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58
57화 이긴 자의 발걸음은 가볍다
‘손속에 사정은 두실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봐주셨네.’
고작 사할 공력만 썼다는 한산월 아주머니의 머리카락은 끝자락만 살짝 흰빛을 내고 있다.
한산월 아주머니는 아니지만, 나는 저 머리카락이 완전히 순백으로 변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본 적 있다.
다행히 그 진면모를 보지 않고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판정승을 따냈으니 최상의 결과라 할 것이다.
“무호가 얻은 무공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느냐?”
백무호가 익힌 무공의 근원을 묻는 한산월 아주머니의 머리카락에서 흰색이 빠져나가는 중이다.
공력을 거두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 역시 진지하게 거짓 없이 답했다.
“서쪽에서 온 무공이라 알고 있습니다. 숭산의 한 동굴에서 흔적을 발견했지요.”
“서쪽이라……. 달마대사가 온 곳이구나. 분명 불가 무공은 아니었다. 허나 숭산의 동굴에 남겨진 서쪽에서 온 무공이라면 달마대사의 유진이 맞겠지. 그렇다면 대사께서 중원에 정착하기 전, 서역에서 배운 무공의 원형일 수도 있겠구나.”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시는 말을 들어보면, 일단 내가 한 말을 신뢰하시는 것 같다.
한산월 아주머니의 추론은 무척이나 상식적이다. 문제는 진실이 그 상식을 벗어난 곳에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그 상식을 벗어난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정말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으니까.’
‘사실 무호가 익힌 것은 천마의 무공입니다! 대단하지요?’라고 말해 버리면 아마 둘 중 하나일 거다.
방금 격돌 중 받은 충격으로 미친 거냐고 묻던가,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다가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던가.
내 생각에 한산월 아주머니는 후자 쪽일 것 같다.
그럼 다시 ‘무호에게 뭘 가르쳤다고?’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머리카락 전체가 하얗게 변한 한산월 아주머니를 볼 수 있게 될 거다.
내가 짐작하는 한산월 아주머니의 배경은 확실히 정파 쪽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교 쪽도 아닐 것 같으니까.
“아직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나, 네가 정말 서문대성의 배후에 있던 이들과 손을 잡은 게 아니라면…… 그럼, 네게는 폐를 끼친 게 맞겠구나.”
한산월 아주머니가 쓴웃음을 짓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역시 닮았네.’
아무래도 이쪽 집안은 모계 쪽 혈통이 강한 모양이다. 설아 누나를 완전히 빼다 박은 얼굴로 쓴웃음 짓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낼 기운도 사라졌다.
‘따지고 보면 나도 얻은 게 있기도 하고.’
머릿속에서도 한산월 아주머니에 대한 불평보다 변호하는 변명이 먼저 떠올랐다.
“괜찮습니다. 이해는 했으니까요.”
“그렇구나.”
납득하고 이해해 주는 내 대답에 한산월 아주머니가 입가에 드리우던 쓴웃음을 지웠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에 떠오르는 것은 곤혹스러움이다.
이유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좀 시끄러웠어야지.’
중토신공 삼단공의 힘에 삼재일기공을 통해 끌어모은 힘을 합쳐 극강격에 실었다. 그 후폭풍은 땅을 진동시킬 정도로 컸다.
표국 내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이 진동의 근원이 어디였는지 알았을 거다.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거란 소리다.
내 감각에 잡히는 인기척으로 보건대 이미 몇 명은 와 있기도 하다.
“설아와 무호에게 잘 전해 줄 수 있겠니?”
“그건 싫은데요.”
“……응?”
딱 잘라 거절당할 거라 생각하지 못하셨는지 한산월 아주머니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어른이시면 어른답게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하셔야죠.”
‘너무 날로 드시려 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럼 이만.”
당황하시는 한산월 아주머니를 향해 방끗 웃어 준 뒤 잽싸게 도주했다.
‘여기서 어물쩍거렸다간 양각을 잡히게 될 거라고.’
설아 누나가 한산월 아주머니와 싸우게 되면 십 중 십으로 말려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 편도 못 들고 쩔쩔매겠지.
동시에 복수의 상대와 싸우지 마라. 이건 병법에도 나와 있다. 그러니 이건 전략적 후퇴라고 해두자.
소소한 심술이기도 하고.
***
“어렸던 녀석이…….”
연청운은 설아, 무호와 어울리며 자랐던 아이다. 한산월 역시 연청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고얀 녀석으로 자랐구나.”
한산월 본인은 연청운을 좋게 볼 수 없었지만.
