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432
#431.
대면하다 (1)
“요동치고 있습니다.”
나이트 위긴스는 관자놀이를 살짝살짝 눌렀다.
“중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홍왕계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연하고, 창왕 본인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물밑에서는 뭔가 획책하고 있는 듯합니다.”
“획책이라…….”
위긴스가 한숨을 쉬었다.
“동양 놈들은 속이 검다니까. 차라리 대놓고 움직여 준다면 우리가 대응하기도 쉬울 텐데 말이지.”
“그렇습니다.”
위긴스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기색이 없었다.
‘음흉한 놈들.’
동양인들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고는 하지만, 동등한 세력 셋이 수십 년 동안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유럽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가라는 경계선으로 서로를 갈라놓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살아남을 때까지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승자가 패자를 흡수하는 것이 이쪽의 방식이었다.
하나 동양 놈들은 당장의 싸움을 미루고 힘을 키워 나가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이 꼴이지.’
중국의 삼왕이 승부를 가리려 든다면 그 여파는 전 세계에 미칠 것이다. 그만큼이나 삼왕이 쌓아 올린 세력은 어마어마했다.
“일본 쪽은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상하다고?”
“예.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나름의 회합을 가진 것 같은데, 그 결과 골이 더 깊어진 느낌입니다.”
“골이 깊어져?”
위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여자와 대화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맞장구만 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지만, 워낙 황당한 말만 들리니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골이 깊어지다니…….”
“각 구미의 실무자들과 대표자들이 회합을 가졌는데, 그 와중에 서로의 원한이 깊어진 모양입니다.”
“……정말 이해를 못하겠군.”
위긴스가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스스로 상식인이라 자부하는 위긴스다. 당연히 인종차별 같은 저열한 짓을 할 생각이 없다. 하나 인종이 다르면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일본 쪽은 합리성보다는 미학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됐다.”
위긴스가 손을 휘저었다.
“골치가 아프군.”
위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심상치가 않아.’
세상이 요동치고 있었다. 단순히 어느 한곳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동에서는 광신도들이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겠답시고 설쳐 대고, 유럽 역시 심상치가 않았다.
사실 유럽이란 곳은 워낙에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국가가 난립하는 곳이다 보니 언제나 다소간의 충돌은 있어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하나로 묶여 있던 유럽이라는 연합 자체가 깨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미국이 잠잠한 것이 다행이지만…….
‘동아시아는 이제 화약고가 되어버렸다.’
중국과 일본의 존재만으로 동아시아는 예전부터 세계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 중 하나였다. 하나 무인계에서는 그 의미가 다르다.
가장 많은 무인과 가장 강한 무인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곳이 동아시아였다. 특히나 중국은 드러난 고수들보다 숨어 있는 고수들이 더 많다고 평해지는 곳이다. 그런 곳에 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강진호라…….’
폭탄이 폭탄인 이유는 피아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진호는 폭탄이라는 말에 가장 걸맞은 이였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동아시아를 뒤흔들고 있다. 자신이 그걸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다.
‘제거해야 하나.’
고심할 수밖에 없다.
과거였다면 강진호를 제거하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강진호를 제거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그 새 위긴스가 인도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제거하는 것으로 동아시아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강진호라는 뇌관은 이미 동아시아에 불을 붙였다. 지금 상황에서 강진호를 제거해 버린다면, 한국은 구심점을 잃게 된다. 일본이나 중국이 당장 한국으로 침공해 들어가지 않는 이유가 한국을 일거에 쓸어버릴 전력을 동원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임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골치가 아프군.”
이 빌어먹을 편두통은 이제는 약도 잘 듣지 않는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마스터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왔는지 요즘 새삼 느끼게 되는군. 고려해야 할 곳이 많으면 이토록이나 골치가 아파진다는 것을 전에는 미처 몰랐어.”
위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은 나이트에게 부여된 신성한 의무였다. 나이트에게 주어진 의무는 차라리 축복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이트가 되기를 소망하는가. 어설픈 이들에게는 그 존재조차 드러내지 않는 곳이 원탁이고, 나이트다. 그가 앉은 자리의 신성함을 생각한다면, 감히 앓는 소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강진호는 누가 감시하러 갔나?”
“그게…….”
퍼비스가 우물쭈물거리자 위긴스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원래는 헤더에게 일을 맡겼습니다만, 헤더에게 일이 생겨서 다른 사람이 가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위긴스가 살짝 불안을 느꼈다. 그 ‘다른 사람’이 평범한 이였다면 퍼비스가 저런 식으로 말끝을 흐리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위긴스의 눈치를 살핀 퍼비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엘레나입니다.”
