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748
외전 4. 눈이 오는데? 맞다! 꽃도 핀다! 2
그 시각, 케일은 라온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진심인가 보네.”
케일은 다 읽은 동화책 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동화책을 가져다준 온이 케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온은 눈이 마주치자 케일의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중얼거렸다.
다 들리게.
“홍이 눈을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피식.
케일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고양이 모습의 온은 괜히 케일의 종아리를 몇 번 툭툭 아프지 않게 때렸다.
“누나!”
그때, 방 밖으로 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은 침실 밖으로 나서기 전, 케일의 얼굴을 한번 확인하고는 안심했다는 듯 우아한 걸음으로 문밖으로 향했다.
“재밌을 것 같은데.”
그 한마디를 남기고서.
“…뭐가 재밌단 거야?”
홀로 남은 케일은 상당히 떨떠름하고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온이 나가버린 자리를 쳐다봤으나, 대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케일은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뭐, 눈이 오면 그때 생각하면 되겠지.”
사실 나가버린 온도 케일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홍을 따라 막내 라온을 찾아간 순간, 멈칫하고야 말았다.
“메리야, 미안하다.”
라온이 메리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혼자 가면 됩니다.”
“오늘 숲 탐방을 하자고 약속했는데,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 있다.”
“알겠습니다, 라온 님. 그런데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될까요?”
메리와 라온에게로 다가오던 온과 홍도 의아하다는 듯 라온을 쳐다봤다. 라온은 메리와 함께 어둠의 숲을 돌아다니며 신기한 것을 줍는 게 취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걸 거절하다니, 처음 보는 일이었다.
“히.”
라온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위대하다.”
그 말과 함께 라온은 한마디를 더 남겼다.
“기대해라.”
그러고는 메리는 물론이거니와 온, 홍에게 더 이상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고 홀로 저택 지하로 향했다.
“궁금한데!”
“저도 궁금합니다.”
홍과 메리가 궁금해하며 라온의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차마 따라가지는 못했다. 라온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저기는 실험실인데…….”
저택 지하에 마련된 로잘린의 연구실로 향하는 라온의 파닥이는 날개를, 오로지 온만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사이 인간 모습의 홍이 메리에게 다가가 슬쩍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랑 해도 되는데-”
“좋습니다.”
메리가 조금의 틈도 없이 답하며 온을 바라보았다. 온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누나, 그럼 우리 둘이 다녀올게!”
홍이 메리와 함께 어둠의 숲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론이 있을 곳이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 * *
라온은 스스로가 아주 똑똑하고 영리한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로잘린에게 배운 글도 순식간에 다 습득하였으며, 마나를 구속하는 족쇄가 사라지자마자 마법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모두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라온 님이 말씀하신 눈은, 음, 조금 어렵네요.’
라온이 원하는 첫눈에 대해 설명했을 때 로잘린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난색을 표했다.
“차갑지만 따뜻해야 하고.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폭신해야 한다. 하지만 단단해야 하기도 한다.”
라온은 중얼거리며 주변의 마나를 움직였다.
‘로잘린아, 어려워도 말해달라! 나는 위대한 용이다! 다 잘 배우고 안다!’
‘음.’
그 순간, 라온은 가끔씩 최한, 론이 저를 보고 짓는 미소를 로잘린이 똑같이 짓는 것을 보았다. 온도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라온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케일은 저런 미소 대신 다른 걸 가끔씩 했다.
‘역시 위대한 4살 용이네.’
무심한 얼굴로 그렇게 툭툭 내뱉었다.
그럴 때마다 라온은 괜스레 어깨가 으쓱였다.
“맞다. 나는 위대한 4살이다!”
라온은 히죽 웃으며 로잘린이 오랜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라온 님, 아마 라온 님이 무엇을 만드시든 그건 라온 님이 원하는 첫눈이 되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역시 똑똑한 로잘린은 뭘 안다.”
히히. 라온은 웃음을 흘리며 양피지에 크게 글자를 써 연구실 문 앞에 붙이고는 문을 꽁꽁 잠갔다.
그리고 실험에 들어갔다.
휘이이–
로잘린의 공부 장소를 망가뜨리면 안 되기에 아주 얕은 바람이 마나를 머금은 채 라온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라온은 눈을 감았다.
