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69
#1868.
기다리다 (3)
“뭐, 뭐야!”
이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후, 그의 고개가 부러질 듯 한쪽으로 꺾어졌다.
‘뭐지, 이거?’
어마어마한 기운이다.
기운에 민감하지 못한 반쪽짜리 무인인 그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기운!
‘습격인가? 삼왕급?’
아니, 아니다.
기운은 어마어마하지만, 이 기운에는 적의가 어려 있지 않다. 공격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서, 설마?’
기운이 뻗어오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를 가늠한 이현수의 눈이 확 커졌다.
“이쪽은?”
몸이 먼저 움직인다.
이현수에게는 웬만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머리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온 이현수가 달리고 또 달린다. 마침내 목적하는 곳에 도착한 이현수가 본 것은 익숙한 이의 등이었다.
‘틀리지 않았군.’
강진호가 이미 도착해 있다.
낮게 들썩이는 강진호의 어깨를 본 순간, 이현수의 입가에 어찌할 수 없는 웃음이 피어났다. 저 대단한 양반이 조금 달린 정도로 숨을 헐떡이다니, 얼마나 격하게 달려왔으면 저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회주님.”
“음.”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이현수를 바라본다.
“이거 혹시…….”
“아마도.”
강진호의 시선이 지하에서 수련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석실의 문에 고정되었다.
“……나쁜 일은?”
“그렇지는 않겠지.”
만약 폭주가 일어났다면 이 문이 이리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운이 폭발하며 공간 자체를 날려 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문은 멀쩡하다.
다시 말해…….
“넘었군.”
강진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 과하게 흘러넘치는 기운이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어느 쪽입니까?”
“바토르.”
강진호가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마도.”
그 한마디에 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는 몰라도 대충은 강진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이현수가 기대감을 품고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럼 곧 쿵쿵거리면서…….’
바토르의 발소리야 누구라도 들을 수 있으니까. 자신의 존재감을 숨길 생각이 없는 바토르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무게가 만들어내는 발소리를 죽이지 않는다.
그건 바토르에게 있어서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니 곧…….
덜컹.
“응?”
이현수가 움찔하며 문을 바라보았다.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문이 덜컥댄다고?
‘뭐가 잘못됐나?’
순간적으로 일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그때.
그그그극.
육중한 문이 바닥에 끌리는 거친 마찰음과 함께 철문이 좌우로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우웅!
이윽고 활짝 열린 철문 뒤에서 어둠에 반쯤 가려진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지?’
이현수가 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바토르 님이 아닌가?’
그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강진호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강진호를 확인한 이현수는 다시 한번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웃음?’
뭔가 비틀린 웃음.
평소에 잘 보여주는 웃음이 아니다. 마치 전투를 앞에 둔 강진호의 얼굴 같았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이거…….”
‘바토르 님?’
목소리는 확연히 바토르의 그것이다. 하지만 이현수는 그 순간 극심한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어둠 안에 반쯤 잠긴 실루엣에서는 바토르 특유의 어마어마한 덩치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저 모습 자체로도 건장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거대하지만, 원래 바토르에 비한다면 반도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게 뭔…….”
그 순간,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실루엣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가 아는 바토르의 것과는 다른 발소리.
묵직하지만 과도하게 쿵쿵대지 않는 발소리가 이어지고, 마침내 어둠 속에 있던 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어?”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벌렸다.
바토르.
바토르다.
하지만 이건 그러니까…….
“……소짜?”
“……적어도 미니 사이즈라고 해라.”
바토르가 눈을 확 찌푸렸다. 바깥으로 와 처음 듣는 말이 소짜라니. 저 썩을 놈이.
“왜, 왜 이렇게 작아지신 겁니까, 바토르 님?”
“흥.”
바토르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겉모습은 분명 바토르다. 그 단단해 보이는 팔과 다리도, 여전하다. 얼굴은 기억하는 것보다 뭔가 조금 어려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바토르다.
다만, 그 덩치가 반쯤으로 줄어들었을 뿐.
이전에는 과연 이 사람에게 맞는 옷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의문을 일으키던 덩치가, 그래도 ‘사람’이라는 규격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육체가 재구성되더군. 이게 환골탈태인가 뭔가라는 거겠지.”
“……바토르 님이 환골탈태를 하면 더 커질 줄 알았는데.”
미묘한 얼굴을 한 이현수를 보며 바토르가 피식 웃었다.
“실망시켜 미안하군.”
“…….”
이현수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묘하다.
과거의 바토르라면 절대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한다고 해도 조금 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따지듯이 말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바토르에게는 과거에는 없던 묘한 여유가 느껴졌다.
그 어마어마한 육체를 바탕으로 한, 드높아 부러질 것 같은 오만함이 아니라 부드러운 여유가 말이다.
‘벽을 넘는다는 건 이런 건가?’
무력이 높아지는 건 당연하겠지만, 성격까지 변한다고?
‘아니, 아니지.’
성격이 변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설픈 부자는 허세를 떨고 비싼 물품으로 자신을 치장하지만, 진짜 돈이 썩어나는 이들은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법이니까.
