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15
#1914.
내리밟다 (4)
콰르르르릉!
벼락이 치는 소리.
아니, 산이 무너지는 소리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뭐가 더 어울리는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폭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말도 안 되는 경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이게 뭔…….’
신창이 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다.
그러자 그를 향해 밀려오던 황금의 해일이 좌우로 확 갈라진다.
그의 창은 강을 가르고 바다를 가른다.
하지만 그건 일순간일 뿐, 좌우로 갈라진 경기가 마치 물이 빈 공간을 채우듯 확 밀려들어 다시 솟구쳤다.
“큭!”
전투를 시작한 이래 신창의 입에서 처음으로 낭패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홍왕!’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무인들에게 있어서 삼왕이란 이름이 가지는 의미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신창에게 있어서만큼은 삼왕이라는 이름을 부질없는 허명에 불과했다.
그들이 이 시대의 패자라고는 하나, 신창을 비롯한 십이비도 역시 한 시대의 절대자였던 존재들.
그 기라성같은 무인들이 횡행하던 시대의 정점에 오른 그가 이 저열한 시대를 지배하는 이를 존중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게 홍왕을 마주하기까지 그의 생각이었다.
하나 지금 그는 자신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내력이…….’
흑왕과 그의 신체적 나이는 비슷할 것이다. 그는 이 육체로 돌아온 순간부터 그가 아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내력을 모아왔다. 지금 그의 내력은 심지어 과거 그가 중원을 지배했을 때의 내력조차 능가했다.
하지만 홍왕의 내력은 겨우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동일한 세월을 살아온 두 사람의 내력이 이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은 불공평을 넘어 불합리의 영역이다.
아무리 체질과 무학, 그리고 재능의 여하에 따라 동등한 노력으로도 모으는 내력의 양이 차이가 날 수 있다지만, 그 차이가 여기까지 와버리면, 체질의 차이라기보다는 종족의 차이라고 봐야 할 정도가 아닌가.
기이이잉!
“큭!”
뻗어낸 창끝이 비명을 내지르며 낭창하게 휘어진다.
장력의 해일에서 뻗어 나오는 압력이 창을 넘어 그의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전신의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갈 것 같은 압력.
몸이 으스러지고 영혼이 눌려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압력이다.
“후!”
짧게 숨을 내쉰 신창이 창을 뒤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이어 마치 투창을 위한 자세처럼 몸까지 뒤로 뒤튼 신창의 입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타아아아아압!”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창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전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그건 마치 커다란 섬광이 뻗어 나가는 광경 같았다.
밀려오는 황금의 바다를 백색의 빛이 꿰뚫는다.
한 번! 또 한 번! 또 한 번!
빛의 창이 연이어 쏟아진다. 마치 하늘 위에서 신이 내리는 신벌처럼.
신창의 내력으로 이 많은 범위를 점해오는 홍왕의 장력을 모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는 그저 그의 앞을 덮치는 장력을 뚫어내면 그만이니까.
직선적인 공격.
찌르는 공격으로는 누구도 그를 당할 수 없다.
신창관일.
그의 창은 해조차 꿰뚫는 창. 그런 그의 창 앞에서 이따위 바다는 아무것도 아니다.
고오오오오오!
평생을 익혀온 현천진기(玄天眞氣)가 그의 몸 안에서 용솟음쳐 창끝에 모인다.
“타아아아아아압!”
이어지는 발출.
찌른다.
휘두른다.
결국 모든 공격이란 그 둘에서 크게 벗어나는 법이 없다.
점창의 무학은 그저 간결하고 단순하다. 찌르고, 찌르고, 더 빨리 찌를 뿐이다.
군더더기를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간결함만을 극한까지 추구한 무학. 그 무학이 극성에 오르면 세상 무엇보다 빠르고 강렬해지는 법!
‘일섬(一閃)!’
관일창의 오의를 완연하게 담아낸 창이 앞으로 뻗어진다.
지금까지의 창격처럼 번쩍이지도, 맹렬하지도 않았다.
그저 빠른, 더없이 빠른!
섬전과도 같은 창격이 밀려오는 바다를 마치 통과하듯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촤아아아악!
찰나의 순간, 바다를 갈라낸 창격이 그 바다의 뒤에서 장력을 뿜어내던 홍왕의 육체를 향해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세상을 뒤덮은 장력의 바다가 통제를 잃고 사방으로 휘몰아친다. 신창이 창을 휘둘러 자신에게 밀려오는 장력을 후려치고 밀어냈다.
우득! 우드득!
창을 잡은 손은 물론이고, 어깨까지 압력에 짓눌린다. 살이 검게 죽고, 뼈가 압력을 이기지 못해 우득거리며 비명을 질러 댔다.
“타아압!”
크게 창을 휘둘러 남은 장력을 모조리 날려 버린 신창이 깊은 숨을 토해냈다.
“후욱!”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어깨가 쉴 새 없이 들썩인다.
대체 언제 이렇게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무학을 펼쳐 보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다.
얼굴을 적신 땀을 훔쳐 낸 신창이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홍왕.
황금의 장포를 입은 홍왕이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신창처럼 땀에 젖지도 않고, 호흡이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투두둑.
소매에 반쯤 가려진 홍왕의 손을 타고 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흠.”
홍왕이 굳은 눈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신장(神將)의 손처럼 두껍고 커다란 손바닥에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신창이 날린 일섬이 홍왕의 육체를 꿰뚫어낸 것이다.
꾸우우욱!
홍왕이 구멍이 뚫린 손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흘러내리던 피가 금세 멎었다. 하지만 장력을 뿜어내야 할 손에 부상을 입었다는 것은 그리 만만히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홍왕의 눈과 신창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강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 법.
