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16
#1115.
겁박하다 (5)
“워워, 진정하시지요.”
이현수가 양손을 들어 올리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반항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호오?”
예상 밖의 반응이라는 듯이 나이트 크라머르가 콧소리를 냈다.
“덤비지 않는 건가?”
“제가요?”
에이, 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그럴 생각 없습니다만.”
“흠, 상황 파악이 안 된 건가? 나는 지금 자네를 잡으러 왔네.”
“그야 뭐,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설마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여기까지 오시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나이트 크라머르가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놈은 좀 이상하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인이란 기본적으로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족속들이다. 타인의 힘에 억눌린다는 건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치욕이나 다름없다.
강진호에게 굴복한 그들이 얼마만큼 큰 굴욕감을 느꼈는지를 감안한다면, 지금 이놈도 분노로 떨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이현수에게서 분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으로 아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뭐…….”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 심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내가 당장 네 목을 꺾어버릴 수도 있는데? 내가 자네를 죽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1초 이상은 걸리지 않겠죠. 하지만…….”
이현수가 씨익 웃었다.
“명예를 아시는 나이트께서 설마 일반인을 죽이기야 하시겠습니까?”
“……일반인?”
“네, 일반인.”
“아무리 봐도 자네는 일반인 같지는 않은데?”
“그건 기준에 따라 다른 법이죠. 이렇게 묻죠. 무학을 처음 익힌 다섯 살짜리 꼬마와 이종격투기 헤비급 챔피언 중 누구와 싸우는 게 더 불명예입니까?”
“…….”
뭐라는 거야?
나이트 크라머르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말씀하시는 무인과 일반인의 경계라는 게 그리 간단하게 결정 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사실 그건 정확하게 말하자면, 약자를 괴롭히지 말라 아닙니까.”
“그렇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당신께 나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약자죠. 저를 힘으로 겁박한다면 일반인을 괴롭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허.”
나이트 크라머르가 피식 웃고 말았다.
“입은 살았군.”
“또 이러면 어떨까요?”
이현수가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반항하지 않습니다.”
“…….”
“잡아가시든 포대에 넣어 가시든 마음대로 하시지요. 원탁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겠습니다. 절대 저항하지 않죠. 설마 무저항인 자를 겁박하시진 않겠죠?”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이놈은 제정신이 아니다.
당황한 것은 나이트 크라머르만이 아니었다. 미첼 역시 황당하다는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당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는 건가요?”
“빤한 소리를 하시네요. 죽일 거라면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죠. 그냥 집무실에서 죽여 버리면 끝 아닙니까? 나를 죽이는 건 당신에게도 간단한 일이니까.”
“…….”
“어차피 죽이든 납치하든 원탁 안의 모든 CCTV를 무력화하지 못했다면 당신이 여기서 달아나야 하는 건 같은데, 굳이 이런 귀찮은 방법을 써서 날 죽일 필요가 없죠. 당신들의 목적은 저를 생포하는 거 아닙니까?”
미첼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이현수를 생포하는 것이다. 지금 이현수를 죽이는 건 그냥 전쟁을 하자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그건 나이트들이 절대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였다.
물론 조그만 생각을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평소에 할 수 있는 추론을 이런 상황에 아무런 흔들림 없이 해낸다는 게 대단한 거다. 나이트 크라머르는 이현수의 입장에서는 절대의 강자.
그와 지근거리에서 조우한다는 걸 평범한 이들의 상황으로 비교하면, 평소에 원한이 있는 자가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냉정하게 상대방의 움직임과 자신의 대처를 확정한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원탁에서 수많은 이들을 봐온 미첼조차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보다 왜 마스터를 배신하시는 겁니까?”
되레 질문까지?
이제는 화를 낼 기분도 들지 않는다.
“딱히 배신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마스터의 비서이기는 하지만, 제가 지키는 것은 마스터가 아니라 원탁이니까요. 원탁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옳게 바꾸는 게 원탁에 소속된 이가 해야 할 일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잘못된 방향?”
“옆에서 보면 알게 되죠. 어느 순간부터 마스터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요. 당신들이 결정을 내리고 마스터는 그저 따를 뿐이죠. 저는 원탁이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흐음, 확실히 그렇겠네요. 인정합니다.”
미첼이 본다면 그럴 수 있다.
마스터의 비서라고 해서 너무 믿은 것이 실수였다.
마스터가 원탁을 장악했다는 것이 원탁에 소속된 이의 절대적인 충성을 얻어냈다는 뜻은 아니다. 이곳은 총회가 아니라 원탁이니까. 그가 지금 하는 것은 권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굴종시키는 일이었다.
‘꼭 나이트만 튀는 건 아니었을 텐데 말이지.’
나이트라는 존재감에 눈을 빼앗겼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실수였다. 놓쳤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백 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실수도 한 번 문제가 되면 커지기 마련이다.
“희한한 놈이군.”
나이트 크라머르가 피식 웃었다.
