케일이 준 문서를 펼쳐 들었다.
“…이건?”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문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는 케일을 보며 물었다.
“이건 무슨 글자입니까?”
총 스무 장가량의 얇은 문서.
각각의 페이지는 절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테일러의 손가락이 페이지 하단으로 향했다.
“이건 고대부터 쓰이던 서대륙의 공용어인데.”
손가락이 서서히 위로 움직였다.
“이 위에, 상단에 적힌 글자들은 처음 보는 문자입니다.”
케일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문서는 케일, 그리고 최한이 함께 만들었다.
각각의 페이지 상단에는 한글이, 하단에는 서대륙 공용어가 적혀 있었다.
테일러는 대답해 주지 않고 그저 웃는 케일의 모습에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문서의 첫 번째 페이지 하단.
알 수 없는 언어 아래에 서대륙 공용어로 적힌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네란 베로우.
테일러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공자, 이자가 누굽니까?”
“글쎄요.”
케일은 이번에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그의 쪽으로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짜이지만, 우리 외의 이들에게는 진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테일러는 그 말에 더 이상 문서 내용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안 그는 문서를 잘 갈무리해 안주머니에 넣었다.
“오로지 이 자리의 사람들만이 진실을 알 겁니다.”
테일러의 확답에 케일의 미소가 만족스럽게 변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케일은 테일러의 물음에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로운 왕국 내 고대의 힘에 대한 자료들이 필요합니다. 자세할 필요는 없고, 간략하게 요약된 전설이면 좋겠습니다만.”
“음, 로운 왕국 내라.”
툭. 툭.
제 무릎을 쓰다듬던 테일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기한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습니까?”
“한두 달 안으로 끝나면 제일 좋습니다.”
“그러면 한번 해보죠.”
테일러는 시원하게 답했고, 케일은 고맙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이내 시선을 옮겼다. 그 자리엔 소매에 손을 넣은 채 애매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케이지가 있었다.
“케이지 씨?”
“크흠, 공자님. 술 안 당기십니까?”
“괜찮습니다.”
케일의 즉답에 케이지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케이지야! 요새 버드라고 술 엄청 좋아하는 녀석 있다! 위대한 라온 미르가 다음에 소개시켜 준다!
테일러 때문에 숨어 있던 라온의 마법 음성에 케이지의 표정이 삽시간에 환해졌다.
케일은 갑자기 밝아진 표정에 괜히 떨떠름해졌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케이지 씨, 가능하다면-”
“왜요? 같이 가자고요? 아니면 물을 게 있으니 가능하면 대답해 달라고요? 죽음의 맹세와 관련되었다고요?”
“네? 아, 뭐. 네, 맞습니다. 그걸 어떻게?”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케일에게 케이지는 씨익 웃어 보였다.
“공자님, 제가 요 며칠 사이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는데 말이죠.”
좀 뜸하더니, 요즘 들어 자꾸 꿈에 죽음의 신이 찾아왔다.
파문당했지만 여전히 죽음의 신이 아끼며 능력을 거두지 않은 신관, 케이지는 며칠 내내 죽음의 신에게 시달렸다.
“꿈에서 말하더군요. 공자가 나를 찾아올 거라고. 그래서 천 년 전의 맹세에 대해 물을 것이라고요.”
케일의 표정이 굳어졌다.
맞다.
그녀의 말대로 케일은 로드 쉐리트가 죽음의 신을 통해서 드래곤 슬레이어와 했다는 맹세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죽음의 신이 환생이라는 저주를 내리는 것이 가능할까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저주를 내렸다면 거두는 것 또한 할 수 있지 않을까 묻고 싶었다.
“꿈에서 말했습니다.”
케이지는 소매 안에 손을 넣었다. 알베르가 다시 멈칫했지만 어느 누구도 눈치 못 챈 채 다들 케이지의 소매에서 빠져나오는 손을 바라봤다.
“공자님을 다시 만나면 이 그림을 건네라고요.”
돌돌 접힌 종이 한 장이 케이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이 책도.”
검은 책도 케이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케일이 모고르 제국에서 찾아냈던 죽음의 신 신물.
신관 케이지의 눈에는 오로지 한 문장으로만 가득 찬 책.
그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죽음을 죽이는 방법이 궁금한가?”
읊조림을 끝낸 그녀의 눈동자가 케일을 향했다.
“이 책의 내용이죠. 꿈에서 이 두 가지를 넘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요.”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케일은 케이지의 손에 들린 검은 책과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저걸 받을까, 말까.
하지만 받아야 할 때였다.
케일은 케이지의 손에 들린 두 가지를 넘겨받았다.
이를 넘겨받는 순간, 케이지의 입이 열렸다.
“종이에 새겨진 것은 문자인지, 그림인지 사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케이지는 꿈에서 본 그림을 그대로 종이에 새겼다.
“다만 공자님, 당신 혼자 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보여주는 순간, 종이는 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무슨 그런.”
로잘린이 살짝 불안을 담아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케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구석에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혼자 보라고 했으니까요.”
“뭐?”
알베르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넌 그게 뭐인 줄 알고 혼자 구석에 가서 열어봐?”
“뭐 어때요?”
케일은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알베르의 말을 넘기고 침실 구석으로 향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인간아… 주위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나도 가면 안 되겠지? 알았다, 안 간다. 하지만 말해줘야 한다!
라온의 말에 일단 답하지 않은 채, 케일은 방구석으로 가 벽을 보며 접힌 종이를 펼쳐 들었다.
종이는 펼쳐봤자 케일 손바닥만 했다.
그곳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그림이 아니었다.
문자였다.
이 세계의 글자는 아니었다.
한글도 아니었다.
최한도,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할 글자였다.
사실 케일도 모르는 글자였다.
하지만 케일은 이것이 글자임을 알았다.
그냥 읽혔다.
글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것을 케일은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제기랄.
그리고 다음 문장.
아니, 그건 문장이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지금도 1초씩 줄어드는 시간.
알 수 없는 문자였지만, 시간으로 읽혔다.
1초.
계속 1초씩 줄어들었다.
시간이 줄어들어 갔다.
케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사이에도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 몇 주, 몇 달 넘게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최정수와 최한의 생일이 같다고?
케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케일은 생각한 적이 있었다.
최정건, 최한, 최정수는 한 집안 사람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째서 최정건, 최한 다음에 최정수가 아니고 자신이었을까?
왜 하필 내가 왔을까?
죽음의 신이 남긴 말이 케일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케일은 동료들이 떠났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기록이 떠올랐다.
잊으려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기록이 그의 뇌를 뒤덮었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