홍왕은 신창조차 목숨을 걸고 상대해야 할 만한 강자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둘의 차이는 그날의 운에 따라 승부가 갈릴 만큼 미세했다.
그렇기에…….
‘피가 끓는군.’
신창의 두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목숨이 오가는 승부를 즐기지 못하는 이가 시대의 정점에 오를 수는 없는 법.
홍왕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심장은 활력을 찾고, 굳어 있던 뇌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좀 더…… 좀 더!’
신창이 막 움직이려는 찰나.
“너와 같은 이가…….”
“음?”
굳이 대화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 홍왕이 입을 열었다.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신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열둘이나 더 있다는 건가?”
“……열하나지.”
하지만 그 말만은 정정해 주지 않을 수 없다.
“흑왕께서는 감히 우리와 함께 엮일 만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 계시지.”
“열하나라…….”
홍왕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잘도 그만한 이들이 서로를 인정한 채 살아왔군.”
“그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비웃음 어린 신창의 시선이 홍왕을 꿰뚫었다.
“하지만 너는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슬로 엮어 묶어두지 않았더라면, 너는 이미 산목숨이 아닐 테니까.”
“…….”
홍왕은 그 말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신창에게서 패배를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만한 이가 열둘, 거기에 창왕까지 함께 중원에 난립했다면…… 지금과 같은 구도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난세에서는 반드시 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신창의 말은 딱히 틀림이 없는 말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가지 않는군.”
홍왕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쯤 되는 이들이 목숨이 아쉬운 건 아닐 터.”
“…….”
“더 강한 이와의 승부를 갈망하고, 목숨을 걸 만한 도전을 꿈꾸는 너희가 어째서 흑왕 아래에서 개처럼 굴고 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군. 대체 뭘 하고 싶은 것이냐?”
홍왕이 미간을 좁혔다.
이만한 자들이 열하고도 둘. 그 전력만으로도 홍왕계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 그만한 전력이라면 홍왕계만으로는 상대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이들이 모습을 드러낸 게 바로 지금이 아니라 홍왕과 창왕이 서로 전력을 갉아먹던 시절이었다면, 지금보다 배는 수월하게 중원을 접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외적이 나타나면 내부가 뭉치는 법이라지만, 창왕과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 손을 잡는 게 불가능한 관계였으니 말이다.
저들도 그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때가 아닌 지금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인가.
“뭘 하려고 하는 거냐?”
“흐음, 실망이군.”
“음?”
신창이 가볍게 창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그런 부분에 궁금함을 느끼는 것부터 네가 순수한 무인은 아니라는 의미지.”
“…….”
“홍왕계의 수장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진짜 무인은 서로 이를 드러내는 순간, 그런 사소한 건 잊어버려야 하는 법.”
홍왕의 눈이 다시 가라앉았다.
“잡생각을 가진 채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홍왕?”
“……내가 무례를 저질렀군. 사과하지.”
홍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창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만한 무인을 앞에 두고 다른 의문을 가지는 건 오만한 일이다.
생각은 승부를 가르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너는 그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신창이 이를 드러낸다.
“죽은 이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야.”
“건방진 놈이…….”
“간다!”
신창이 바닥을 박차며 홍왕에게 날아들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드는 그의 창이 그 육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홍왕을 찔러 들어갔다.
마치 정지된 세상에서 그의 창만이 고속으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속도. 느리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창끝에 밀려난 공기의 파동이 생생하게 보일 정도다.
쿵!
그 순간, 홍왕 역시 진각을 내리밟았다.
좌우로 벌린 발이 굳건하게 육체를 받치고, 허리 어림에 고정된 정권과 쫙 펼쳐든 반대 손이 더없이 안정적인 형상을 만들어낸다.
펼쳐든 손이 부드럽게 움직여 그의 가슴을 찔러 들어오는 창의 창대를 가볍게 밀어낸다.
느릿하게 보이지만 섬전과도 같은, 더없는 강함을 완벽한 부드러움 속에 녹여낸 방어.
턱!
창대를 밀어낸 홍왕의 정권이 앞으로 솟구쳐 나가려는 순간.
파아아앗!
밀려 나가던 창이 벼락같은 속도로 회수되어 재차 홍왕을 찔러 들어간다.
파앗! 파아아앗! 파앗!
창끝이 갈라지고 또 갈라지며 수백 개의 창영을 만들어낸다. 마치 한 몸뚱아리에 수백의 머리가 달린 뱀과 같은 형상이 된 창이 홍왕의 전신을 뒤덮어왔다.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라는 말을 증명하듯, 앞으로 뻗어지려던 홍왕의 정권이 감히 나가지 못하고 빠르게 방어로 전환된다.
홍왕의 양손이 수많은 수영을 만들어낸다. 마치 천수관음의 손처럼 불어난 손이 날아드는 창격을 일일이 막아낸다. 거기에서 더 불어난 손이 둘의 사이에 벽을 이루어낸다.
장벽(掌壁).
물방울 하나 통과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방어였다.
하지만!
파아아앗!
물샐틈없이 완벽하게 시전된 장벽의 사이로 한 줄기 빛살이 뿜어져 나온다.
틈이라는 것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듯, 수영과 수영이 맞닿는 지점을 강렬하기 짝이 없는 찌르기가 꿰뚫는다.
‘뭣?’
천하의 홍왕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가 당황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이끌어내기도 전에 섬전이 된 창이 더없이 강렬하게 날아들어 그의 어깨에 인정사정없이 박혀든다.
콰드드드득!
과거에서 온 창이 이 시대를 지배하는 절대자의 육체를 꿰뚫어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