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61
160화 하늘이 높다
“달라졌구나.”
가볍게 자유 대련이 끝난 뒤 신승 어르신이 내리신 평가다.
나는 연무장과 하나가 된 채로 신승 어르신의 말을 경청했다.
“밤사이에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게냐?”
“비슷……합니다.”
정확히는 설명이 곤란한 무공 하나와 역시 설명이 곤란한 영험한 것이 몸에 깃들었다는 것이 맞겠지만, 아무래도 설명이 곤란하니 그냥 깨달음이라 퉁 치는 게 현명한 대답일 것이다.
“강해지긴 했다. 하지만 문제도 있어.”
“문제요?”
“감각적인 부분에서 눈에 띄게 성장했지만, 네 스스로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 역시 눈에 띌 정도구나. 빨라진 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건 실제 감각과 네 사고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는 소리지. 뭐, 걱정할 건 없다. 큰 깨달음을 얻어 한순간에 급격한 성장을 하면 으레 보이는 괴리감이니까. 다만, 가능한 한 빨리 그 간극을 채워 넣어야 할 것이다.”
“아…….”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은 무서운 이야기다. 특히 무공에서는 더더욱.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고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나와 상대의 차이를 가늠할 수 없다. 기량 차이가 압도적이라면 모를까, 자칫 빈틈으로 이어지는 허점을 보이기 딱 좋은 문제가 된다.
“급성장의 안 좋은 면이네요.”
“……내가 조금만 더 젊고 혈기가 넘쳤다면, 네 대갈빡을 깨부쉈을 게다.”
배부른 소리라는 거다.
신승 어르신의 미간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이미 완전히 체력이 빠져서 정신줄을 놓을락 말락 해서일까? 나는 저 말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버렸다.
“젊으셨을 땐 지금보다 성격이 더 안 좋으셨구나…….”
“한 판 더 붙어 보잔 소리구나. 오냐, 이번엔 제대로 만져주마.”
신승 어르신께서 환한 미소와 함께 다가와 나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셨다.
그리고 강제적인 자유 대련이 이어졌다.
계속 두들겨 맞다 보면 쓰러질 자유도 사라진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꾸에에에엑!!”
그렇게 한 식경 가량을 단련 당한(?) 다음에야 간신히 바닥에 누울 수 있었다.
그렇게 대자로 누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게 되자 문득 내 몸에 들어와 같이 구르게 된 처지인 도화나무의 정이 떠올랐다.
“미안. 애먼 사람 몸에 들어와 고생만 시키네.”
도화나무의 정이 신경에 자리를 잡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걱정은, 내가 신경을 통해 느끼는 것까지 모두 공유가 되는가에 대한 점이었다.
다행히 큰 영향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긴 했다.
아무래도 아프고 괴로운 것들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응?’
갑자기 양쪽 귓불로 간질간질한 감각이 번갈아 느껴졌다. 사람이 고개를 젓는 걸 나름 따라 한 것 같다.
‘귀엽네.’
반응하는 것이 단순하지만 왠지 정감이 간다.
“이름을 지어 줄까?”
그러자 이번에는 이마와 턱이 번갈아 가며 간질거렸다.
이번엔 양 귓불을 간질거리던 것보다 속도가 더 빠르다. 아마 눈앞에 있었다면 최대한 빠르게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모습이었을 것 같다.
“어디 보자…….”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은 소화(小花)나 선화(仙花)였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해 보자는 의미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더 괜찮다고 생각되는 이름이 떠올랐다.
“상화(上花)는 어때?”
위에 있는 꽃.
상단전에 자리 잡은 것을 비유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언젠가 천상에 돌아간다는 의미도 같이 담겨 있다. 상(上)이라는 단어는 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비유적으론 하늘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쓰이곤 하니까.
얼굴 전체를 신나게 뛰어다니는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표현이 참 다채롭네.’
교감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물 드세요.”
어느새 다가온 이화가 무릎을 꿇고 물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잘 마실게.”
몸을 일으켜 그릇을 받아든 나는 단번에 물을 비웠다.
메마른 흙에 물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기분 좋은 청량감이 몸을 감쌌다.
“잘 마셨…….”
