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9
9. 흑염의 프린세스
휘리릭─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검고 아름다운 물결을 그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슈욱!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그 속력만은 놀라울 정도였지만.
‘상대가 좋지 않아.’
시우의 앞에 그의 신장보다 큰 얼음 방패가 세워졌다. 그 차가운 온도 앞에서, 야심 차게 날아온 불덩이는 등잔불처럼 꺼졌다.
파파파밧!
그와 동시에, 맹수 이빨 형태를 한 얼음 파편들이 은하에게 휘몰아치듯 날아들었다.
그러나 은하는 사뿐히 그 모든 것들을 피한 채,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방패 뒤에 숨어서는 나를 해치울 수 없을 텐데.”
높낮이 없이 무덤덤한 그녀의 어조에서는 초조함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방패 뒤에 선 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덤덤하게 바닥을 주시했다.
불덩이를 맞은 얼음 방패가 조금씩 녹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마지막 물방울이 톡 떨어지는 순간.
쉬이이익─
마치 영혼을 부여한 듯 물줄기가 솟아나더니 단숨에 은하에게로 뻗쳤다.
“……!”
물? 얼음이 아니라?
반사적으로 불을 뿜었지만, 소화기 앞의 촛불처럼 맥없이 꺼져 버렸다. 단순히 날아오던 얼음 파편들과는 달리, 이것은 엄청난 기세였다.
칫, 뒤늦게 혀를 찬 은하가 재빨리 지면을 걷어차고 공중으로 도약하려던 순간.
지끈─
순간적인 두통으로 몸이 휘청였다. 뱀처럼 몸체를 비튼 물줄기는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삽시간에 은하의 목을 휘감았다.
‘젠장……!’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하필 이런 때에 두통이라니. 더군다나 물도 조종할 수 있을 줄이야.
안일했다. 게이트 내의 야수형 몬스터에게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근래 들어 매우 나빠진 몸 상태도 한몫했다.
확실히 눈앞의 청년은 강했다. 아마 은하가 지금껏 상대해 온 모든 적을 통틀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그저 방심으로부터 빚어진 일이었다.
물줄기는 두꺼운 밧줄이 되어 은하의 목을 사정없이 졸라맸다. 떼어 낼 겨를도 없이 점점 몸체를 불린 그것은 은하의 입 그리고 코를 차례로 막기 시작했다.
‘숨을 못 쉬겠어……!’
꾹 다문 입술을 기어코 비집고, 기포가 부글부글 새어 나갔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득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질식사 혹은 익사. 자신의 죽음이 그러한 형태일 거라곤 여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인간의 손에?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뿌옇게 번져 가는 뇌리에 문득, 차갑게 식은 어머니의 묘비가 떠올랐다.
은하야.
은하야.
학교 가야지.
은하야…….
…….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초조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언니, ───지 마.] [황금색 눈동자에 짙은 고민의 기색이 일렁입니다.]점차 시야가 흐릿해져 간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의 털이 밝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축하합니다! ‘흑──’의 ‘──아─’를 획───다!]얼굴 전체를 감싸 버린 물 때문에 더 이상 글씨를 읽는 것이 불가능했다.
‘더…… 이상, 은.’
은하가 두 눈을 질끈 감은 바로 그 순간.
무언가 차가운 것이 이마에 닿은 듯했다.
파아앗!
돌연 시야 전체가 검게 물들었다. 눈, 코, 입을 막고 있던 물이 사라지고 비로소 호흡이 가능해졌다.
‘……무슨 일이.’
눈을 감았다 떴다. 앞은 여전히 새카맣다.
다만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만은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숨겨진 업적 ‘검게 물든 다섯 가지 보배를 착용하라’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보상이 주어집니다.] [ – – – Loading – – – ]‘……업적? 보상이라니?’
당황한 은하가 제 몸과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녀는 자신이 머리 위에 차가운 금속 물건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아이템.
틀림없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다섯 번째 아이템이 바로 이것이라고, 은하는 확신했다.
‘고양이가…… 들고 있었단 말이야?’
머릿속에 가득히 자리 잡은 의문의 끝에 허탈함이 물밀 듯 밀어닥쳤다.
[축하합니다! 칭호, ‘흑염의 프린세스’를 획득하셨습니다. 즉시 사용하시겠습니까? ▶ 예 / 아니요]아니, 우선은 현재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칭호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강적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은하는 주저 없이 ‘예’ 버튼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띠링.
[칭호 ‘흑염의 프린세스’를 사용합니다.]그러자 메시지창 위로 또 다른 메시지창이 겹쳐진다.