깜깜하지만, 하나도 어둡지 않았다.
동굴을 빠져나와 보았던 별빛처럼.
그렇게 빛나는 눈이 라온이 상상하는 어둠 속에서 내리고 있었다.
사아아—
작은 하얀 알갱이가 마나 바람 사이에 하나둘 나타나며 휘몰아쳤다.
라온은 눈을 떴다. 검푸른 눈동자가 기대를 한가득 머금은 채 반짝였다.
“흐!”
케일을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라온은 마나 운용을 점점 더 세밀하게, 정교하게 조정해나갔다.
송골송골 땀방울이 라온의 이마에 맺혔다.
“…부드러운 게 더 힘들다!”
거대한 우박이나, 휘몰아치는 눈폭풍, 소용돌이 바람과는 다른. 아주 작은 알갱이, 소복이 내리는 눈, 마냥 시리지 않은 바람. 약하게 만드는 것이 더 힘들었다.
“하지만 쉽다!”
힘들지만 어렵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라온은 자신이 원하는 첫눈의 크기를 떠올렸다. 어둠의 숲과 해리스 마을, 그리고 헤니투스 영지까지 내리는 눈.
그 범위의 마나를 부드럽게 조종하는 일은 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4살의 라온에게는 고려할 점이 참으로 많은 난제였다.
더욱이 적이나 섬을 때려 부수는 게 아니라, 더 곤란한 부분이 많았다.
또한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동화책 속 그림처럼. 그런 순간을 온전히 그려내고 싶었다.
“흐.”
라온의 입가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라온 스스로는 몰랐다.
검은 용은 이 순간이 즐거웠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동굴에 갇혀 지냈을 때. 기억하기도 싫은 그 끔찍한 시간 속에서는 무엇도 스스로 해볼 수가 없었다.
알아갈 기회도, 느낄 기회도, 생각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가두는 존재들에게서 어떻게 도망칠까, 어떻게 저것들을 무찌를까, 그런 생각을 할 기회는 많았지만. 즐겁고 좋은 것은 알지 못했기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꼬르륵.
“……!”
한창 세밀하고 광범위한 마나 조절 연습을 하던 라온의 눈이 커졌다. 라온은 마나를 거둬들이며 통통한 배 위에 두 앞발을 올렸다.
“역시 나는 내 배도 위대하다! 아주 정확하다!”
라온은 시계를 쳐다봤다.
간식 시간이다.
“인간이 먹는 건 꼭 챙겨 먹어야 한다고 했다!”
라온은 로잘린의 연구실에 흩어지거나 어지러워진 것이 있나 없나 확인하고는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있는 거 잘 만드는 비크로스야, 다들 어디 갔나?”
탁.
비크로스는 별 대답 없이 쿠키가 한가득 들어간 바구니를 라온 앞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건강을 위한 식단 관리를 해야 한다며, 비크로스는 간식 시간에 디저트 종류를 주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을 한꺼번에 라온에게 준 적이 없었다.
라온은 의아했지만, 얼른 짜리몽땅한 두 앞발로 바구니를 둘러 안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온과 홍이 없었다.
온과 홍의 몫으로 만든 거대한 쿠키 바구니가 덩그러니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후우.”
비크로스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하듯 툭 내뱉었다.
“홍은 메리. 온은 아버지.”
“오, 고맙다!”
꼬르륵.
다시 라온의 배에서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고, 비크로스는 서늘한 얼굴로 라온의 바구니 옆에 따뜻하고 달달한 꿀차를 놓았다.
“인간은 지금 뭐 하는지 아나?”
“몰라.”
“알았다! 말 그만 시키겠다! 요리해라!”
“…후우.”
라온은 온과 홍이 각각 론과 메리한테 갔다는 소리에 잠시 케일에게로 가서 같이 먹을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홀로 쿠키와 차를 먹기 시작했다.
‘얼른 먹고 지하로 가야지!’
라온의 날개가 저도 모르게 파닥였다.
비크로스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으나, 라온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 시각, 홍은 조금씩 흐리게 변하는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메리 누나는 눈 본 적 있는지 궁금한데!”
목소리 톤은 높았지만, 왠지 모르게 고양이 모습 홍의 귀는 축 처져 있었다. 눈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메리는 홍의 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저는 눈을 본 적 없습니다.”
