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96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소리.
추격을 피해 사방팔방 뛰어다닌 통에 체력이 소진된 삭월대 무인들의 모습에 향이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거지새끼들.”
생각 같아서는 전부 죽여 버리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모가지를 베어서 산과 들을 피로 적셔 놓고 싶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그들의 목을 베고있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삼문협, 능운비와 약속한 장소로 가야만 했다.
천라지망에 틈이 생겼던 건, 자신들이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몸을 숨긴 사이 능운비가 움직여 준 덕일 것이다.
덕분에 활로가 열렸고, 포위망을 탈출할수 있었다.
북쪽이 아닌 남쪽이 먼저 비워진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자신들은 무인이지, 책상에 앉아서 머리나 굴리는 책략가가 아니지 않은가?
약속했으니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킨다.
그것이 그들이 할 일이었다.
또한, 자신들에게 활로를 열어 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능운비가 걱정이었다.
향이는 이미 보지 않았던가?
그가 구하려 하는 인물들은 지금의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실력이 못 된다는 것을…….
그런 와중에 포위망에서 벗어나자마자 빌어먹을 꼬리가 달라붙었다.
개방.
그 망할 놈들이 어찌 자신들의 흔적을 찾아냈는지 끈질기게 쫓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저 거리를 좁혀 압박해 올 뿐이었다.
향이와 삭월대는 그들이 포진한 곳을 피해 삼문협으로 열심히 질주했다.
“잠깐 멈춰.”
향이가 멀리 보이는 계곡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길게 늘어선 절벽 중앙에 뚫려 있는 단 하나의 길.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거지들을 피해 도착한 곳이 왜 하필 저곳이란 말인가?
더욱이, 만약 적들이 저곳에 덫을 쳐놨다면?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진퇴양난이다. 뒤쫓아 온 거지 떼가 퇴로를 막을 테니까.
하지만 보이는 길은 하나.
저곳이 삼문협으로 가는 가장 빠른길이었다. 길게 이어진 절벽을 봤을때, 우회한다면 최소 서너 배 이상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 아무래도 거지 놈들에게 몰이를 당한 것같다.”
“예?”
“놈들과 싸울 시간이 없어서 피해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놈들이 우릴 이쪽으로 몬 것 같네.”
향이의 말에 왕천과 주승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어찌할까? 방법은 두 가지다. 혹여 저들이 덫을 쳐 놨다고 해도 이대로 뚫고 나가는 것과 우회해서 가는 것?”
“……”
향이는 둘에게 의견을 물었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 난해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자칫 자신은 물론이고 그들 모두가 목숨을 잃을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왕천이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주군께서…… 저 너머에 홀로 계십니다.”
“……”
“어째서 천라지망이 해제되고 거지놈들이 저희의 뒤를 쫓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필시 주군께도 위험이 닥쳤을 것입니다. 우회할 시간 따윈 없습니다.”
왕천의 단호한 말에 주승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 이대로 들어갔다가 전부 죽을수도 있어.”
“시비님. 마교가 우회하는 것 본 적 있습니까?”
“……”
“설사 덫이라 해도 가야 합니다.”
왕천의 말에 향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이라고는 없는 멍청한 마교 놈들…….
어찌 된 게 니들은 직진밖에 모른단 말이냐?
“왕 호위장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는 호위입니다.”
“……”
“주군을 지키는 것이 저희의 임무이고,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이 가장 큰 명예입니다. 목숨을 아끼고자 우회해서 주군을 위험속에 내버려 두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이요, 불충입니다.”
주승마저 왕천의 의견에 동조하자 향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삭월대의 무인들?
이미 두 사람과 같은 표정인데 말해 뭐할까?
“멍청한 새끼들……. 하지만 좋아. 나도 계속 도망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향이의 말에 주승과 왕천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가야 할 길이라면, 죽음이 목전에 있다 하더라도 뚫고 가는 것이 진정한 마교인의 자세였다.
와중에 저 너머에 주군이 계실 텐데 머뭇거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결정을 내린 듯한 일행들의 표정에 향이가 잠시 숨을 고르고 결연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계곡을 통과한다. 뒤처지는 놈이 있든 말든 신경쓰지 않겠다.”
“예!”
“좋아. 내가 앞을 맡아 주지.”
향이가 계곡을 바라보며 양손에 비수를 힘껏 움켜쥐었다.
“가자! 멍청이들아!”
“예!”
전략 따윈 없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계곡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향이의 뒤로, 왕천과 주승, 삭월대가 긴 꼬리처럼 따라붙으며 달렸다.
그리고 멀리서, 계곡으로 사라지는 마교인들을 바라보던 개방의 거지가 입을 쭉 찢으며 웃었다.
“큭큭, 불나방 같은 놈들. 마교 놈들은 저래서 문제란 말이야. 도무지 전략적인 면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그러게요. 누가 봐도 함정임이 뻔한데……”
“덕에 우린 뒤만 막으면 되겠네. 신호를 보내라. 사냥감이 덫 안으로 진입했다고.”
수좌의 명에 또 다른 거지가 품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지익, 퍼엉!
줄이 당겨지고, 높이 쏘아져 오른 불꽃이 허공에서 화려하게 터졌다.
“가자! 놈들의 퇴로를 막는다!”
“예!”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호각 소리에 사방에서 거지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이내 마교인들을 쫓아 계곡으로 달려갔다.
* * *
삼문협과 로하구를 잇는 거대한 절벽에 자리 잡은 단 하나의 길. 입구와 출구는 넓었지만, 그 중앙부는 우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정무맹의 무인들을 이끄는 장로 남궁학은 삼문협으로 통하는 출구 인근, 길이 막 넓어지기 시작하는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전면에는 무인들을 부채꼴 모양으로 겹겹이 배치하고, 그 뒤에는 궁수들을 잔뜩 깔아 두었다.