어렸을 적, 마을에 재해가 닥쳤던 적이 있었다.
본가의 천형 때문에 마음에 깊은 응어리가 있어 사람을 기피했던 설아는, 따뜻한 인간적 교류를 나눠 온 연청운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비록 결과는 좋았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번에 백무호가 얻어 온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공, 본가와 은원이 있는 암류가 의심되는 흔적을 보았을 때 감정적으로 된 것도 그때 심어진 오랜 묵은 감정이 흘러나온 영향이 컸다.
한산월 본가의 천형과 얽혀 있는 암류.
그것은 한산월의 옛 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이야기다.
한산월의 선조는 무공에 재능은 있었으나, 기반이 없었다.
그랬던 선조에게 누군가 찾아와 하나의 무공과 지금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고대의 수법을 몸에 심었다.
그 무공은 한천마경이란 무공이었다.
한산월의 선조는 강대한 힘을 얻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음한지기는 수명을 갉아먹었다.
그 고대의 수법은 대를 이어 전해졌다.
가문의 첫째 아이는 언제나 여아였으며, 음한지기는 혈맥 속에 녹아 전해 내려왔다.
태어날 때부터 폭주하는 음한지기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한천마경을 익혀야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짧은 수명과 어릴 때부터 음한지기로 인해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선조들 중에서는 결국 주화입마에 빠져 무림에 혈겁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었다.
그로 인해 무림에서 백발마녀(白髮魔女)라든가, 소수신마(素手神魔) 같은 별호로 불리며 공포로 자리했다.
다행히 타고난 재지와 지혜를 기반으로 수명을 바쳐 가며 매달린 선조들의 몇 대에 걸친 노력 끝에 한천마경을 일부 뜯어고쳐 음한지기를 누를 방도를 찾아냈기에 더 이상 혈겁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으나, 오랜 세월 쌓아 온 원한은 깊었다.
이후 한산월의 선조는 가문의 원수를 추적했고, 그 오랜 추적 끝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림은 오랜 세월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라는 세 세력의 균형 사이에서 유지되어 왔다.
허나 그들 사이에 세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또 하나의 세력이 존재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면으로 그 힘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암암리에 그런 기류 한 가닥이 흐른다는 것은 알아냈다.
그들은 재능 있는 자들에게 집착하며 암암리에 접근했다.
한산월이 서문대성에게 우연을 가장하여 접근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과정에서 차기 화산파 장문제자의 자리마저 박찰 만큼 자신을 사랑한다며 구애해 온 백진성을 만나게 되었다.
자의인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것인지 갑자기 서문대성이 자취를 감추며 한산월도 백진성과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한산월이 감정을 드러낸 진짜 이유였다.
설아와 무호는 어머니라는 가산점을 제외하고 보아도 뛰어났다. 암류의 존재들이 안다면 반드시 탐낼 만한 재능들이다.
그렇기에 무호에게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무공의 흔적을 보았을 때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어느 정도…… 해소가 되긴 했지만.”
한산월은 아직 완전히 연청운을 신뢰하지 못했다.
암류의 깊이는 깊다. 지금도 여전히 본가의 힘을 총동원하여 추적하고 있으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접촉해 올지도 모르지.”
연청운은 스스로가 설아나 무호에 못지않은 재능을 지녔음을 내보였다. 암류가 보인 행적을 생각한다면 저만한 아이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한산월은 연청운을 관심 있게 지켜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연청운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주제 모르고 날뛰는 철부지의 행동은 꼴사납다. 허나 자신을 증명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만과 자신감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그건 그렇고, 이 철없는 망아지는 어찌해야 할꼬?”
연청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한산월은 다음 걱정거리를 고민하며 잠시 뒤 찾아올(쳐들어올) 딸내미를 기다렸다.
“……응?”
그런데 한산월을 찾아온 사람은 그녀가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사람이었다.
“낭군이 여길 왜……?”
“가족끼리 언성 높일 일은 없는 편이 좋잖아. 설아와 무호라면 내가 잘 다독였어.”
생글생글 웃으며 한산월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백진성이었다.
한산월은 그런 백진성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아직도 삐쳐 있어?”
“…….”
대답을 하지 않고 있지만, 수긍한 거나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낭군은 무모했다.”
서문대성의 제자라 생각한 연청운과 무호를 함께 여행 보냈던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성은 내 가장 가까운 친구였어. 녀석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녀석이었다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지.”
“…….”
“그리고 서문대성 그 친구가 우리 이쁜이도 알 수 없는 모종의 세력과 연관이 있단 증거도 없고.”