충분히 강하지 못한 이는 자신의 강함을 어필해야 하지만, 진짜 강함을 손에 넣은 이는 굳이 그런 것을 입 밖으로 내고 소리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바토르 님이 정말 강해졌다는 뜻이겠지.’
이현수가 나름의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바토르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돌아간다.
“주인.”
“음.”
“이거…….”
강진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바토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좀 붙어볼 만한가 싶었더니…… 이건 숫제 괴물이로군.”
강진호가 옅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내 눈에 이게 안 보였다는 건가?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었군.”
“그걸로 좋아.”
“음?”
강진호가 웃으며 말했다.
“너는 그걸로 좋다.”
“…….”
그 말을 들은 바토르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왔다, 주인. 이제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주인을 지켜줄 테니까. 청마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더는 떨지 않아도 된다.”
“건방진.”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강진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뭘 봤지?”
“음?”
잠깐 강진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바토르가 아, 하고 탄성을 내더니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원을 봤다.”
“초원?”
“그래. 내 안에는 그게 있더군, 주인.”
바토르기 부드럽게 웃는다.
“거기에 자유가 있었다. 내 피와 내 영혼에 깃들어 있던 자유.”
“흠.”
강진호가 뚱한 얼굴을 한다.
“거창하군.”
“……사람이 진지하게 말을 하는데.”
바토르가 이를 갈며 말한다.
“그런 주인은 뭘 봤는가?”
“나는 그런 것 없었어.”
“……응?”
강진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보통 벽을 뛰어넘는 이들은 무언가를 본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냥 물어본 것 뿐이야.”
“아, 아니, 잠깐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말이 나왔던 것 같은데? 주인에게는 없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마인에게 있어서 벽을 넘는다는 건 극마에 든다는 걸 의미한다. 일반적인 무학을 익힌 이들과는 조금 다르지.”
“그래서?”
“보통은 지금 장민처럼 일반적으로 벽을 넘는 이들과 비슷한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냥 싸우다 보니 알아서 넘어서 있었다.”
“…….”
바토르의 두 눈에 짙은 허망함이 어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본 이현수가 마음 속 깊이 바토르를 동정했을 정도다.
“그……냥 넘어 있었다고?”
“그렇더군.”
“그럼 난…… 나는 대체…….”
광활한 바토르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모습을 본 강진호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나 같은 경우가 일반적인 건 아니라더군.”
“그야 그렇겠지, 이 빌어먹을 주인 놈아! 내가 뭘 겪은지는 아는 거냐?”
“알지.”
강진호가 딱 잘라 말했다.
“너는 이제 고작 한 번 넘었을 뿐이야.”
“…….”
“벽은 수없이 찾아온다. 걷다 보면 다시 머리를 부딪치게 되지. 무학이란 그 벽을 넘고 또 넘는 일의 연속일 뿐이야.”
바토르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맞는 말이다.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드높은 벽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이보다 더 높고 가파른 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아간다는 것은 그런 거니까.
“그래도…….”
“음?”
“잘했다.”
“…….”
씩 웃으며 말하는 강진호의 얼굴을 본 바토르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좀 더 칭찬해라, 주인!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 버리면 내가 한 게 별것 아닌 것 같지 않은가!”
바토르가 강진호에게 달려들더니, 그의 어깨를 움켜잡고 확 당겼다.
“뭔가 좀 더 기분 좋을 만한 말은 없나? 지옥을 보고 왔더니,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찬다!”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유는 개뿔이.
사람 성격이 어딜 가겠는가.
특유의 오만함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바토르는 결국 바토르일 수밖에 없다.
“듣기 좋을 말이라…….”
강진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해볼 만하겠지.”
“응?”
“그놈 말이야.”
“…….”
강진호의 어깨를 흔들어 대던 바토르의 손이 멈춘다.
그와 동시에 바토르의 얼굴에 귀신과도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백연홍.”
“그래.”
강진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낸 바토르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은 부족하겠지.”
“잘 아는군.”
“하지만 나도 지금 완성된 것은 아니다. 지금 얻은 것들은 조금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완전히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 그렇지.”
“그럼 그때는!”
바토르의 눈이 광망을 내뿜었다.
“그놈은 내 거다, 주인.”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뺐을 생각인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야.”
“…….”
강진호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바토르가 수련을 한 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문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순순히 내어줄지 모르겠군. 저쪽도 욕심이 많아서.”
바토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영감은 아직인가?”
“아마도.”
“중간에 좋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주인이 알아서 할 것이라 나오지는 않았다만.”
“맞다. 장민이야.”
“……그런가?”
바토르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이 과정을 겪어보니 장민이 어떤 처지에 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제압이 되었을지도.
조금만 방향이 틀어졌다면 바토르 역시 별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완전한 마인인 장민보다 그가 가진 무학의 안정성이 조금 더 높았을 뿐.
“괜찮겠나?”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강진호의 시선이 장민이 있을 지하로 향했다.
“그저 믿을 뿐이지.”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란 걸.
그저 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