만약 마교인들이 이곳으로 진입한다면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정말 이곳으로 을까요?”
“개방이 몰아넣었다고 했으니 오겠지.”
“하지만 함정임이 뻔한데……”
“그건 네놈이 마교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예?”
“그놈들은 말이야, 정말 미친놈들이거든.”
“……”
“목숨보다 명예를 더 중하게 여긴다고 해야 하나? 도망치거나 돌아가기보다는 싸우다 죽는 걸 택하는 놈들이 바로 그놈들이다.”
남궁학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던 그때.
퍼엉!
협곡의 위쪽 허공에서 불꽃 하나가 화려하게 터졌다.
“큭큭, 역시……. 저런다니까.”
마교인들이 협곡 내부로 진입했다는 개방의 신호였다.
“궁수는 시위를 당길 준비를 해라!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모조리 꿰어 버려라!”
“예!”
“무인들은 검을 뽑아 준비하라! 궁수들의 공격이 끝남과 동시에 놈들을 섬멸한다!”
개방의 신호와 동시에 남궁학의 명령이 내려지자, 사위에 일순간 긴장감이 가득해졌다.
부채꼴로 포진한 무인들이 눈에 힘을 주어 좁은 틈을 노려보았다.
싸늘한 긴장감에 땀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다수의 발소리. 마교도들이었다.
달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감에 따라, 정무맹 무인들의 심장 또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찌이이익!
이어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곧, 곧 모습을…….
남궁학의 눈이 커다랗게 부릅떠지던 그때.
슈아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뒤?
의아함을 느낀 남궁학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콰드드득!
“크아악!”
무언가 썰려 나가는 소리와 비명.
남궁학의 얼굴이 경악으로 얼룩졌다.
맨 뒤편에 서서 시위를 당기고 있던 궁수진의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 소리에 놀란 다른 무인들도 일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후우…… 다행히 늦지 않은 모양이네.”
궁수들의 진을 무너뜨린 곳에, 황톳빛 괴인이 얇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네, 네놈이 왜?”
흐른 땀에 흙먼지가 들러붙어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남궁학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마교 삼공자, 능운비.
별안간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남궁학을 발견한 능운비가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
“왜긴 왜냐? 내 새끼들 구하러 왔지!”
잔인한 웃음과 함께 휘둘러진 검의 궤적이 궁수들을 덮쳤다.
“끄아아악!”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궁수들이 지리멸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궁(弓)이라는 무기 자체가 근접전에서는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다가, 능운비와의 실력 차가 너무 현저했다.
능운비는 마치 먹잇감을 둘러싸고 으르렁거리던 늑대 무리 속에 뛰어든 범처럼 궁수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남궁학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처할 방도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개방의 흑견들이 놈의 흔적을 뒤쫓고 있지 않았던가?
분명 삼문협 근교를 뒤지고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놈이 이곳에서…….
“남궁 장로님! 명령을!”
머뭇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휘하 무인이 그를 독촉했다. 궁수들을 돕자면 포진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궁수진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제기랄! 선두의 일진과 이진은 대기토록 하고, 삼진은 속히 마교의 악적으로부터 궁수진을 구하라!”
“예!”
명이 떨어졌고, 무인들이 능운비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이까짓 놈들로…… 나를 막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무인들의 모습에 능운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기를 증폭시켰다.
월식, 누월!
후우웅! 콰아아앙!
마력이 가득하게 담긴 공격이 땅바닥을 후려쳐 터트리자, 범위 내에 있던 무인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하나 고작 무인들 몇 놈 잡기 위한것이었을까?
필요한 것은 폭발과 함께 시야를 부옇게 가려 줄 흙먼지였다.
“놈을 찾아라! 당황하지 마라!”
누군가의 외침.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새 좌측으로 이동한 능운비가 절벽 면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일 대 다수의 싸움이다. 일일이 하나하나 쓰러뜨릴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우웅!
거칠게 파고드는 마기에 비연검이 잘게 떨었다. 이어 검면에서 검은 마기가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위, 위강!”
강기의 근접한 무인들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기예.
능운비가 가진 모든 전력이었다.
되살아난 이후 무분별한 살생을 자제해 온 능운비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몸속의 마령신단이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깊이 내재된 폭력성이 깨어나 있는 상태였다.
“모조리 죽여 주마.”
흰자위 하나 남지 않고 검게 물들어버린 능운비의 눈에서 살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비연검에 어렸던 마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월식, 월광천하!
콰드득! 쾅! 콰쾅!
절벽 내부를 강타한 마기로 인해 수없이 많은 무인이 쓰러지자, 남궁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작 한 놈이거늘…….
어린놈이 뭐가 저리 강하단 말인가?
이리되면 전략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다.
애초에 목적은 능운비를 잡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차피 개방도 협곡 뒤편에서 쫓아 들어오고 있으니…… 일단 능운비부터 잡는다.
“선두의 일진을 제외하고 모두 능운비를 공격해라! 놈을 잡아라!”
명령과 함께 진의 일 열을 제외한 모두가 능운비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쉬아아악!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줄기 섬광처럼 날아온 향이의 비수가 남궁학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장 새끼…… 조잘조잘 시끄러워 죽겠네.”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모두가 놓쳐버린 그녀의 움직임.
툭 하니 떨어진 남궁학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허무한 그의 죽음에 마교인들이 협곡을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리던 포위망 일 열의 무인들이 넋을 놓고 향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모조리 죽여라!”
왕천과 주승, 삭월대가 포위망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