시원한 기분으로 빈 그릇을 돌려주려는데, 살짝 고개를 숙인 이화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당황해서 속으로 숫자 셋을 셀 정도쯤을 고민하던 나는 손을 들어 이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줬다.
‘이게 맞나?’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을 싫어해서 머리를 쓰다듬는 것 역시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싫은 건 아닌 모양이다.
머리를 치켜든 이화가 한껏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깨를 쭉 펴며 웃었다.
‘아! 이거 그거다.’
어린애들 싸움 붙을 때 ‘너희 집엔 이런 거 없지?’, ‘너 이런 거 못 하지?’ 하는 유치한 투덕거림.
요 근래 외부로 싸돌아다니느라 어울려주지 못한 게 서운했는지 사춘기라도 온 것마냥 삐져 있는 청우도 아니고, 어른 뺨치게 어른스러운 이화가 이러니 심히 놀랐다.
‘질투라도 하나?’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지만, 바로 기각되었다.
나이는 어려도, 내 주변 사람 중 제일 어른스러운 사람을 꼽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아이가 이화다.
아무래도 요즘 수련에 매진 중이라 신경을 못 써 줬더니 이러는 게 아닌가 싶다.
‘아! 그러고 보니 청우도 있었네.’
백무호의 견해론 형제끼린 서로 원수처럼 싸운다고 하지만, 청우하고는 나이 차가 좀 있는 편이라 그런지 나를 많이 믿고 기대는 성격으로 자랐다.
한동안 신경을 못 써 줘서 저리 삐진 거라 생각하니 속이 좀 찔렸다.
“오랜만에 청우하고도 놀아 줄까?”
이전에 전수해 줬던 태극권의 성취가 궁금하기도 하고.
몸을 일으킨 나는 백무호에게 다가가 툭툭 건드렸다.
“무호야, 살아 있냐?”
“죽었어.”
“잘됐네. 청우나 보러 가자.”
“네놈 옥편에는 죽었다는 말이 뭐라고 표기되어 있는 거냐?”
격하게 투덜거리면서도 백무호는 몸을 일으켰다.
솔직하지 못하긴.
“장 소저도 같이 갈래요?”
“다음에요.”
장소월 소저가 힘겹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꼴이 이러니 어울리기 힘들다는 의미 같다.
땀이 식자 차가운 바람의 한기가 느껴졌다.
“이제 곧 겨울이네.”
하늘이 높았다.
***
화산파 여러 암자 중 하나. 자허진인의 거처에 머물고 있던 매경풍은 귀환하는 스승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인사에 답하는 자허진인의 대답이 짧다.
매경풍은 기분이 언짢은 듯한 자허진인을 민감하게 살폈다.
“가셨던 일이 잘 안 풀리셨나 봅니다.”
“그랬지.”
자허진인의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
스승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확신한 매경풍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허진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일각가량을 묵묵부답으로 자리를 지키던 자허진인이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종남파가 사고를 쳤더구나.”
“이번 무당파에서 요청한 구파 회동의 안건이 종남파였습니까?”
“그래.”
“최근 산적들을 털어대던 것이 거슬리기라도 했나 봅니다?”
“그 정도 문제라면 이리 심각하지도 않았다.”
“녹림의 준동을 부추기는 일이 그 정도 취급받을 일이라면…….”
“덕풍 윤가가 혈교와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예?”
“마교에 살해당했다는 그 장문제자라는 놈도 혈교와 엮여 있던 모양이고. 덕분에 모든 명분이 일거에 날아갔다. 구파들은 저마다 내부단속에 들어갈 예정인 듯하고.”
어마어마한 일이다.
외부로도, 더불어 내부로도.
무엇보다 자허진인과 매경풍이 그리는 큰 그림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이거 이렇게 되면 완전히 판이 뒤집힌 꼴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버렸지.”
“허! 사부님의 안색이 왜 그리 어두웠는지 알 것 같습니다.”
매경풍은 진심을 담아 자허진인을 위로했다.
다시 한번 자허진인의 침묵이 일각가량 이어졌다.
“어찌 생각하느냐?”
자허진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 느리고 무거웠다.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그 물음에 매경풍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얼 말씀하시는지…….”
“혈교 말이다. 그것들이 화산에도 있을까?”
자허진인의 목소리에선 혈교에 대한 짙은 혐오감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없지 않겠습니까?”
