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36
35화 남자의 애교는 귀엽지 않다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는 것을 자각할 즘 깨달은 것은 지금 내 몸이 백무호 이놈의 위에 포개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절했었나?’
의식이 날아갔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둘 다 이런 상태로 방치되었을 리 없으니까.
“망할 놈.”
세상모르고 편하게 정신줄을 놓고 있는 백무호의 꼬라지를 보며 한 방 쥐어박을까 주먹을 들어 올린 나는 나도 모르게 멈추며 손을 바라보았다.
의식이 날아가는 순간, 그때의 감각이 화인처럼 손에 남아 있었다.
“천마무겁수.”
시야 안에 닿아 있는 모든 사물들과 통하는 느낌. 얼마나 깊이 통하였는지 내 피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잠깐이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 위협적으로 느껴지던 백무호가 마치 한 손에 쥔 장난감처럼 느껴졌을 정도다.
언제든 으스러트릴 수 있는 작은 장난감 말이다.
과연 천마. 아니, 천마 사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 별호가 회자되는 이유가 있었다.
[일어났군.]생각보다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천마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모시게 된 사부님이니 예의 바르게 굴어야겠다.
[몸은 괜찮고?]“아, 예.”
이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할까?
집채만 한 호랑이가 앞발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면 되려나?
분명 다정하게 나를 걱정해 주는 말인데, 듣고 있자니 소름이 쫙 올라온다.
[왜? 다정하게 말해 주니까 기분이 요상하냐?]“조금……요?”
[조만간 얼굴 볼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 그런다. 기왕 맺어진 사제 지연인데 얼굴 마주쳤을 때 서먹하면 그것도 문제가 있지 않겠니?]“…….”
요즘 들어 자주 입에 자물쇠가 걸리는 일이 생기는 기분이다.
그나저나, 이 말을 해석해서 들어보면…….
나 죽는 건가?
천마 사부가 일하는 곳이 화탕지옥이라는데, 거기에서 대면하는 거면 똥물에 튀겨지려나?
[네가 어제 어떤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고?]그런 가운데 천마 사부의 추궁 같은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문제는 내가 할 말이 참 궁색하다는 거지.
“글쎄요, 기억이 잘…….”
[미욱하지 그지없는 그릇이 재능만으로 본질에 닿아 경계를 넘었다. 사실상 마에 닿아 마를 이루고 마를 다스렸으니 이는 극마(極魔)의 경지 너머를 보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아, 예.”
천상의 사부님들과 대화할 때 여러 번 느끼는 거지만, 상식이라는 듯 툭툭 던지는 말들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그 동네에서는 상식이 이쪽에게는 무슨 먼 서역 꼬부랑글자처럼 들린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게 마를 다스리는 힘이 있는 건 아니지.]“그렇겠죠. 마를 이루고 마를 다스린다니, 무슨 마인이 된 것도 아니고.”
[마를 이루지 못한 놈이 마에 닿은 것도 모자라 마를 다스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크하하하! 하계에서 감히 내 뒤를 좇는답시고 날뛰는 것들이 지금 네 말을 들었다면 네 머리를 박살 냈거나 제 머리를 스스로 부쉈을 것이다.]뭔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인데, 이거.
그나저나 그렇게 들으니 갑자기 불안해지네.
조만간 얼굴 마주 볼 것 같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가?
“걷지도 못하는 놈이 뛰려고 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살아 있는 게 다행이란 소리네요.”
백배라니. 가늠이 잘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당시의 감각이 얼마나 대단하고 위험한 것인지는 알겠다.
펼칠 때부터 뭔가 격이 다른 무공이란 생각이 들긴 했었으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뻗으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천마 사부의 말들 중 인상 깊었던 몇 가지가 홀연히 떠올랐다.
겁이 없는 세계.
무구한 시간조차 지우는 세계.
‘시간을 지우는 무공.’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든 죽인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군가의 죽음조차 부정하고 비틀어 버린다.
질서를 부정하고 이치를 짓밟는다.
오로지 홀로 존귀한 천지만물의 주인.
생사여탈을 주관하는 존재.
자신의 영역 안에서 신이 되는 무공.