“…그렇구나.”
메리는 어릴 적 기억이 없었고, 그 이후로 그녀가 지냈던 사막 아래 지하 도시에서는 정령을 이용한 비는 내렸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다. 지하 공동에서 자체적으로 밭농사 등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에서 본 적은 있습니다.”
네크로맨서를 택한 후로, 관련 문헌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에 대한 책을 참 많이 봤었다.
물론 라온이 슬그머니 보여준 동화책 도 읽었다.
“후우.”
홍이 작은 입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갑갑한지 홍은 괜히 작은 발바닥으로 바닥을 꾹꾹 눌러댔다. 메리는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홍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홍은 그런 메리를 힐끗거렸다. 홍에게 있어 메리는 다른 어른들보다는 편한 존재였다. 분명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이상하게 친구 같을 때가 있었다.
말이 별로 없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친구.
홍은 우물거리듯 잘 알아듣기 힘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은 별론데.”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냥요.”
“더 들어볼 수 있습니까?”
홍은 메리 곁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있는 메리의 몸통에 제 몸을 기댔다.
“누나랑 도망칠 때, 겨울에 엄청 고생했는데. 눈이 내리면 더 힘들었어요.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들고 잠들 때도 너무 추웠는데.”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건.
홍은 눈을 감았다.
눈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잠잘 곳을 찾기 위해, 동시에 잡히면 안 되니까 어디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숨어 다녀야 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그 순간에는.
그 세상에서는.
“…누나랑 나뿐이었는데.”
온과 홍. 둘만이 존재했다.
물론 사람도 동물도 많았다.
하지만 눈폭풍 사이로 그 존재들은 잘 보이지 않았고, 홍의 곁에는 누나 온뿐이었다.
“눈 싫은데.”
비로소 홍은 솔직한 감정을 내뱉었다.
홍은 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냐 싫냐를 따지면 싫었다.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 특히 라온과 누나 온 앞에서 말하기 좀 그랬다.
“싫을 수 있습니다.”
홍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 검은 실핏줄이 올라왔지만 따스한 미소가 그려진 입꼬리가 보였다.
“저도 싫은 것이 많습니다. 사실 저는 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싫어하는 편이었습니다.”
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닌데! 이상한데!”
메리는 틈만 나면, 온, 홍, 라온과 함께 어둠의 숲 밤을 구경하러 나가곤 했다. 특히 별빛이 유독 밝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날이면 넷은 한참 동안 밤하늘 구경을 하느라, 비크로스의 서늘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메리가 손을 뻗어, 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전에는 밤을 싫어했습니다.”
그 사실을 메리는 밤을 싫어하던 당시에는 몰랐다. 오히려 밤을 좋아하게 된 이후로, 자신이 무언가를 싫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꽤 좋아합니다.”
메리는 자신의 손과 달리 보드라운 붉은 털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왜 그렇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해보았는데?”
궁금하다는 듯 홍이 메리를 보챘다. 메리는 얕은 웃음을 흘리며 딱딱하지만 온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밤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다는 듯 홍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홍도 눈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눈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홍은 더욱더 어렵다는 듯 메리에게 치댔다.
“그리고 눈이 계속 싫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메리의 말에 치대던 것을 멈추고 메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돼요?”
“공자님이 홍이 눈이 싫다고 말하면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홍은 눈을 깜박이며 상상했다.
케일이 할 말은 뻔했고, 홍은 그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러든가.”
케일이 할 것 같은 말을 내뱉자, 홍은 왠지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메리는 그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녀는 동생 혹은 조카 같은 홍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개인적으로 살짝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언가가 좋든 싫든 머리를 깨어두고 마음을 열어두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깨우고 마음을 열어둔다?”
그 말 또한 어렵다는 듯 홍은 울망울망한 눈으로 메리를 올려다보다가 메리의 따스한 미소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차게 외쳤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해두겠는데!”
“그거면 충분합니다. 제 말에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음음, 하지만 기억해두고 싶은데!”
홍은 씩씩하게 답하고는 두 앞발을 들어 올리며 메리를 바라보았다. 메리는 두 팔을 벌려 홍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홍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쪽에서부터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그 하늘을 보며 미간을 살짝 일그러트렸지만, 마음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대신, 문득 누나와 라온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한편, 론은 손가락 길이만 한 비수의 날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차만 마실 거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론과 마주 보는 자리. 그 소파 위에 온은 앉아 차를 호호 불며 마시고 있었다.