아내를 부르는 다른 점잖은 표현도 있을 것인데 백진성은 한산월을 굳이 이쁜이라고 불렀다.
자기 생각이 부정당한 탓인지, 그게 아니면 낯간지러운 표현으로 불린 것에 대한 창피함 때문인지 한산월의 얼굴에 가벼운 홍조가 어렸다.
“믿어 보자고. 서문대성을 믿기 어렵다면 내 눈을, 설아와 무호의 눈을 믿어 봐. 청운이는 절대 우리 집안에 해를 끼칠 아이가 아니야.”
“……흥!”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백진성의 말에 한산월이 고개를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백진성이 한산월에게 조용히 다가가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기억나? 우리가 서로 처음 마음을 나눴을 때 내가 했던 말.”
“…….”
“이생이 다하는 날까지, 나 백진성은 언제나 그대, 한산월을 사랑하겠습니다.”
손이 잡혀 있는 한산월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더욱 고개를 돌렸다.
백진성이 그런 한산월을 냉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조금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이전 삐쳤을 때 풀었던 방식으로 가 볼까?”
무슨 방법을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은 한산월의 얼굴이 순간 가을에 한껏 물든 단풍잎처럼 변했다.
“나, 낭군. 지금은 대낮이다!”
“괜찮아. 사랑만 있으면 그런 사소한 부분은 문제가 안 된다고.”
“아, 안 된다……니까…….”
발갛게 물든 한산월의 목소리가 뒤로 이어질수록 힘을 잃고 낮게 잦아들었다.
***
장삼풍을 비롯한 천상계의 사부들은 업무 사이사이 교대를 한다고 하지만, 온종일 연청운을 살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든다면, 연청운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는 사부들도 자리를 비운다.
재미가 없으니까.
그 시간을 노려 자오경에 접근하는 이가 있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천상의 대신격.
오랜 세월 권태로움에 시달려 온 그 존재가 눈을 빛내며 자오경을 향해 다가갔다.
“인과율이라는 게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지. 이딴 말도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지상에서 뭔가 엄청난 비틀림이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소년의 모습을 한 대신격은 인과율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천상의 일좌, 선계를 이끌어나가는 자리에 있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년의 모습을 한 대신격을 지칭하는 표현은 많다.
태극의 화신이자 검은 하늘의 주인이라 불리기도 했던 그는 현재 옥황상제가 맡고 있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주인이었던 존재이기도 했다.
모든 생사를 주관하는 칠성검(七星劍)의 주인.
북극성제군(北極星帝君).
자미북극대제(紫微北極大帝).
무당파에서 숭배하는 최고신 진무대제(眞武大帝)가 바로 이 존재다.
선계에서도 삼청(三淸)이 아니면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지극한 존재.
현천상제(玄天上帝).
그런 존재가 자오경과 그에 비치는 연청운에게 강한 흥미를 드러냈다.
“하늘이 이 정도 인과를 모를 리는 없고……. 알고도 방관하는 거겠지. 그렇다는 건 이 기물을 통해 인과율을 감당하는 주체가 따로 있단 소린데…….”
현천상제가 손을 들었다. 그저 손을 들어 움직였을 뿐인데 천상의 일부분이 검게 물들며 먹구름 낀 바다의 표면처럼 일렁였다.
힘을 드러낸 것만으로 천상의 형태가 바뀐다.
“그럼 좀 즐겨도 되겠지.”
오래전 권위는 잃었으나 그 힘과 영향력은 온전하다는 걸 보여주는 그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그려졌다.
“사제지간의 훈훈한 이야기도 나쁘지 않지만, 내 취향은 좀 더 화끈한 거라서 말이야.”
천상의 선계를 뒤흔드는 힘. 어지간한 신선들조차 기경할 만한 힘이 현천상제의 손에 어렸다.
인과를 대신 떠안을 존재가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아마도 자오경은 연청운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 통로를 따라 천상의 간섭에서 지상을 보호하고 있는 봉신대결계 너머로 이 힘이 전해지리라.
그럼 지금보다 더 화끈하고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겠지.
그런 계산하에 저지르는 막가는 짓이 자오경에 닿았다.
삐익!
“……?”
하지만.
“……뭐야? 이거 왜 꺼져?”
조금 전까지 연청운을 비추고 있던 자오경이 기능을 잃은 듯 툭 꺼져 버렸다.
어이가 없어진 현천상제가 자오경에서 손을 떼니.
“……이것 봐라?”
삼원(三元)의 화신인 삼청(三淸)이 아니면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현천상제를 놀리기라도 하듯 다시 자오경에 잠꼬대를 하고 있는 연청운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