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39
39. 마에스트로의 귀국 (2)
인천 국제공항. AM 3:11
단정한 올림머리에 각진 안경을 낀 여인, 캐서린은 주변을 확인했다.
이곳은 전용기 소지자나 비밀리에 입국하는 이들만을 위한 특별 보안 출입구. 기자는 물론 일반 승객들은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캐서린은 힐끔 손목시계를 응시했다.
‘이제 곧 도착하실 때가 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출입문이 열렸다. 싸늘하리만큼 적막한 로비에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려 퍼졌다.
“오셨습니까.”
저벅저벅 소리와 함께 깔끔한 검정 구두코가 가까워졌다.
그는 오랜 비행으로 굳어 있던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답했다.
“세상 참 좋아졌어. 뉴욕에서 인천까지 10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니 말이야.”
“편안하셨다면 다행입니다.”
캐서린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베이지색에 가까울 정도로 색소가 옅은 금발. 깔끔하게 커트된 머리는 도시적이고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다만 은빛으로도 잿빛으로도 보이는 눈동자는 조금은 피로한 듯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았어. 조금 덥긴 했지만.”
그가 새까만 슈트 상의를 벗자 탄탄한 몸의 형태에 따라 달라붙은 흰 셔츠가 드러났다. 그 곁에서, 캐서린은 그가 벗은 상의를 능숙하게 받아 냈다.
검정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어 맨 그가 스르륵 주변을 확인했다.
“인천 공항도 많이 변했군.”
“그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그렇지.”
싱겁게 동의를 표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마주한 유리창 속 자신과 이끌리듯 시선이 마주쳤다. 어쩌면 변한 것은 풍경뿐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로비를 지났다.
텅 빈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딛자 덜커덕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넓은 벽을 오롯이 덮는 유리창 너머, 북적이는 공항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에스컬레이터가 가장 아래에 다다를 때까지, 그의 잿빛 눈동자는 한곳에 오롯이 고정되어 있었다.
“…….”
한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캐서린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본 캐서린이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은 어떠신가요. 역시 반가우신가요?”
“반가워?”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그 앞에서, 캐서린은 입을 닫았다.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에 깃든 그것은, 결코 반가움이나 그리움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캐서린은 생각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한국행은 역시 흑염의 프린세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비록 본인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리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30년 동안 한국에는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던 그가 갑자기 한국행을 결정한 이유가 도통 떠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늑대는? 어떻게 됐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가죽 장갑을 착용하며, 그가 물었다.
올 것이 왔다.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 안경을 슬쩍 올린 캐서린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그래?”
그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까만 가죽 장갑 위에 졌던 주름이 부드럽게 펼쳐졌다.
짧게 대꾸하는 그의 옆모습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한 기색도 엿볼 수 없다. 힐책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그에게 명령을 받은 이후 캐서린은 먼저 한국에 입국했다. 그리고 그녀, ‘흑염의 프린세스’에 관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입수했다.
그 결과 캐서린은 흑염의 프린세스가 단순한 F급 컨셉 헌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실 적지 않은 이들은 방송에 출연한 흑염의 프린세스를 보며 그저 편집된 화면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캐서린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늑대가 보호하고 있는 데다가 자신의 상사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자체가 그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반증이었으므로.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녀의 상사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 고민의 기색을 담은 눈동자가 힐끔 옆을 향한다.
“왜?”
“……아닙니다.”
캐서린은 입을 닫았다. 어차피 그는 제대로 답을 해 주지 않을 테니까.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일절 오가지 않았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동안 몇몇의 시선이 따라붙기는 했으나, 미리 사정을 안내받은 보안 요원들 덕분에 별 탈 없이 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련된 형태의 검은 승용차는 바깥 시선을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진하게 선팅되어 있었다.
“좋은 차네.”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역시 유능하다니까.”
“감사합니다.”
캐서린은 트렁크에 짐을 싣고 운전석에 탔다.
“바로 이동할까요?”
핸들은 잡은 캐서린이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능숙하게 시동을 켠 뒤 휴대전화로 네비게이션을 실행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시간이면 강남구까지 1시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한국행을 그토록 서둘렀던 그였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늑대의 문을 두드리고 싶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는 턱을 괸 채 중얼거리듯 답했다.