“…….”
순간, 공기가 멎은 것 같았다.
침묵.
아주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그 조용한 침묵이 퍼비스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엘레나?”
“예.”
“그 녀석이 강진호를 감시하러 갔다고? 엘레나가?”
“……그렇습니다.”
“사안의 경중을 모르는 건가?”
“알고는 있습니다만, 현재 가용 가능한 인원 중에서 한국에 파견할 만한 이가 그녀밖에는 없었습니다. 일단 무엇보다 한국어가 가능한가가 가장 우선이라…….”
“……자네, 혹시 말일세.”
“네?”
위긴스가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아스피린 가진 것 좀 있나?”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 * *
금발 여인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저 여자는 왜 갑자기 저리 화를 내는 거지?’
금발 여인이 보고서에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최연하.
한국의 톱스타이고, 중국과 일본에도 나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배우였다. 연기력으로 정평을 받은데다가 사생활도 깨끗해서 신뢰도가 높은 배우.
이미지는 청순가련…….
‘보고서가 잘못됐네.’
청순가련은 뭔 놈의 청순가련이란 말인가. 마귀할멈 같구만.
‘그래도 나름 예쁘기는 하네.’
미적 기준이 다른 서양인인 그녀가 보기에도 최연하는 아름다웠다. 늘씬하기도 늘씬했고, 나올 데는 쑥 나오고 들어갈 데는 쏙 들어간 몸매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동양미라는 건가.’
얼굴은 뭐라고 해야 할까?
‘다르지만 아름답다’라는 말이 가장 어울린다. 그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미인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조금도 부정할 수 없었다.
저 여자에 대한 조사가 다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금발 여인이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강진호 씨.”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최연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야, 너? 혼혈이야?”
상대의 반응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제 할 말만을 하는 화법에 금발 여인이 살짝 말려들었다.
“아니, 혼혈은 아니에요. 저는 순수 영국인이죠.”
“그럼 한글 패치는 어디서 했어?”
“네?”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냐고. 영국 사람이라며?”
“에…… 배웠으니까 잘하겠죠? 저는 한국말뿐 아니라…… 아니, 이게 아니지.”
최연하에게 살짝 말려든 여인이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지금 대화를 나눠야 할 상대는 최연하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응?”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엘레나라고 해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왔어요.”
엘레나가 빙그레 웃으면서 강진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길.
강진호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옮길까요?”
강진호의 말을 들은 최연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장요.”
“가죠.”
합의를 끝낸 강진호가 몸을 돌려 백사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최연하도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엘레나를 무시하고 강진호의 뒤를 따랐다.
“에?”
자연스레 짠 듯이 그녀를 무시하고 자리를 떠나는 모습에 엘레나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엘레나가 부리나케 뛰어 강진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만나고 싶어서 왔다니까요?”
강진호가 가만히 엘레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비켜.”
“……네?”
“비키라고.”
“…….”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한 발을 비켜섰다.
딱히 위협을 들은 것은 아니다. 기세로 압박을 당한 것도 아니다. 다만,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와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그녀를 절로 그리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무시하고 발을 옮기려던 강진호가 걸음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경고하지.”
“네?”
“수작질을 부리는 건 좋다. 너희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미리 경고하는데, 내 일상에 제멋대로 파고들지 마라.”
“…….”
“다음에도 같은 짓을 한다면 경고 따위는 없어.”
엘레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사람, 알고 있다.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어떻게?’
동양의 무학과 서양의 무학은 그 궤를 달리한다. 그래서 보통 서로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지금 엘레나가 강진호에게서 아무런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미리 정보를 접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강진호가 무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네.’
왜 원탁에서 이자를 감시하라는 명이 내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엘레나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정도는 되어야 감시할 맛이 난다. 조무래기에게 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를 기껍게 만들고 있었다.
“사과드릴게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엘레나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드릴게요. 저는 엘레나라고 합니다. 강진호 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이쪽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해 벌어진 일이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공손하고 예의 바른 인사였다.
엘레나는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는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동양인들은 예의 바른 모습을 좋아한다고 했을 테니, 지금 그녀의 태도는 확실히 먹혀들었을 것이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을까요?”
강진호가 가만히 엘레나를 보다가 마주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엘레나도 환희 웃었다. 훈훈하게 말이다.
강진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넌지시 말했다.
“꺼져.”
“…….”
엘레나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풉.”
참지 못해 튀어나온 최연하의 웃음소리가 엘레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