“꽤나 사내답다는 건 인정해 주지. 하지만 너는 곧 후회하게 될 거다. 네 목숨은 살려둘 수 있지. 하지만 그게 네놈을 그저 내버려 둔다는 말은 아니다.”
우드득.
나이트 크라머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알고 있는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뱉어내게 해주지.”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이해를 못하는 건 그쪽 같은데요.”
“뭐?”
“말합니다.”
나이트 크라머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굳이 힘을 뺄 필요 없습니다. 물어보는 건 모두 대답할 테니까요. 말씀만 하시죠. 총회가 어떤 곳인지, 우리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강진호 씨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마스터의 약점은 무엇인지.”
“…….”
“그저 사실에 멈추지 않고, 개인적인 의견과 컨설팅까지 포함해서 무엇이든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저희 집 옷장에 제 팬티가 몇 장 있는지까지 대답을 해드리죠. 다만, 개인적인 흑역사에 대한 질문은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갈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도 이불이 있다면 걷어차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미친놈.”
“아, 네. 물리적인 폭행이 없다면 모욕이나 정신적인 괴롭힘은 적당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의 조건은 당신들이 제 몸을 혹사시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뤄집니다. 어설프게 제게 폭행을 가하는 순간, 저는 목이 떨어져도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제가 한 말은 꼭 지킵니다.”
물론 이건 거짓말이지.
니들이 알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이현수가 눈에 힘을 줬다. 어쨌든 이 말이 진정성 있게 들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솔직히 지금 좀 위기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
나이트 크라머르는 조금 질린 얼굴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자네를 잡은 것이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군.”
“아, 그건 오해입니다. 대충 노려질 수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원탁 안에서 납치를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넓은 곳이다 보니 마스터의 손이 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감안했어야 하는데……. 하기야 그걸 다 알 수 있으면 사람이 아니겠죠. 그리고 일단 저는 기본적으로 제 목숨을 걸지는 않습니다. 그건 도박일 분이죠.”
“그럼 뭐지?”
나이트 크라머르가 이현수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움켜잡아 벽으로 들이받았다.
쿵!
뒷머리가 벽에 부딪친 이현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걸로 다음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하?”
나이트 크라머르가 이현수의 아래턱을 잡아 조이며 물었다.
“너에게는 충성심이라는 게 없나? 이렇게 손쉽게 아군을 배신해도 되는 건가? 인간적인 경멸까지 생길 정도군.”
“……멍청한 소리를 태연하게 지껄이시네요.”
“뭐?”
“듣고 싶으면 이 손 놓으시죠.”
이현수의 눈이 칼날 같은 살기를 머금고 나이트 크라머르를 노려보았다.
그 기세에 살짝 눌린 나이트 크라머르가 이현수의 턱을 잡은 손을 놓았다. 이현수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나는 지금 배신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완벽하게 충성하고 있는 거죠.”
“……무슨 개소리냐?”
“총회와 회주님이 이런 상황에서 제게 뭘 바랄 것 같습니까?”
이현수가 으르렁대듯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입을 다물고 충성하며 죽는 것? 옛날이야기 속의 충신들이 그러는 것처럼 적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며 호통을 치다가 목이 날아가는 것? 천만에!”
이현수가 이를 갈았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상처 하나 없이 돌아가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거름을 씹고, 오줌을 마셔서라도 반드시 멀쩡한 상태로 돌아간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합니다. 할 수 있다면 회주를 팔아넘겨서라도!”
이현수의 눈에 핏발이 섰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갑니다. 그게 진짜 충성이니까.”
“…….”
“그러니 나를 이용하시죠. 저는 좋은 정보처가 될 테니까요. 아, 제공하는 음식이 좋고, 대우가 올라갈수록 제가 제공하는 정보의 질도 올라갈 겁니다. 원탁에 와보니 대접받는 것만큼 좋은 게 없더라구요. 그럼 너무 지체한 것 같은데, 이만 가실까요? 시간을 더 끌면 누군가 알아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
가만히 이현수를 노려보던 나이트 크라머르가 순간적으로 이현수의 목을 잡고 조였다.
“끅.”
경동맥을 조인지 몇 초 만에 이현수의 의식이 날아갔다.
털썩.
기절해 바닥에 쓰러진 이현수를 보며 나이트 크라머르가 혀를 내둘렀다.
“뭐, 이런 인간이…….”
평범한 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위긴스를 한발 물러서게 만드는 남자니까. 마스터의 뒷자리에서 그를 보좌하여 의견을 말하던 게 위긴스가 아니라 이 사내라는 것만으로 이 사내의 대단함은 증명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건 대단함의 종류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총회 놈들은 다들 이런가?”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 있다.
이현수는 강하지 않다.
나이트 크라머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목을 분질러 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나이트 크라머르는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 있는 상대에게 공포를 느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섬뜩함이 밀려왔지만, 이미 내친걸음이다. 여기서 되돌릴 수는 없다. 여기서 멈추는 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원탁을 빠져나간다.”
“예, 나이트 크라머르.”
미첼이 준비된 커다란 가방에 이현수를 구겨 넣는 모습을 보며, 나이트 크라머르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