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15
15. 측정 오류?
김광현. 39세.
헌터 관할 협회 소속. 무교.
오늘부로 신을 믿기로 했다.
출장을 핑계 대고 사무실을 뛰쳐나오긴 했지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시우 혹은 정체 불명의 여자와 자연스러운 만남을 연출할 수 있을지 골머리를 앓던 차였다.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다니!’
전화를 받은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소파에서 데굴데굴 굴러 버렸다.
그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능력 측정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사실 측정을 신청하는 것은 협회 홈페이지에서나 모바일로도 가능했지만, 이렇듯 광현에게 따로 연락을 했다는 것은.
‘역시 그 여자는 특별한 거야.’
광현은 전화를 받았을 때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박제휘라고 합니다.”
박제휘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광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박제휘 010-XXXX-XXXX
실버문 매니지먼트는 늑대 길드의 자회사로, 초보 헌터 양성 및 관리를 전문적으로 맡는 곳이었다.
시우가 실버문 사람을 이곳으로 보냈다는 말은 즉.
‘그 여자에게 그만큼의 힘을 실어 주겠다는 소리군……!’
광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물론 기쁨의 비명이다.
이번 일만 잘되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던 협회장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뜰 것이다.
‘출세가 눈앞이야.’
오늘은 한국의 일곱 번째 S급 헌터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검은 드레스의 여자가 측정기에 손을 올리는 그 순간, 측정기는 눈부신 황금색으로 물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편, 눈부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비단 광현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다.’
제휘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꾹 쥐었다.
실버문에 입사하고 어언 7년.
이 일만 잘 해내면 실버문 매니지먼트에서 자신의 위상이 시우에 버금가게 될 것이다.
“아. 이제 도착하셨다는군요.”
휴대전화를 확인한 제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광현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그럼, 가시죠.”
곧 출세를 앞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한국 헌터 관할 협회는 무려 30층 건물이었다. 1층 로비를 제외하고 2층부터 10층까지는 초보 헌터를 위한 기초 트레이닝 룸, 11층부터 20층은 외국에서 지원 온 헌터들을 대접 및 관리하기 위한 객실과 응접실이 있었다.
그리고 측정실은 이곳, 21층이었다.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광현은 두 팔을 벌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낯선 남자가 얼굴을 들이민 탓에 은하가 흠칫 놀랐다.
‘하마터면 얼굴을 불로 지질 뻔했어.’
가까스로 불길을 집어넣은 은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넉살 좋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셨군요. 여기, 주차권 받아 두었습니다.”
후다닥 달려온 제휘가 시우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더니 힐끔, 은하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저, 대표님. 이쪽이…….”
“그래. 내가 말한 이유라 헌터.”
제휘는 이유라, 아니 차은하에게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헌터님. 저는 신 대표님의 수행 비서이자 실버문 매니지먼트 소속, 박제휘라고 합니다. 편히 박 매니저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 네.”
명함을 건네받은 은하가 힐끗 시우를 바라보았다. 누구? 그렇게 묻는 듯했다.
“오늘부터 선배의 매니저가 될 사람입니다. 곁에 두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매니저? 시우의 말에 은하는 건네받은 명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상 참 좋아졌네.’
가수나 배우가 아닌 헌터에게도 매니저가 붙는 시대가 왔구나. 매니저라는 존재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왜 필요한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시대가 헌터에게 상냥해진 것은 잘 알겠다.
“측정은 10분 정도면 끝난답니다. 혹시 맡기실 귀중품이나 겉옷은 있으실까요?”
“아뇨.”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광현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에서 측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안내한 측정실은 다섯 개의 측정실 중 가장 넓은 곳으로, 사방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복도나 옆방에서도 이곳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였다.
“오오!”
“저 여자가…….”
“저기 저 사람, 실버문 사람 아니야?”
“맞네, 맞아. 세상에. 벌써부터 매니저가?”
유리창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로 이곳을 찍고 있었다. 마치 팬 사인회에 나온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그건 은하에게 있어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죠?”
시우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사람이 많은 곳은 온갖 냄새가 섞여 있다.
코에 소매를 가져가며 불쾌한 기색을 비치는 시우 앞에서, 광현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아. 방금 불멸 길드의 유환 헌터가 다녀갔거든요. 그를 따라온 기자들인데, 아직 남아 있었나 봅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대한민국에 새로운 별이 뜰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그 역사적인 순간을 취재하여 자신을 믿지 않았던 협회장에게 본때를 보여 줄 심산이었다.
“금방 돌아갈 겁니다. 자자, 헌터님께서는 여기 서 계시면 됩니다.”
“…….”
능숙하게 화제를 돌리는 광현을, 시우가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짧은 사이 머릿속의 계산기를 두드렸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1세대 헌터라는 것을 숨기기로 결정한 지금, 다른 방식으로 조명을 받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늑대의 신예 용병, 새로운 S급?’ 이런 헤드라인으로 말이다.
결국 시우는 기자들을 물리지 않고, 근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손은 이곳에 편하게 올려 두시고요. 되도록 발판 위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측정기는 성인 남성 두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캡슐 형태였다. 전 세계 헌터의 능력치와 잠재력을 데이터화하여 종합 랭크를 매겨 주는 유용한 기계. 물론 은하의 시절에는 없었던 물건이었다.
