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62
161화 성장통
백설아는 기본적으로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다.
가문의 천형이라 할 수 있는 지독한 음한지기 탓에 사람을 멀리하니 대인관계가 익숙하지 않았고, 주기적으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보니 성격 또한 어두웠다.
본인도 그걸 잘 알았다.
그랬기에 어렸던 시절에는 모든 일의 원흉과도 같았던, 음한지기의 증표라 할 수 있는 하얀 머리카락을 혐오했다. 증오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하얀 머리카락을 아름답다며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청운을 보기 전까지는.
백설아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혐오스럽고 증오하는 이것이 동경과 선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다.
백설아 역시 더 이상 상처 입고 싶지 않았다. 계속 선망(羨望)받고 싶었다.
그렇게 백설아에게 연청운은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언제나 연청운 앞에서는 동경(憧憬)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믿고 기댈 수 있는 완벽한 누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까진 분명 그래 왔었는데.
“으아아아아아아!”
백설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데굴데굴 굴렀다.
작년 가을에 있었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탓이다.
“누나의 위엄이 망가졌어어어어어…….”
질투심에 가득 차 이화를 낚아채 가며 연청운에게 화를 낼 거라고 으름장을 놨던 일은 아직도 정신적 상처로 남아 있는 수준이다.
가끔 꿈에 나올 때도 있었다. 당연히 그날은 이불을 걷어차며 밤을 지새우게 된다.
그나마 이화를 도둑고양이 운운하며 미쳐 날뛴 모습을 연청운에게 보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자칫 재기불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만으로도 속이 쓰려왔다.
아직도 그 일에 대해 연청운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마치 그 일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묻어 버렸다.
그저 현실도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백설아 본인의 기억에 남아 있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무엇보다 연청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다.
무엇보다 그 일 이후로 연청운을 대하는 것이 두려웠다.
“조언을 구해 볼까?”
본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일이라면 외부의 조언이 도움 될 수도 있다.
누가 좋을지 궁리를 하자 가장 먼저 아버지인 백진성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에게 이런 일을 상의하는 것은 뭔가 부끄러웠다. 알 수 없는 위험이 느껴지기도 했고.
“어머니. 상담할 게 있는데요.”
결국, 백설아가 택한 쪽은 어머니인 한산월이었다.
백설아의 고민에 한산월은 뭐가 문제냐는 듯 간단히 해결책을 내주었다.
“음! 나야 낭군이 청혼해 주셔서 쓸 일이 없었지만, 우리 한가에는 사윗감을 잡는 확실한 방도가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
한산월의 호언장담에 백설아의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뭔가 기만자의 자기 자랑 같아 배알이 꼴렸지만,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
“십이성의 명옥진기를 뿜어내며 내 남자가 되라 말하면 되는 것이다. 조상님들 모두가 성공한 필승의 방도지.”
“…….”
안 된다, 이건.
못 써먹을 조언이다.
“아버지가 선남이셨네.”
“응?”
“아니에요.”
도움이 되지 못하는 어머니의 조언을 받고 물러나며 백설아는 깨달았다.
연청운이라는 따뜻한 빛을 만나지 못했다면 분명 자신 역시 어머니와 별반 다를 바가 없게 되었을 것임을.
사무치는 고통과 그로 인한 세상에 대한 원망, 그리고 외로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다 보면 저렇게 되는 것도 필연적이다.
“그나마 아버지 덕에 사람 구실 하는 거였…… 응?”
새삼 아버지인 백진성의 위대함을 느끼던 백설아는 문득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나, 무서워하고 있구나.”
백설아는 여전히 딱딱한 껍질을 마음에 두르고 있다.
그저 연청운을 향해서만 그 일부를 벗겨냈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머니인 한산월보다 더 문제가 크다.
적어도 한산월은 독선적인 면이 저돌적으로 변해주기라도 하니까.
연청운의 옆에 서려면 이 껍질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 변화가 두렵다.
좋았던 관계가 일그러져버리는 것이 너무나 무섭다.
“……이게 어른이 된다는 것인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며,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두려움도 많아진다.
백설아는 입에서 쓴맛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희생된 풋풋함의 일부에선 새까맣게 탄 잿가루 맛이 났다.
***
뜬금없이 일을 벌인 백진성 아저씨의 행동은 둘째 치고,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에 대한 대처와 방향성을 잡는 것이 우선이다.
‘죄다 숨겨버리면 되려나?’
호북의 표국들이 삼양현으로 모이는 이유는 백가표국 때문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든든한 구심점을 찾아 똘똘 뭉쳐보자는 것이다.
즉, 그 외의 것에는 관심이 떨어질 테니 민감한 것만 잘 숨겨놓고, 적당히 백가표국에 떠넘겨놓으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
“그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있나.”
하지만 이내 희망적 관측에 의한 낙관론을 치워버렸다.
“나만 해도 드러난 게 얼만데.”
중신상회의 앞마당에서 벌어진 사건은 한동안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명운표국과 이를 도운 천의무봉 장문경 선배지만, 내 이름은 물론 백무호의 이름도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가을을 지나 겨울 그리고 봄이 찾아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소문이 퍼질 만큼 퍼지기에 충분했다.
“일단 나는 무조건 걸고넘어질 것이고…….”
아마도 덕풍 윤가의 일도 알게 모르게 퍼져 있을 공산이 크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어르신들이 어느 정도 입단속들을 했지만, 그만한 곳이 하루아침에 날아갔는데 조용히 넘어갈 리가 만무하다.
