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9
8화 가‘족’같은 ‘족’마고우(2)
만나자마자 시답잖은 말이나 하며 놀려 대는 백무호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백무호는 무인이다.
무인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있던 내가 무인으로서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재능의 소유자.
백무호를 추한 마음으로 시샘하거나 질투하진 않았으나, 부럽다는 생각만큼은 곧잘 하곤 했었다.
화산파의 속가제자 중에서도 이름이 높은 백진성에게 무공을 배운 백무호는 어릴 때부터 구대문파의 무공을 수련한 기재였다.
내가 구대문파 중 하나인 무당파로 수학을 떠나고자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게 얕게나마 무당파를 경험했기에 이전보다 더 분명히 알게 된 부분도 있었다.
백무호가 어느 정도 기재였는지.
저 성정 때문에 일생의 대부분을 산속에 묶여 있고 싶지 않아 도명을 받는 본산제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일 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화산파 같은 곳조차 본산제자로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기재였다.
아니, 기재라는 말보다는 천재라는 말이 어울릴 거다.
백무호는 진짜였으니까. 어릴 적 천재 소리를 듣고 자라 왔을 숱한 기재들을 범재로 내려 앉혀 버리는, 스스로의 재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 자괴감을 선사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대치는 내게 있어 그 의미가 사뭇 남달랐다.
감각을 끌어올린 나는 새롭게 얻은 힘, 청경을 통해서 백무호를 봤다.
나를 맞이해 손을 뻗어 오는 백무호가 보였다.
내가 ‘보는’ 것은 단순히 백무호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보인다.’
흐름이 보인다.
백무호의 손을 뻗는 동작에서 그 손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갈지, 그 손이 그리는 궤적이 선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보는 것은 현재이지만 본 그것이 머릿속에 들어올 때는 미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 잠시 뒤의 백무호가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너무나 손쉽게.
과거의 나는 백무호가 무공을 펼치면 넋 놓고 보기만 바빴다.
백무호의 아버지, 백진성이 화산파의 매화산수(梅華散手)를 바탕으로 자신의 수준에 맞게 고쳐 만들었다는 난화복산수(亂華複散手). 화산파를 뿌리로 둔 무공답게 현란함이 돋보이는 무공이다.
매화산수는 극성의 경지에 다다른 자가 펼치면 사방이 시전자의 손 그림자로 가득 차 있다 느낄 만큼 변화에 치중된 무공이다.
변화 가득한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난화복산수 역시 그와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백무호의 입장에서는 우선 나를 다치지 않게 하는 선에서 제압할 생각으로 펼친 무공으로 보였다.
‘보여.’
이전이라면 보지 못했을 세계가 보인다.
그 너머까지도 보인다.
거기에서 이미 승패가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변화만이 장점인 무공이 그 변화의 흐름을 읽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변화 속에 몸을 넣었다.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두세 번의 손짓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부님들의 수련을 겪다 보면 온몸에 뼈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한창 수련 중이었던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그 손속이 빠를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손을 원하는 곳으로 뻗었다.
그리고 원하는 곳에 닿았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투로 사이의 틈새.
대나무 숲을 지나는 뱀의 허리처럼 파고든 내 손은 간단하게 백무호의 팔꿈치 부근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헛?”
변화무쌍하게 투로를 움직일 때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곳은 어디일까?
손끝이다. 움직임의 끝자락이다. 그곳이 빠르고 힘차게 움직여야 비로소 현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변화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가장 둔하게 보이는 곳은 어디일까?
중심이다.
그 현란하게 움직이는 변화를 지탱하는 중심.
사람으로 치면 관절이 그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팔꿈치 같은 곳.
그렇기에 진짜 고수들은 그 중심부, 약점을 잘 노출하지 않는다. 무공의 특성상 그게 어렵다면 보법을 활용하여 감춘다. 상대가 그 부분을 노리기 어렵게 발재간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거다.
백무호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방심하여 거기까지는 활용하지 않은 건지.
그런 나를 떨쳐내기 위해 백무호가 뒤로 물러서며 팔을 흔들었지만.
“늦어.”
나는 팔을 흔들며 물러나는 백무호를 악착같이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러나는 만큼 그에 맞춰 행동을 같이했다.
상대가 뒤로 물러나면 앞으로 나가고, 앞으로 밀어내면 뒤로 물러난다.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상대에게 자신을 맞춘다.
[그래, 그게 사기종인이다.]흥이 돋았는지 장삼풍 사부의 말이 머릿속에 퍼졌다.