잠깐이지만 내가 가늠했던 전능함은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인간이 다룰 영역이 아니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지극히 높은 경지를 엿본 만큼, 네 몸에는 꽤나 불균형한 부분이 생겼을 것이다.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게 아닌 만큼 뭐가 얼마나 뒤틀렸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뜻이다.]“명심하겠습니다.”
함부로 그 영역에 다시 한번 발을 들였다간 뼈도 못 추릴 거라는 소리였다.
그 밖에도 뭔가 더 부작용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마 사부의 무공이라면 마공이잖아.
괜찮을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데 문뜩 천마 사부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신다.
[재밌군.]말은 재미있다고 하시는데, 듣는 나는 소름이 쫙 돋았다.
조금 전의 것이 살벌한 앞발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혓바닥으로 간 보는 느낌이었거든.
할짝 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게 그런 감각을 선사해 주신 천마 사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청명심법이 잘 받아 줬구나.]대신 그사이 조용히 계시던 장삼풍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겪은 위험을 넘기는 데 장삼풍 사부가 전수했던 청명심법이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달마 놈이 쓰던 보패가 없었다면 위험할 뻔했고.]“아, 이거요?”
범상치 않은 물건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효용도 있었는지.
그러고 보니 전에 없던 실금 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
갑자기 확 와 닿네.
팔단공?
어느 정도 경지야, 그거?
일단공을 이뤘을 때의 성장 폭이 어느 정도였는지 경험했었기에 팔단공이라는 천마 사부의 말에 그 힘의 깊이가 짐작이 가면서도 반면에 추측되지 않는 까마득함이 있었다.
더불어 새삼 왜 천마 사부가 자신과 얼굴을 마주 봤을 거라는 식으로 말했는지 이해가 확 됐다.
손목에 차여 있는 이 팔찌가 얼마나 굉장한 물건인지도.
청명심법이 도왔다곤 하지만 이 팔찌가 중토신공 팔단공의 힘을 감당해냈다는 소리잖아!
상상 이상으로 굉장한 보물이었네, 이 팔찌.
[그 보패가 있으니 천마 그 양반 무공도 어느 정도까지는 감당이 되겠다만, 이번처럼 깊이는 들어가지 마라. 너는…… 갑자기 훅 들어가는 경향이 있으니.]“옙!”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중토신공 팔단공은 되어야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영역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조만간 무공을 하나 더 전수해 주마. 배운 것들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싸부…….”
달마 사부가 중토신공을 전수해 줬다는 것에 바득바득 이를 갈고 계셨었는데, 확실히 뭔가 대단한 걸 생각하고 계신 게 분명하다.
역시 장삼풍 사부는 다 계획이 있으시구나.
믿는 게 있으니까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던 거였어.
[쉬거라.]“옙!”
그걸로 천마 사부에 이어 장삼풍 사부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거기까지 정리가 되니.
빠악!
“악!”
나는 거리낌 없이 백무호 이 새끼의 머리를 두들길 수 있었다.
소리가 실했던 걸 보면 진짜 제대로 후려갈겼는데.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걸 보면 정말 아프긴 한 모양이다.
그럼 어때.
나는 따져 물을 게 있는 사람인데.
“기억은 나냐?”
천마 사부가 그랬다. 몰입 함부로 깨면 본전도 못 찾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는 확인을 해야겠단 말이야.
이 개고생을 하고도 남는 게 없으면 억울하잖아.
오는 게 있었으니 가는 것도 있어야지, 이 망할 친구 놈아.
백무호를 노려보는 내 눈동자에 힘이 빡 들어갔다.
“……못 하겠는데?”
못 하긴 얼어 죽을.
눈치 살살 보는 게 나한테 진검으로 난도질하는 거 다 기억하는 눈치구만.
괘씸하다!
그러니 이건 절대 화풀이 같은 게 아니다!
괘씸한 게 사실이니까!
“그럼 나한테 그만큼 칼질을 해 놓고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단 소리네?”
“……어?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렇게 되나?”
이 말에 내가 담을 수 있는 모든 빈정을 담았다.
눈빛까지 팍팍!
“아니, 잠깐. 생각해 보니 기억나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제정신으로 나한테 그만큼 칼질을 했단 소리네?”
“…….”
방어 불가.
칼 같은 내 대답에 백무호의 눈에 지진이 났다.
상하좌우로 격렬하게 움직이는 동공을 보니 열심히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단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무슨 말도 먹힐 상황이 아니라는 것 역시 깨달은 눈치였다.