“모를 일이지. 우리와 손잡은 그자들의 음험함을 생각한다면.”
손을 잡고 있는 세력에 대해서도 자허진인은 혈교와 마찬가지로 불신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손을 잡고 있지만, 선을 긋고 있는.
자허진인은 자신의 속내를 신뢰하도록 제자에게 숨김없이 드러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은 화산의 풍경이다. 나는 화산에서 자랐고, 화산에서 수련했으며, 화산에서 늙었지. 나의 일생은 이 답답하고 자랑스러운 화산과 함께했다 해도 무방하다.”
“예, 그러셨지요. 아무리 수련을 거듭해 무공을 쌓아 올린 들, 산속에만 머물 힘이 무슨 소용이냐며 한탄하셨습니다.”
“그랬지.”
천하제일의 힘을 가진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일기당천의 힘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증명할 일천의 적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리 높은 경지에 다다른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 채 산속에서만 썩어갈 뿐이라면 그것은 저잣거리의 차력사보다 못한 게 아닐까.
자허진인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렇기에 난세(亂世)를 바랐다.”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힘을 증명하고, 영웅이 되어 별처럼 빛나는 자리에 오르길 원했다.
“허나 그것이 화산을 더럽히는 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혈교…… 말이군요.”
“이성과 감성 사이에는 극명한 간극이 있다. 명분을 잃어 분을 삭이지만 끝내 분노를 누르지 못한 종남파와 참아야 한다 위로하면서도 종남파에 대한 비난을 감추지 않는 구파의 반응들은 위험할 정도였느니라. 이번 구파회동에서 내가 본 것은 깊어진 균열이었다.”
수염을 어루만지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던 자허진인의 눈이 강하게 번뜩였다.
“있어선 안 될 일이야. 내가 바란 것은 구파의 힘을 하나로 모아 사마외도를 척결하는 것이지, 구파의 사분오열이 아니다. 혈교의 일은 선을 넘었어.”
“허면 그들과는 손을 끊으실 참이십니까?”
“당장은…… 두고 볼 참이다. 우리가 들쑤셔 놓은 녹림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를 확인하면 너와 나, 화산이 가야 할 노선도 분명해지겠지. 그때 결론을 내려도 늦지 않아.”
녹림이 대화합을 이뤄내면 반드시 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
거대한 세력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정사 간의 균형을 무너트리게 된다.
무시할 수 없는 강대한 적의 등장으로 구파의 단합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자허진인이 그린 큰 그림이다.
“네게 일을 맡기마.”
“하명하십시오.”
“화산에 혈교와 선이 닿아 있을 자를 찾아내라. 이미 상우경이라는 마교 간자가 있었다. 종남파에는 혈교의 손이 닿아 있는 아해가 장문제자로 있었다. 한 번 있었던 일은 두 번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야.”
“맡겨주십시오. 차질 없이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답하는 매경풍의 모습이 믿음직한지 자허진인은 고개를 숙인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자허진인의 신뢰를 듬뿍 받은 매경풍이 그 믿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듯 조용히 웃었다.
***
음모와 신념. 사상과 정의가 각축을 이루는 가운데 시간은 무던히 흘렀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 봄.
봄을 알리는 새싹의 순이 자라날 무렵 삼양현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예? 뭐라고요?”
“근래 녹림이 준동하고 있잖니. 해서 이번에 표국들도 머리를 맞대볼 참이란다.”
“그리고 호북에 있는 표국들의 대표들이 여기 삼양현으로 온다는 소리죠?”
“이 아저씨가 좀 잘났잖니. 다들 이 아저씨를 중심으로 모여보자는 것 같더라. 하하하!”
백진성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봤다.
신승 어르신에, 장문경 선배에, 저 멀리 있는 장원에는 사천당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고, 한 편에선 마교의 절대강자 중 한 명인 금강철마존이 빗자루질을 하고 계신다.
워낙 휘황찬란한 이름들이 즐비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쩌리(?) 취급받는 용린대 소속 사람들이 열심히 마을 청소에 앞장서고 있었다.
아주 미쳐 돌아가는 동네다.
“여기서 말이죠?”
“…….”
추궁하듯 묻는 내 물음에 백진성 아저씨가 쓰윽 시선을 피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