무거운 짐 덩어리처럼 그저 달라붙은 내 움직임에 백무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비로소 자신의 움직임을 드러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착과 인. 잡고 흔든다.
그 사이에서 틈이 생기면.
‘던진다.’
균형이 흔들려 휘청거리고 있는 것은 천근의 바위라 할지라도 어린 애의 힘에 넘어질 수 있다.
백무호의 움직임에 스며들 듯 달라붙은 나는 그 틈새를 제대로 파고들었다.
그 결과는 명확했다.
“하늘이 푸르냐?”
나는 멍한 얼굴로 땅에 누워 있는 백무호를 보며 물었다.
쓰러진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을 내겐 보이지 않을 풍경이다.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백무호가 웃음소리 같은 짧은 숨을 내쉬며 답했다.
“하! 오지게 푸르다, 이 자식아.”
웃으며 말하지만, 그 대답 사이에는 언뜻 투쟁심 같은 것이 엿보였다.
백무호가 좋은 녀석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무인인 것도 사실. 패배를 겪고도 마냥 좋아할 녀석은 아니다.
“읏차!”
던져져 넘어진 거야 별거 아니라는 듯 백무호가 재주를 넘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에서 적당한 길이의 막대기 하나를 들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장원 안쪽이다 보니 실생활에 쓰이는 막대기 몇 개 정도는 주변에 제법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백무호가 기수식을 취했다.
“제대로 해 볼까?”
화산파는 대대로 정통의 명문. 그리고 그들이 명성을 날려 온 무공은 소림이나 무당처럼 적수공권의 무공이 아니다.
검(劍).
화산파는 검의 명문이다.
검을 들었을 때 비로소 화산파 무공은 그 진가가 드러난다.
막대기일 뿐이지만 제대로 해 보자는 백무호의 기세는 조금 전과 달랐다.
그런 백무호를 시원하게 던져 버렸던 내가 혀를 찰 만큼.
‘지금은 안 돼.’
검법을 쓰는 백무호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몸이 제대로 된 상태라면 또 모를까. 지금은 아니다.
기진맥진한 지금 상태로는 백무호가 거리를 잡은 상태에서 보법만 활용해도 따라잡기가 어렵다.
하지만 승부욕에 불이 붙은 백무호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진 않다.
“지쳐 있는 사람에게 꼭 검까지 써야겠냐?”
“한 대만 맞자, 한 대만.”
끝끝내 저걸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려는 모양이다.
나는 결국 비장의 수를 쓰기로 했다.
“저쪽이나 한번 보고 이야기해 보시지?”
“저쪽에 뭐가 있는…….”
손가락으로 측면을 가리키며 말하는 내 언급에 백무호는 본능적으로 그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백무호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곳에는 이쪽을 글썽글썽한 눈으로 보고 있는 동생 청우가 있었다. 글썽글썽한 눈이 꼭 ‘우리 형 때릴 꼬야?’라고 묻는 것 같았다.
“와, 진짜…….”
석상처럼 굳어 있던 백무호가 결국 팔을 내렸다.
“너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사악해 졌…… 응?”
차마 손에 쥔 것을 휘두르지 못하고 거둔 백무호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던 중 조금 전과 다른 변화된 내 모습의 한 부분에 주목했다.
“너 왜 웃통을 까고 있냐?”
“왜긴. 말했잖아.”
백무호의 물음에 나는 최대한 사악하게 웃었다.
“땀 맛을 보자.”
그리고 벗어서 둘둘 말은 상의를 그대로 백무호의 얼굴에 처박았다.
“악! 미친!”
“입 닫고 숨 참아. 숨 쉬고 소리 지르면 더 괴로워.”
“야! 악! 스읍! 아악!”
폭력적으로 덮쳐 오는 땀 맛(?)에 백무호가 비명을 지르다 숨을 참고 다시 비명을 지르길 반복했다.
그래, 이게 등짝에서 추출된 땀 맛이라는 거다. 무호야.
[좋을 때다.] [허허허. 청춘이라.]장삼풍 사부와 달마 사부는 내 사악한 면모가 퍽 마음에 드는지 기분 좋게 웃으셨다.
***
연청운에게 잔뜩 당한 것 때문에 머리를 산발하고 있는 백무호는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으며 투덜거렸다.
“아, 젠장. 아직도 냄새가 나는 것 같네.”
백무호는 코를 킁! 풀었다. 아직도 콧속 어딘가에 뭔가가 남아있는 느낌이 든 탓이었다.
깃털로 발바닥을 간지럽히듯, 냄새가 머릿속의 뇌를 간질거리는 느낌이랄까.