그렇게 이놈이 마지막으로 택한 건.
“데헷!”
“데헷은 얼어 죽을!”
쥐뿔도 안 귀여운 애교질이다!
이건 화풀이가 아니다.
그래, 교육이다!
“거지 같은 애교 못 부리게 앞이빨을 갈아 주마!”
이게 다 사랑이 있어서 패는, 아니 교육하는 거다, 이 자식아!
남자의 애교 따윈 쥐뿔만큼도 귀엽지 않다는 걸 가르쳐 주마!
***
소림에서 있었던 사건은 대외적으로 크게 퍼져나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구파일방에는 확실하게 전해졌다.
자연히 이 일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벌일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소림으로 몰려들었다.
그런 자리에서 소림은 숭산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가감 없이 모두 털어놓았다.
소림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숭산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소림의 경계 안쪽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지체 없이 움직였다. 그런 부분들을 투명하게 밝히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서, 소림은 잘못이 없다?”
그런 소림의 설명에 감정적으로 나오는 곳이 있었다.
유망한 기재를 잃은 종남파는 당장이라도 소림에 책임을 묻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경계에 미흡함이 있었음은 인정하리다. 허나 그 이상을 말하라 한다면 납득하기 어렵소.”
“그 정도로!”
“경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니 손을 쓰는 게 늦은 건 어쩔 수 없지 않소. 실제로 습격한 자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그 정도 피해로 마무리된 것은 모두의 노력이 이뤄낸 기적이었소이다. 그 부분을 스스로 깎아내리지 마시구려. 유망한 기재를 잃어 감정적이 된 건 이해하나 그와 같은 태도는 죽은 종남 제자에게도 못 할 일이오.”
소림이 일부 잘못이 있다 인정했지만 인정한 잘못의 크기는 사소한 수준이다. 물리친 적의 정체를 고려하면 그 사소한 잘못은 바로 파묻힐 정도다.
하지만 종남파 측은 이대로 일을 덮고 싶지 않은지 눈을 번뜩이며 소림 인사들을 노려봤다.
“그쪽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군.”
“그쪽이라면?”
“듣자 하니 이번 일에 소림 제자가 큰 역할을 했다는데, 그 녀석은 어디에 있소?”
이쪽으론 이빨이 안 들어가니 다른 쪽을 물어뜯으려는 모양새다.
유망한 기재의 죽음에 분노하여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 죽음을 이용하기 위해 저러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소림 측 인물은 가볍게 미간을 한 번 찌푸리곤 잘라냈다.
“그쪽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떻겠소이까.”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건…….”
“말 함부로 하지 마시구려. 태사조께서 거두신 분이오.”
“……!”
소림 측의 말에 반응한 건 종남파 측만이 아니었다. 모여 있는 구파일방의 인사들 전원이 눈을 치켜떴다.
소림 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가 태사조라 부를 만한 배분의 인물은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신승 공료.
세월의 흐름에 오래전 흘러간 이름이지만 그 이름이 가진 존재감을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여기 없었다.
실무자급을 넘어 한층 더 격이 높은 각 문파의 장문인이 왔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위명이 튀어나온 것이다.
“헌데, 내가 듣기에는 무당파 제자 같단 소리가 있던데.”
“그건 또 무슨.”
신승 공료의 이름이 나오면서 더 긁어낼 것이 없어지자 다른 방향으로 화제가 돌아갔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관망하고 있던 무당파 인물이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나도 들었소. 무당권을 썼다던데?”
헌데 무당파의 반응이 무색하게 다른 곳에서도 동조하는 말이 나왔다.
모두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시선으로 무당과 소림 측 인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허, 참! 무당은 모르는 일이오!”
무당 측의 인물이 딱 잘라 말했다.
모두가 그 말에 납득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따져 묻는 이는 없었다.
“무당권을 구사하는, 신승께서 거두신 제자라…….”
이번 사건은 납득이 가지 않는 일들투성이였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일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이 화제는 개중에서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실이라면 한번 보고 싶긴 하군.”
“아, 무당엔 그런 제자 없다니까!”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얽히는 곳에서 그렇게 잠시 연청운이 거론되었다.
연청운은 그가 모르는 곳에서 그 존재감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