“아니, 오늘은 호텔로 가지. 아무리 그래도 새벽에 길드 본부를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피곤하기도 하고.”
그는 푹신한 시트에 깊이 몸을 기댔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유달리도 낮아서 적막한 차 안을 나직이 울렸다.
“그럼…… 호텔로 곧장 향하겠습니다.”
캐서린은 더 이상 군말을 붙이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진한 어둠이 깔려 있던 거리에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밝혀졌다.
차체가 낮게 진동하며 창밖 풍경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곳에, 보란 듯이 환히 밝혀진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것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준은 못이 박힌 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
유리창을 스치는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빠르게 비추었다가 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어떻게 알았는지 인터넷, 신문, TV 할 것 없이 한 가지 주제로 전국이 떠들썩했다.
마에스트로의 방한(訪韓).
그 30년 만의 귀환에 대하여.
* * *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커다란 벽면 TV 화면이 번쩍번쩍 빛났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익숙한 곡에 귀를 기울이며 은하는 생각했다.
‘지금 들어도 좋은 곡이야.’
멜로디는 신나는 반면 가사는 절망과 배신이 가득한 점이 이 곡의 포인트라 생각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명한 것을 보면 역시 명곡은 명곡이다.
다만 은하가 기억하고 있던 가수의 모습과는 참 달랐다. 이것이 바로 세월이란 것일까. 참 무색하기도 하다.
은하는 베란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변한 것은 없다. 단지 머리가 조금 길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중에 우리 집 강아지 미용해 볼래? 비숑 프리제라는 견종인데, 이름은 윌리엄이야.’
어째서일까.
문득 그 애가 떠오른다. 지금쯤 그 애도 TV 속 저 가수처럼 늙어 있겠지.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수줍게 웃던 얼굴이 마치 봉숭아꽃 같던 사람. 그런 말을 하면 펄쩍 뛰면서 도리질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이다.
‘은하야! 차은하!’
세상을 잃은 듯한 얼굴로 제게 손을 뻗던 백이준. 게이트에 갇히는 건 정작 은하인데, 마치 자신이 갇히는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지금쯤 뭘 하며 살고 있을까 생각해 봤다. 워낙 전투를 싫어하고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평화롭게 변한 지금 세상에, 헌터 활동을 접고 어디선가 유유자적 지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일 자신을 만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깜짝 놀라서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아, 쉰이 넘은 나이니 울지는 않으려나.
어쨌든 엄청나게 놀랄 것이다. 은하가 죽었다고 여기며 살았을 테니 말이다.
픽.
그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마른 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러자 눈앞에 노란 메시지창이 불쑥 떠오른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궁금증이 가득한 황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집니다.]“그냥. 옛날 생각. 나랑 같이 게이트에 갇혔었던 애가 있는데, 지금쯤 뭐 하고 살까 궁금하긴 하네.”
그러자 이어서 노란 메시지창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친구…….”
나지막이 읊조린 은하가 테이블 위 식은 맥주 캔을 들어 올린다. 캔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손가락에 닿아 또르륵, 떨어진다.
‘그, 그, 그래서 말인데, 게이트에서 나가면 내일…… 그…… 뭐냐, 우리 집…… 노, 노, 노, 놀러 올래?’
캔을 가져가는 입술에 옅은 호선이 그려진다.
집채만 한 몬스터를 마주하고도 선뜻 등을 내줄 수 있었던,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지만 늘 웃으면서 함께 내일을 그릴 수 있었던,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잘 살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친구라고 하는 거라면─.
“응.”
시원하게 한 모금 목을 축인 은하의 입가에, 드물게도 미소가 피어났다.
“그랬던 것 같아.”
하얀 천에 꽃물이 번지듯 천천히 그리고 희미하게 피어난 미소를 머금고, 은하는 문득 발코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 이제는 익숙해진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 어딘가에 만일 그가 있다면, 그것만큼은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살아 있고, 또한 나름대로 잘살고 있노라고.
그러니,
너도 그러하길.