광현이 시키는 대로 측정기 내부에 자리를 잡은 은하는, 오는 길에 시우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헌터 협회에 가자고?’
‘네. 현대에서 헌터 활동을 하려면 랭크 검사랑 면허증 발급은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제아무리 임시 신분을 만들어 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에 함부로 가면 들켜 버리는 거 아닌가? 미심쩍은 얼굴을 한 은하 앞에서 시우는 걱정 말라는 듯 입을 열었다.
‘게이트 출현 이후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출생 신고와 사망 신고가 원활하지 않아서요. 신원을 그렇게 따지지 않아요.’
시우는 덧붙여 말했다. 헌터 면허증은 게이트 출입 권한과 같기 때문에 발급에 있어서 신원보다 중요한 건 능력이라고.
‘선배는 누구보다 명확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 정도 임시 등본으로도 충분히 측정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늑대가 뒷배에 있고요.’
애초에 은하 시절에는 협회라는 것도 없었을뿐더러 랭크 측정이라는 행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시우가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은하는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고 이곳, 헌터 관할 협회에까지 오게 되었다.
“자자, 거의 다 됐습니다. 아, 움직이지 마시고요.”
광현은 그녀의 머리에 헬멧을 씌우고 양쪽 손목과 발목에 금속 고리를 연결했다.
찰칵, 찰칵.
그 와중에도 카메라 셔터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플래시가 번쩍번쩍 빛나서 눈이 아플 정도였다.
캡슐을 닫기 전, 광현이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면허증을 발급받기 전 이명을 정해야 합니다만, 뭘로 하시겠습니까?”
이명? 헬멧을 쓰고 있던 은하가 도르륵 시선을 굴렸다. 그런 것까지 정해야 하는 건가.
은하는 여태껏 ‘17대대 2중대 3소대. 1분대의 분대장 차은하’일 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명을 ‘17대대 2중대 3소대 1분대 분대장’으로 지을 순 없고.
“…….”
내가 이렇게 네이밍 센스가 없는 사람이었던가. 은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항상 집 주변을 맴돌던 떠돌이 강아지에게 붙인 이름이 ‘까망이’였지. 털이 까맸으니까.
초등학교 때 키우던 병아리의 이름은 ‘삐약이’. 금붕어의 이름은 ‘뻐끔이’.
말문이 막힌 은하 앞에서, 광현은 잠자코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기자들도 모두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흑염의 프린세스’가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은하는 노란 메시지창을 주시하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괜찮은 네이밍센스는 아닌 것 같지만, 어차피 1년만 쓰고 버릴 이명이다. 적당히 지어 버리면 그만이겠지. 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다.
“흑염의 프린세스.”
은하가 중얼거리듯 짧게 답하자, 어쩐지 주변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네?”
“흑염의 프린세스요. 제 이명.”
광현은 어쩐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로 잡고 캡슐 문을 닫았다.
“아, 네, 넵. 알겠습니다.”
캡슐을 닫은 광현은 근처에 떠오른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이명을 입력했다.
띡, 띡, 띡…….
광현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깔끔한 전자 버튼 소리가 측정실에 울려 퍼졌다.
‘스스로를 흑염의 프린세스라고 언급하다니…… 대체 뭐지?’
정말 괴담의 주인공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태도가 너무 초연했다.
그럼 컨셉? 컨셉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리얼한데. 오만 가지 생각으로 입력을 마친 광현이 기계 전원을 켜자,
우우웅.
캡슐 전체가 낮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동이 멎자 전자음이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터 수집 중.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수집이 완료됩니다.]…….
[데이터 수집 중.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수집이 완료됩니다.]…….
[데이터 수집 중.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수집이 완료됩니다.]…….
그런데 어째선지, 로딩이 생각보다 길다.
‘뭐야, 기계 오작동? 그럴 리가 없는데.’
광현은 똥줄이 타는 얼굴로 캡슐을 바라보며 손톱을 와그작와그작 물어뜯었다.
바깥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둘씩 수군대기 시작할 무렵, 데이터 수집 완료를 알리는 BGM이 흘러나왔다.
[데이터 수집이 완료됐습니다.]‘드디어……!’
“…….”
“…….”
“…….”
위이잉.
얼어붙은 공기 가운데, 프린터로 인쇄물이 출력되는 소리가 기이하게 울려 퍼졌다.
덜컥 소리와 함께 캡슐 문이 열리고 은하가 빠져나왔다. 동요라고는 전혀 없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이게 결과지인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은하는 인쇄물을 들어 까만 눈으로 내용을 훑었다.
▷ 이명 : 흑염의 프린세스
▷ 등록 번호 : –
▷ 소속 : –
▷ 체력 : F
▷ 마력 : E
▷ 종합 전투력 : F
▷ 잠재력 : 4%
▷ 고유 능력 : 자연계열
▷ 비고 : 미등록자 (면허증 발급 요망)
현대 헌터 랭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은하조차 알 수 있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