론이 끓여준 레몬 꿀차였다. 어느 순간부터 온은 레모네이드와 레몬 꿀차를 찾아댔다. 물론 그 이유를 론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냥 차를 마시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온은 담담하게 답하고는 다시 호호 불며 차를 마셨다.
마치 차를 마시는 게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 집중하는 모습이었지만.
“쯧.”
론은 작게 혀를 차고는 의자 옆에 있는 작은 협탁에 손을 뻗었다.
드륵. 서랍이 열리고 론은 그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달칵.
온은 별다른 말 없이 그 상자를 열었다.
말린 열매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작고 붉은 열매는 말랐음에도 그 빛깔이 고왔다.
온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이 저택에는 어딜 가도 이 과일이 제철에는 싱싱하게, 다른 때에는 말린 것이나 음료, 잼으로 존재했다.
온은 과일을 먹으며 툭 던지듯 내뱉었다.
“너무 기대하는 것도 걱정이고, 너무 싫어하는 것도 걱정인데.”
“너처럼 어린 녀석이 너무 근심하며 신경 쓰는 것도 좋지 않다.”
그러자 곧바로 틈도 없이 대답이 들려왔다.
온이 움찔하며 론을 바라보았다. 론은 온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5번째 비수를 광이 날 정도로 닦아대고 있었다.
온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을 그러던 그녀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애 안 같나요?”
론은 그제야 비수에서 시선을 떼어 온을 바라봤다.
온은 론이 아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과 닮아있었다.
케일 헤니투스.
망나니가 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케일이 저랬다. 물론 눈앞의 이 회색 묘족 녀석이 더 어른스럽고 세상사를 더 잘 알았지만.
론은 다시 비수로 시선을 돌렸다.
온은 그 모습에 괜히 과일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때, 론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나니보다는 네가 낫지.”
망나니.
온은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고 있었다.
분명 케일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론이 비크로스만큼 아끼는 사람. 자식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케일이었다. 물론 론은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온은 눈치껏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론은 그 케일보다 온이 낫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망나니도 나쁘지 않았어.”
그리고 재빠르게 덧붙여 망나니도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는 론.
“푸흐-!”
온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웃음에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비수를 닦던 론의 손이 잠시 멈췄지만 이내 손은 다시 움직였다.
론은 그 와중에도 온을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온은 론이 부끄러워서 이럼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할아버지는 진심을 말할 때면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았다. 물론 케일 앞에서 빼고.
론의 시선이 온에게로 향했다.
‘애 안 같기는.’
온은 다시 꿀차와 말린 과일을 먹고 있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처음과 달리 소파에 걸친 두 다리를 지금은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애인데, 아니라고 하기는.’
피식. 론은 온 모르게 아주 작은 웃음을 흘리고는 비수에 집중했다.
저택 사람들은 안다.
온도 아이라는 걸.
그리고 고민이 있거나 외롭거나 어딘가 기대고 싶을 때면 찾아온다는 걸.
그래서 이 저택 사람들 방에는 어딜 가도 온이 와서 먹을, 온이 좋아하는 음식을 한두 개 정도는 놔둔다.
‘저도 이거 가져가도 될까요? 온이 오면 내줄 게 따로 없어서요.’
심지어 이제 청소년인 라크 방에도 이 말린 과일이 담긴 상자가 있었다. 며칠 전, 라크가 찾아와 쭈뼛거리며 론에게서 이 말린 과일 상자를 하나 받아갔다.
그 소심한 녀석은 론을 어려워했는데, 온에 관련되니 그래도 먼저 제 발로 찾아왔다. 늑대족 아이들과 온, 홍, 라온에 관한 일이면 라크는 꽤 많이 용감해지곤 했다. 물론 라크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지만.
“왜?”
론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온에게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차도 과일도 맛있어요.”
그리고 이어진 말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더 구해야겠군.’
론은 절반가량 비어버린 상자 안을 보며 부집사 한스에게 요청할 목록에 말린 과일을 넣었다.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과일을 먹는 온의 편안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비수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몰랐다.
비수를 닦는 그의 손길이 꽤 경쾌해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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