* * *
[속보. 美 마에스트로, 어제 10일 새벽 인천 공항 도착] [마에스트로 방한에 누리꾼들 관심 집중. 방한 목적은?] [유명 인기 BJ 킹갓수 ‘마에스트로, 나의 오랜 우상이야’ SNS에 직접적으로 언급해] [제목] 헐 마에스트로 한국 옴? [작성자]□□(125.107)│2031.8.10 PM 2:01│[조회] 42,979│[추천] 1,431 [내용] 제곧내임 다시는 한국 안올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미국에서 쫓겨난건가;; [댓글] 788┖>□□: ㅂㅅ인가ㅋㅋ 체이서가 미국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데 쫓겨나긴 왜 쫓겨남ㅋㅋㅋㅋ
┖>□□: 그냥 놀러온거 아님?
┖>□□: 30년만에 관광이라고??ㅋㅋㅋㅋ 한국 와서 욕처먹을거 뻔히 알텐데 관광은 무슨ㅋㅋㅋㅋㅋ ㄹㅇ뇌비엇ㅋㅋㅋㅋㅋ
┖>□□: 예전부터 그런 소문은 계속 잇엇잔슴 이제 한국에서 활동하려는 건가??
┖>□□: 매국노새끼 이제와서 한국 기어들어오는꼬라지 ㅈㄴ역겹넼ㅋㅋㅋㅋㅋㅋ 어이없을무;;;;;
┖>□□: 윗댓 무식한거 티내네 제일 빡셋던 2000년대에 3년동안 굴렀으면 할거 다햇지 매국노ㅈㄹ
┖>□□: ㅇㅈ 솔찍히 그때당시에 나라가 맨몸으로 게이트에 처넣고 제대로된 보상도 안해줬는데 한국에 잇는정없는정 다떨어졌을만함
┖>□□: 쉴드치는 놈들 싹다 매국노
┖>□□: 생각하는 꼬라지 ㅋㅋ한국에 있으면 강제징병에 돈도 쥐꼬리만큼 주는데 솔직히 뭐가 아쉬워서 구지 천조국두고 헬조선에서 살겟냐 나같아도 절대안삼
┖>□□: 구지 (x) 굳이 (o)
┖>□□: 미국 헌터들은 A급이상이면 국가에서 매달 품위유지비다 직급보조비다 몇천달러씩 지급한다던데ㅋㅋ 심지어 쟨 S급이잖아 그거 다 걷어차고 한국오는 미친넘이 있겠냐
┖>□□: 와 대박ㅋㅋㅋㅋㅋ근데만약에 진짜한국다시온거면 어느길드 들어가려나???? 역시 늑대??
┖>□□: 제천대성이 환장하고 불멸에 영입할라고 난리칠듯
┖>□□: ㄴㄴ 저정도면 그냥 길드 하나 세우겠지ㅋㅋ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면을 바라보던 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제휘였다.
“왔나 보군.”
시우는 컴퓨터 화면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던 이가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다.
“이리로 모실까요?”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휘가 서둘러 사라졌다.
시우는 중앙에 위치한 긴 테이블에 먼저 앉았다.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애꿎은 테이블 유리를 톡톡 건드려 봤다.
“…….”
가라앉은 푸른 눈이 힐끔, 곁의 휴대전화를 향한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으로 휴대전화를 잡고 메신저를 확인했다.
[나] [오전 7:20] 선배 [나] [오전 7:20] 어제 그 꼬맹이, 가까이 두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나] [오전 7:20] 그 녀석은 트릭스터라고 해서, 한국에서 꽤 유명한 헌터예요 [나] [오전 7:20] 물론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그것은 은하와 국밥집에서 식사를 한 바로 다음 날 보낸 메시지였다.
그러나 오늘이 되도록 여전히 곁의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며칠째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슬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시우가 은하의 집에 찾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구실이 필요했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집을 들락날락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사실 구실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얼마 전 해외에서 공수한 명작 영화 한정판 DVD도 있고, 다음 임무에 대한 회의를 핑계로 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시우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얼떨떨한 얼굴의 제휘가 들어왔다. 그 뒤로, 낯이 익은 여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신 헌터님. 또 뵙습니다.”
캐서린. 체이서의 자회사, 클램프 매니지먼트 소속이라던 여자다.
시우의 푸른 눈동자가 가늘게 찢어졌다.
정확히는, 그녀에 뒤에 선 커다란 그림자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