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28
227화 이상은 현실 앞에 걸음을 멈춘다
“이상(理想)이란 무엇이냐?”
당천기가 내게 물었다.
이상.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
“제가 너무 이상적인 행보를 택했다는 것입니까?”
“가장 좋은 판단만을 내리려 하지 않느냐.”
“그야…….”
“수많은 인재들이 올곧은 뜻을 품고 그 뜻을 세상에 펼치고자 했다. 허나 지금까지 그 뜻을 온전하게 이룬 사람은 없었다. 왜일 것 같으냐?”
“…….”
“쯧쯧쯧! 경험 부족이 드러나는구나. 큰 세력을 경영해 본 경험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네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보인 재능으로도 대단한 일이나, 네가 짊어지려는 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았어야지!”
당천기 가주의 질책에 등 뒤에서 공기가 일렁이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천마인 나를 깔아뭉개는 당천기 가주의 언급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오금이 지릴 법도 하지만, 당천기 가주는 한입에 씹어 넘겼다.
“이상을 좇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사실 옳은 일이지. 허나 모두가 이상적이라면 세상이 이리 혼란스럽겠느냐. 모든 것을 아우르기 위해선 때론 상책이 되는 하책을 쓸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책이 상책이 된다…….”
“누군가는 욕심이 많고, 누군가는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행적 하나하나가 눈부신 성인이 있는가 하면, 저것도 사람인가 싶은 잡놈도 있지. 그들 모두가 사람이다. 그만큼 사람이란 변수가 많은 존재다.”
당천기가 가주로서 세상을 보는 시야를 나와 공유해주었다.
“옳음은 지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정답은 될 수 없다. 사람이란 존재는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옳은 뜻을 고수하고자 해도 반드시 그 옳은 뜻에 거부하는 자가 나온다는 거군요.”
“그래. 네 판단은 분명 합리적이다. 허나 세상일은 합리적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이상은 현실 앞에 걸음을 멈춘다.”
“이상적이라…….”
분명 나는 옳은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십인십색이라.
내 옳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가를 따져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라면 부정하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많은 것을 보고 겪어왔다.
당천기 가주의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정답은 없다.
그 가정을 내게 적용시켜 보니 다른 길들이 보였다.
‘그동안 내가 너무 성공만 했구나…….’
이번에도 막연히 잘 풀릴 거라 낙관했다.
분명 내가 행하려는 것들이 ‘잘만’ 풀린다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어긋난 흐름이 만들어지면 어떨까?
내가 하려는 일이 큰 흐름을 바꾸는 일인 만큼 작은 비틀림도 크게 변화해 돌아올 것이다.
내가 깊이 생각에 빠져들자 당천기 가주가 피식 웃었다.
비웃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도 확실히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녀석들과는 다르구나. 알맹이가 없는 놈들은 있지도 않은 자존심 때문에 억지나 부리다 결국 엇나가버리지.”
“어르고 달래는 솜씨가 좋으시네요.”
“흥! 너도 천마 자리에서 한 십 년쯤 썩어 보거라. 보이는 것이 많을 게다.”
당천기 가주의 이어진 말에 조금 전까지 주변을 감돌던 위험한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천마인 나를 나무라던 당천기 가주가 내심 본인들이 원하는 일을 권하니 화를 내야 할지 호응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느낌이다.
이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연륜이라는 것일까?
“그나저나 곤륜은 무슨 생각으로 저 무모한 결정에 동의하신 게요?”
곤륜으로 시선을 돌린 당천기 가주의 물음에 천원진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곤륜이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기 때문이라오. 구파의 하나라며 의무만 짊어지던 것도 짜증 나던 것이 사실이고. 크게 잘못되어도 연 소협이 오래오래 다스리는 좋은 이웃이 생기지 않겠소이까.”
“하! 현인은 저기들 계셨구먼!”
“딱히 계산적인 판단만은 아니었소. 연 소협의 말이 가슴에 닿아왔기 때문이라오. 이상을 좇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틀린 일이 될지언정, 우리에게는 옳은 판단이었다오.”
천원진인이 나를 지지해주셨다.
옳음만으로 일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옳음에 동조해주는 사람 역시 있다.
당천기 가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혈교의 위험성에 대해선 인정한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그럼 어떤 방법이 좋겠습니까?”
“기만(欺瞞).”
“……예?”
돌아온 대답은 주어가 분명하지 않았다.
“병법의 기본이다. 적을 속이고, 적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며, 적이 좋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어야지. 비무와 같은 거다. 내 장점은 살리되, 상대의 장점은 죽이면 된다.”
당천기 가주에게 뭔가 계책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를 괴롭힐 생각이 가득한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네 말을 들어보면 혈교와 그 배후에 있는 학이란 놈들이 아주 크게 보고 움직이는 것들이란 걸 잘 알겠다. 보통 그런 녀석들이 쉽게 저지르는 실책이 있지.”
“눈 아래의 돌부리를 생각하지 못한다는 거죠? 방금의 저처럼.”
“그래, 방금 네 녀석처럼.”
자조적인 내 말에 당천기 가주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 정도(正道)는 아니다만, 정답이 정해져 있는 선택지를 내미는 방법도 있지. 내 한번 솜씨를 부려보마. 이번 기회에 파악해둔 당가의 버러지들을 치워버려야겠다.”
유쾌하던 웃음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순식간에 표정을 달리하는 당천기 가주가 누구를 지목하는지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사파인 척 위장하고 악사도왕 곽대평에게 취죽 선생의 감시와 암살을 의뢰한 존재.
사천당가 내부에 있는 암 덩어리.