“그럼 신승 어르신이랑, 허도진인 어르신의 이야기도 거론되었을 공산이 크고…….”
그런 상황이라면 내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이쯤 되니 호북의 표국들이 백가표국으로 몰려드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진짜 설아 누나네 집안만 아니었어도, 확 그냥…….”
다 내팽개쳐 버리고 튀고 싶단 생각이 절실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들에 대한 업보려니 생각하자 그럴 수도 없었다.
“에휴…….”
설아 누나를 생각하자 속이 갑갑해졌다.
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여린 사람.
나도 미숙하지만, 그런 나 못지않게 미숙한 사람.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
무지(無知)는 어린 자의 특권이다. 젊은 혈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나는 어리지 않았다. 어려서도 안 될 위치에 있다.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도 단단하게 버티며 자리를 지켜야 한다.
힘든 걸 견디는 일쯤이야 이미 이골이 난 몸이다.
나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갑자기 두 뺨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올라왔다. 상화 나름의 위로인 모양이다.
“…….”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차린 이화가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또 질투하니?”
“……아닌데요.”
“아니기는.”
무엇 때문인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상화에 한해서는 아이처럼 구는 이화였다.
“에휴, 이 녀석들아.”
한 손으로는 이화,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뒤통수에 손을 올려 쓰담쓰담을 했다.
그제야 조금 표정이 가라앉는 이화를 볼 수 있었다.
“가자. 한동안은 수련 대신 다른 걸로 바쁠 것 같다.”
***
처음엔 성가신 일을 피하려고 최대한 감추는 쪽을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정황들을 짜 맞춰본 결과 지금은 오히려 드러내야 할 때라는 판단이 섰다.
“이번 기회에 명운표국에 제대로 힘을 실어 주는 것도 좋겠고.”
단순히 명운표국의 처지가 안타까워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는 인재가 한 명이라도 더 십육식을 접하며 바른 무공에 눈을 뜨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명운표국은 정도(正道)를 위한 창구가 되어 줘야 한다.
호북의 대부분 표국들이 모이는 자리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
명운표국의 이름을 알리기 딱 좋은 장소라는 것이다.
겸사겸사 명운표국에 만만치 않은 뒷배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면서 안전도 보장받고, 덤으로 십육식이 신승 어르신과 장문경 선배의 인정을 받은 수련 무공이라는 것까지 알릴 수 있다면 완벽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명운표국의 무공이 어느 정도 수준을 보여야 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장문경 선배가 명일서 표두의 무공이 제법 괜찮아졌다고 하셨지?’
십육식에 흥미가 많았던 장문경 선배는 겨울 사이 틈틈이 명운표국으로 마실을 다녀오셨다.
십육식을 통해 기본을 다진 명일서 표두는 틈틈이 들른 장문경 선배의 지도 덕에 상당한 성취를 이뤘다고 했다.
정도의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십육식으로 이렇게 빠른 성취를 올렸다는 것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얼마나 성장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반면, 이런 상황임에도 적극적으로 감춰야 하는 일들도 있다.
“미안하지만 천마신교 측 분들은 한동안 거처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종 노인, 저 신승 어르신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괴물 금강철마존이 내 지시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거부한다는 선택지 따윈 없다는 듯 절대복종하는 그를 보며 한층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종 노인이 조용히 웃었다.
“저희의 가장 큰 기쁨은 천마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천하의 그 어떤 보물보다 천마님의 명 한마디가 더 기쁜 족속들입니다. 어떤 지시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우마(牛馬)처럼 부려주십시오.”
이걸 충성이라고 해야 할지, 광신이라고 해야 할지.
‘부담된다.’
허나 그렇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는 이들이다.
천마 사부의 맥을 잇고, 이화를 곁에 둔 이상 짊어져야 할 사람들이다.
‘무엇이 이들이 바치는 충성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을까?’
그 순간 알 수 없는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언젠가 같이 십만대산에 올라봅시다.”
충동 속에서 태어난 그 말이 제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그 여파는 컸다.
쿵! 쿵! 쿵!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고수들인 마인들이 오체투지를 하며 땅에 머리를 박았다.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수십에 달하는 마인들이 한순간 폭풍 같은 기세를 뿌렸다.
그리고 이내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화는 그것을 뿌듯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부담된다, 진짜…….’
나야 뱉은 말을 조금 후회했지만.
***
천마신교 측 사람들에게 당부한 것을 마지막으로 대충 외부에서 들어올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는 끝냈다.
별문제 없이 조용히 표국들 간의 화의가 이뤄지길 바랄 무렵.
“벌써?”
수레를 끌며 마을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행렬이 보였다.
수레에 꽂혀 있는 깃발에는 대진(大振)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 이거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모양인데?”
“늦으면 잘 곳 잡기도 어려울 것이 뻔한데, 잘 된 거지요.”
그 행렬 사이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잡담이 주를 이뤘지만, 특이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적 새끼들이 죄다 한쪽으로 몰려가면 상단에서도 굳이 표국 찾을 필요가 없어져서 밥줄이 끊길 거라고요? 에이! 걱정 마십쇼! 그렇게 된다면 제가 산채 하나 차려서 진상 떠는 상단 새끼들 다 털어먹을 테니까! 뭐, 대진표국 통행료는 특히 싸게 받겠슴다!”
아무래도 저 표국에는 미친놈이 있는 것 같다.
어째 표국들 간의 화의가 조용히 이뤄질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