그 잔향이 남아있는 기분에 몇 번 더 연청운에 대한 욕을 하던 백무호가 이내 표정을 달리했다.
“그런데, 그 녀석 강해졌는데?”
솔직히 연청운이 그리 강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연청운이 무당파에 가서 가르침을 받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까.
뭔가를 이뤄냈다고 보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나름 스스로의 재능을 자부하는 편인 백무호의 입장에서 봐도 그랬다.
백무호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실력과 자질을 인정받아 이른 나이에 이미 표행에 나서고 있다.
실제로 집에 돌아온 지 꽤 시일이 지난 연청운을 이제야 보러 왔던 것도 표행을 나갔다가 이제 막 돌아왔던 탓이었다.
그런 백무호의 기량은 스스로 자부할 만한 것이었다.
천재라 불리는 족속들일지라도 연청운이 수련한 기간을 생각하면 백무호의 털끝도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수준이어야 맞다.
고작 속가제자의 아들이 스스로의 무공에 자신이 있다고 하면 웃을 사람도 있겠지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부모님은 일반적인 분들이 아니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백무호의 부모님은 속가제자라는 말과 아득한 거리가 있는 분들이셨다.
하지만 연청운 앞에선 깨져 버렸다.
“우연……은 아니었지?”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역시 스스로에게 편리한 방향이었다.
방심했다.
속 편하게 생각하려면 역시 그걸 이유라고 보는 것이 간단하긴 하다. 실제로 방심하는 마음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허나 당시 연청운이 꽤나 지쳐 있었던 상태였음을 고려하면 꽤나 속 좁은 변명이 되어 버린다.
백무호는 편협한 성격이 아니었다. 적어도 눈앞에서 있었던 일을 왜곡해서 보는 성격은 아니다.
그것이 본인의 자존심이 다치는 일이라도.
“그런데, 그 자식. 무당파에서는 왜 쫓겨난 거지?”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일찍 돌아왔다는 건 쫓겨났다는 소리다. 솔직히 백무호도 처음 연청운을 찾아갔을 때는 적당히 위로해 줄 생각이었다.
한 수에 내던져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저런 녀석이면 어떻게든 잡았어야 할 건데. 무당파도 한물갔나?”
가재는 게 편이라고, 어쩌다 보니 무당파의 험담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무당파를 씹어대는 사이 어느새 집을 앞에 두었다.
그렇게 대문으로 향하던 백무호는 희귀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 핏줄이지만 곱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미녀가 대문 입구 부근에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백설아.
백무호의 누나 되는 사람이었다.
밖에 좀처럼 나오는 일이 없기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표행을 다니며 여러 곳을 주유했어도 그녀와는 비견될 만한 미인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미모는 호북제일. 아니, 어쩌면 천하제일미를 다투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전생에 원수였을 것이 분명하다는 한배를 타고 난 사람의 눈에도 그리 보일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좀처럼 밖에 나오는 일이 없는 누이가 문밖에서 서성이는 모습에 그 이유를 짐작한 백무호가 피식 웃었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백무호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서성거리던 백설아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멈춘 발걸음만큼이나 분명하게 고정된 시선이 백무호를 향했다.
어떻게 보면 눈처럼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그 눈동자에서 백무호는 ‘어디?’라는 글귀를 읽었다.
“청운이랑은 같이 안 왔어.”
“……누가 물어봤니?”
백설아의 목소리는 청아한 음색에 어울리지 않게 새침한 기분이 실려 있었다.
그런 기색을 대번에 알아본 백무호는 실실거리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무당파 여제자 입욕 같은 걸 훔쳐보다 쫓겨난 건 아니라니까.”
백설아의 고운 얼굴이 백무호의 말에 싸늘히 굳어졌다.
특히 눈빛이 가관이었다. 백무호를 까맣고 납작한 벌레 보듯 하는 싸늘한 눈빛이 그 존재감을 발했다.
그러길 잠시.
“잘 지내고 있고?”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탈이지. 내 옷에 흙 묻은 거 안 보여? 그 자식이 날 패대기치더라.”
“너를?”
백설아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하지만 곧 평상시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불쾌함을 담아서.
“농담도.”
여전히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는지 싸늘하게 답하는 백설아가 몸을 돌렸다.
그런 백설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백무호가 낄낄 웃었다.
“하여간, 냉정한 척은 다 하는 주제에 알기 쉽다니까. 뭐, 직접 보면 놀라려나?”
자신 못지않게 놀라 평정을 잃어버릴 누이의 모습을 상상한 백무호가 다시 한번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아, 좋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뭔가를 떠올리며 다른 의미로 히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