할아버지가 직접 손을 쓴다고 하시더니 이미 정체를 파악해 당가주와 공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쥐새끼처럼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당영진은 무의식중에 품을 어루만지며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살 떨리네.”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로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다만 독과 암기의 특성상 잘못 취급하면 크게 위험하기에 사천당가에서는 이를 엄중히 관리하고 있다.
특히 몇몇 독들은 직계라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독 중에는 잘못 뿌려질 경우 그 뒷감당을 할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천당가는 오히려 독을 쓰는 일에 무척이나 신중했다.
허나 지금 당영진이 조심스러운 이유는 이와 달랐다.
“어쨌거나 잘 만들어진 것 같으니 다행이긴 하네.”
지금 당영진의 품에 있는 것은 사천당가에서도 해독제가 없는 독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천당가의 비법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마교에서 쓰는 독과 유사한 수법의 독(毒)이다.
한마디로 당영진은 마교에서 사용하는 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 지랄이 난 이후로 더 빡빡해졌어…….”
독을 만들기 위해 있었던 고난을 떠올리자 당영진은 절로 불평이 나왔다.
일부 데릴사위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뒷수습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자 지시받았던 일을 처리하기가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당영진은 곧 그게 착각임을 알았다.
마치 누가 견제라도 하는 것처럼 독을 제조하는 일이 지지부진해졌다.
그나마 최근 남궁세가의 일로 세가 내부가 소란스러운 덕분에 가문의 비고에 몰래 손을 댈 수 있었다.
“흐흐흐.”
어쨌거나 결과만 좋으면 만사가 형통한 거다.
사람들이 오지 않는 외진 곳까지 몸을 빼낸 당영진은 스스로의 성과를 마음껏 자축했다.
“흑애무천에 쓸 독이야 진즉에 빼돌려 놨고……. 제일 큰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이걸 청성파의 그 모질이에게 전달하면 된단 말이지?”
당영진은 과거 자신이 구슬려 놓았던 청성파의 후기지수 사공패를 떠올렸다.
이용해 먹기 딱 좋은 멍청이가 자신이 전한 독으로 사고 칠 것을 상상하자 하초가 짜릿해졌다.
“이런 상황에 마교가 사천으로 진출한다면 난리가 나겠군. 하하하하!”
청성파의 장문인이 마교의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고, 흑애무천의 정점인 흑애천주가 사천당가의 극독에 목숨을 잃는다.
흑애무천은 즉각 사천당가에 보복을 할 것이고, 청성파는 장문인을 잃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교가 사천으로 진출한다면 마교를 향해 칼을 뽑아 들 것이다.
그리되면 이번에는 제대로 사천이 난장판이 될 것이다.
“우리 편이 아닌 세력은 흑애무천 쪽에 던져줘 상잔시키고, 우리는 슬그머니 청성, 아미와 함께 마교와 대치를 하다가 독으로 뒤통수를 치면…… 캬아!!”
입이 가려웠던 것이 이해가 갈 만큼 장대하게 그려진 설계는 확실히 대단했다.
이대로 흘러간다면 사천을 주도하는 거대 세력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 몸이 사천당가의 주인이 된다 이거지! 마교 밑에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겠지만, 어차피 본질은 마교가 아니니까. 내 처지에 그게 어디야. 뭐가 되었든 내가 사천당가의 주인이 되는 건데. 크아, 죽인다!”
당영진은 벌써부터 사천당가의 가주라도 된 듯 장밋빛 꿈속에 빠져들었다.
“악사도왕 그 자식이 미적거리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지만,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지. 청성파와 흑애무천이 흔들릴 때 취죽 선생이 죽는 게 그림이 더 좋게 나올 테니까.”
계획에서 어긋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 부분마저도 당영진은 낙관적으로 해석했다.
“일을 확실히 하려면 이번 건은 직접 움직여야겠지?”
당영진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첫 요지는 청성파가 장문인을 잃고 혼란에 빠져야 했다.
그 일의 핵심이 바로 사공패다.
“욕심은 많은데, 기량은 떨어지는 놈이란 말이지.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대책 없이 사고를 쳐대기는 하지만,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생각할 여유를 주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발을 빼려 할 거란 말이야. 구슬려 놓긴 했지만, 알아서 해치우라며 독만 던져주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거란 말이지…….”
당영진은 사공패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걱정은 없었다.
“하자. 이럴 때 써먹으려고 그동안 고생고생하면서 심어 둔 거니까. 어차피 이젠 쓸모도 없을 테니 문제는 없겠지. 룰루룰루루~.”
직접 움직이기로 결정한 당영진은 일의 진행 방향을 착착 정리했다.
청성파로 향하는 당영진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뒤를 따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
“잘 짰네, 새끼.”
청성파로 향하고 있는 당영진을 뒤쫓는 우리 일행은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몰랐으면 진짜 호되게 당했겠습니다.”
“당하기는 무슨! 저놈이 저 독을 제조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내가 조절한 거야. 어떻게 움직이나 보려고 일부러 경계를 풀어준 거라고!”
다 손바닥 위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당천기 가주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가문의 혈족이라는 놈이 제 가문 뒤통수 때리는 일에 저리 열심인 모습을 외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 현 상황이 무척이나 수치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천기 가주는 극도의 인내심을 보였다.
“아무튼, 계속 따라가 보자고.”
“그러죠.”
아직은 가만 놔둬야 했다.
지금 모가지를 따 봐야 잔챙이만 잡는 꼴이다.
“청성파에는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사공패가 선을 넘었으면 좋겠네요.”
무엇보다 당천기 가주가 내놓은 계책을 실행하려면, 청성파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