[당신의 고유 능력이 진화합니다.] [화염(火焰) ▶ 흑염(黑焰)]그것을 마지막으로 은하를 에워싸고 있던 어둠이 썰물 빠지듯 한순간에 사라졌다.
“……너.”
어느덧 낯빛이 달라진 시우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로 사라졌던 거지?”
은하는 대답 대신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티아라의 감촉이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역시 방금 그 일은 환상이 아닌 듯하다.
팟!
손바닥을 펼치지 않아도, 양어깨에서 불꽃이 소환되었다. 그저 원하기만 하면 되었다.
자아를 가진 불꽃은 주인의 의지대로 눈앞의 적을 향해 날아들었다.
“……!”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가까스로 얼음 방패를 펼친 시우는 그녀의 불꽃이 검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쏜 검은 불꽃은 얼음에 닿아도 도통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불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시커멓게 타오르는 불꽃을 마주한 순간, 그의 뇌리에 잊고 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흑염의 프린세스요?’
언젠가 우연히 말을 섞은 중년의 헌터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헌터를 홀릴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더군. 그 몬스터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도록 하게. 그녀의 흑염은 영혼마저 태워 버린다고 해.’
인간은 겪어 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공포와 호기심을 가지는 종족이다. 게이트나 몬스터에 대해서 루머와 억측이 난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흑염의 프린세스라니. 민망할 수준의 유치한 이름이다. 옛날에 유행했다는 빨간 마스크나 홍콩 할매 귀신의 몬스터 버전일 거라고, 그저 흘려들었는데…….
시우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인간형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흑염의 프린세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을 수 없었다. 시우는 주먹을 쥐었다.
사방이 막힌 게이트. 이길 자신이 없는 막강한 상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피 냄새. 차갑게 식어 가는 손가락 끝.
이 모든 것들이 만년설 아래 묻혀 있던 좋지 않은 기억을 억지로 꺼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격을 재개했다.
검고 푸른 스파크가 사방에 튀었다. 물과 불이 적절하게 섞인 게이트 내부는 극적인 환경을 만들어 냈다.
띠링.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이빨을 드러냅니다.] [저 여자에게서 짙은 고양이 냄새가 난다며 강한 경계심을 품습니다.]‘……고양이?’
시우가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인간형 몬스터지 결코 야수형 몬스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한가로이 그녀를 관찰할 시간 따위 없었다. 일순 유하게 풀렸던 눈매를 바로잡고, 시우가 바닥을 향해 손짓했다.
주변에 있던 물들이 방울방울 솟아나기 시작했다. 물방울들은 시우의 곁에 모여, 곧 까마득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불꽃 덕분에 주변 얼음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렇듯 거대한 물보라를 소환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 호재였다.
쏴아아─
물보라는 움직이지 않는 먹잇감을 향해 흉포하게 돌진했다. 그것은 물보라라기보다는 차라리 해일에 가까웠다.
그녀가 해일에 삼켜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피하지 않았어.’
즉 피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
시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 그의 예상을 증명하듯, 그녀를 삼켰던 해일이 거칠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반은 증발했고, 나머지 절반은 뜨거운 수증기를 뿜으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은 푸쉭, 거센 소리를 내며 스팀을 뿜었다. 저기에 닿는 순간 고도 화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시우가 한 발짝 뒷걸음질 치던 그때,
“너와 얘기를 해 보고 싶었어.”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난 솜털이 삐죽 설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무의식적으로 마른 침을 삼킨 시우가 힐끔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새까맣고, 또 새하얀 여인이 웃고 있었다.
고혹적이며 인외적인 그 미소를 마주한 찰나 숨이 멎는 듯했다.
‘여기서 끝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조차,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죽음’이 비로소 눈앞에 형상화된 기분이었다.
“사실 인간이 그리웠나 봐.”
왼뺨 주변이 훅 뜨겁게 달아올랐다. 왼쪽 시야로, 아득하리만치 새까만 불꽃이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털썩─
“…….”
쓰러졌다.
“……?”
그러니까, 자신이 아니라 이 인간형 몬스터가 말이다.
시우는 뻣뻣하게 굳은 채, 자신의 어깨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우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장승처럼 우뚝 서서, 쓰러진 그녀의 뒤통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죽었나?’
아니, 아직 미세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는 것 같다.
쿠구구.
멀리서 게이트의 출구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스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째서 출구가 열린 거지? 이상하게 생각한 시우가 확인을 위해 그녀에게 손을 뻗은 순간.
반짝.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작은 빛이 났다. 이상하게 생긴 펜던트 아래로 무언가 납작한 것이 겹쳐져 있다.
‘……이건.’
시우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추었다.
──황금색 군번줄.
헌터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