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55
제55화 – 거기가 맞소?
“몸을 옮기더라도 나를 기억해줘, 선.”
기가 막혔다. 안진은 전생을 할 때 유일하게 가져갈 수 있는 원념에 그녀를 담으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려도 너는 기어이 그 여자를 만나러 갈 테지? 그러고는 나를 영영 떠날 테지?”
어디서 재수 없는 소리를!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큰소리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그 노인도 무지하게 셌어. 개세팔천도 아니면서. 나는 도원에서 나올 때 그들 말고는 내 적수가 없을 거라고 자신했어. 정말 세상을 몰랐던 거지. 사부가 개세팔천과 붙으면 승부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을 때 빈말이라고 여겼는데 사실이었던 거야. 그 여자가 사부만큼 강하다면, 그리고 너한테 반감을 품고 있다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전생뿐이잖아? 도저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안 그래?”
부인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묵묵부답한 건 그래서가 아니었다. 안진의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부담스럽게.
“내가 너보다 강하다면 강제로 너를 제압해서 도원에 끌고 갈 거야. 아니면 아무도 찾지 못할 심산유곡에 들어가 숨거나.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네 삼초지적도 못 돼. 네가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터무니없이 늘었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가지만 엄연한 현실이잖아. 그러니 받아들일 수밖에.”
어울리지 않게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안진이 기어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네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 있다면 무릎 꿇고 빌 용의도 있어. 하지만 너는 쇠고집이니까 내가 그렇게 애원해도 말을 듣지 않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의 진혼과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는 것뿐이야. 그러지 않으면 너는 나를 잊을 테니까. 설령 먼 훗날 인연이 닿아 나를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도 없을 테니까.”
나는 침묵을 깼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나한테 집착하는 거요? 우리는 만난 지 스무날도 안 됐잖소? 그것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당신이 집중수행을 하느라 변변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는데. 그런 때조차도 티격태격하기만 했고.”
안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부한테 네 얘기를 들은 건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야. 그날 이후 이십 년 가까이 네 생각을 해왔어. 이상하게 너를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어. 나는 그게 너에 대한 경쟁심, 혹은 적개심이라고 착각했어. 사부가 너를 악마의 본성을 타고 난 ‘작은 마귀’라고 불러서만이 아니야. 본능적으로 네가 나의 맞수가 되리라 예감해서였어. 나는 너한테 지기 싫어서라도 악착같이 수행했어. 너는 내 성장의 밑거름이자 가장 큰 동력이었어.”
여기서 노인네와 재수 없는 늙은이의 인품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나에 대해 악담을 퍼부은 그 늙은이와는 달리 노인네는 도가에서 나온 천년기재를 두고 나와 훌륭한 도반이 될 거라 덕담하지 않았던가.
안진이 울면서 미소를 지었다. 괴상하면서도 귀여웠다.
“그날 너를 처음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전날 말했듯 나는 사부 말만 듣고 너를 흉신악살로 상상해왔어. 근데 도원은 물론이고 속세에 나와서 보았던 어떤 사내보다도 잘 생겼지 뭐야. 하지만 내가 첫눈에 너한테 반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어. 나는 껍질 따위에 혹하는 여자가 아냐.”
안진은 말을 잇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이 빤히 보였지만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럼 뭣 때문이었소?”
“네 마음.”
“…….”
“내겐 심안(心眼)이 있어, 선. 그걸로 사람의 본바탕을 볼 수 있지. 수행과는 상관없는 선천적인 능력이야. 다만 아주 완전하진 않기에 함부로 사용하진 않아. 편견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실제로는 장롱 깊숙이 넣어둔 진주목걸이와 같아. 평소엔 목에 걸 일이 없지. 그런데 너를 보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더라. 사부의 말을 듣고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으니까. 그래서 모처럼 심안을 꺼내 네 속을 들여다봤어. 그러자 상상도 못 했던 그림이 나왔어.”
“…….”
“단적으로 네 심혼은 완벽한 암흑과 티끌 한 점 없는 순백의 결합물이야. 전자는 네 본성일 테고 후자는 상선 어르신이 일구신 후천적인 심상일 텐데 상극인 두 개가 너무나 조화롭게 맞물려있었어. 어떻게 그런 기사가 있을 수 있지?”
“…….”
“어느 게 진짜 너인지는 무의미해. 둘 다 너니까. 어쨌거나 네 언행을 보건대 주도권을 쥔 건 순백의 마음이야. 나는 그 마음을 응원해주고 싶었어. 사부가 틀리고 상선 어르신이 옳았음을 네가 증명해주길 바랐어. 너를 위해서.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너는 사부와 무관하게 화를 자초하려 하는구나. 그러니 내가 어떡하겠어? 전생을 통해 다른 몸으로 태어날 이와 새로이 인연을 이어갈 수밖에. 그게 너는 아닐 테지만, 너이기도 하니까.”
“…….”
“왜 아무 말도 없어? 나, 너무 미워하지 마. 너한테 삐딱하게 군 건 내가 서툴기 때문이야. 나는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사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어. 그래서 그렇게 아이처럼 굴었던 거야.”
나는 손을 뻗어 안진의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엄지들이 그녀의 보드라운 살갗에 닿자 안진이 뻣뻣하게 굳었다.
“당신을 미워하지 않소.”
진심이었다. 상단전에 선연한 청화를 피워올린 여인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내 손길에 경직되었던 안진이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밀쳐내지 않고 가볍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발돋움을 하며 고개를 쳐든 그녀에게 입맞춤을 선사하진 않았다. 그 선마저 넘으면 걷잡을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내 담담한 눈빛을 보고서 입맞춤의 미련은 버렸으나 안진이 다른 욕심을 부렸다.
“그럼 나하고 달아날래?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고 굳이 호랑이를 만날 이유는 없잖아?”
“그건 안 되오. 나는 그녀를 봐야 하오.”
“그러다 그 호랑이가 잡아먹으려 들면?”
“…….”
안진이 내게서 떨어졌다.
“꼭 그렇게 해야겠다면 내가 좀 전에 했던 부탁은 들어줘. 그럴 거지?”
그럴 순 없었다. 만약 전생을 택해야 한다면 나는 ‘무림 말살’의 원념을 품을 작정이었다. 무림 전체보다 나 하나가 더 소중했지만 그래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안진에겐 속을 밝히지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전생할 일은 없을 거요.”
기다렸다는 듯 안진이 코뚜레를 꿰려 들었다.
“그럴 거라 맹세할 수 있어?”
적절한 답변을 준비해두고 있었기에 나는 즉답했다.
“최선을 다할 참이오.”
***
죽림 밖에서 기다리던 칼잡이는 안진과 함께 나오는 나를 보고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안진을 제지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을 터였다.
“따라오십시오.”
안진을 슬쩍 노려본 칼잡이가 등을 돌리더니 빠르게 걸어갔다. 그의 뒤를 따르며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 곧 무후와 대면하게 될 터였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칼잡이가 나를 이끈 곳은 무후의 처소라 보기 어려운 범박한 이층 와옥이었다. 출입구 위에는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와옥으로 나를 들이지 않고 문 앞에 멈춰 선 칼잡이가 포권했다.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칼잡이를 붙잡고 다음 일정에 관해 물으려다 말았다. 문상이 심부름꾼에 불과한 그에게 알려주었을 리가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와옥에는 두 명의 시비만 있었다.
모두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들은 내가 들어가자 큼직한 욕조 두 개가 놓인 방으로 데려가더니 옷을 벗기려 들었다. 내가 기겁할 겨를을 주지 않고 안진이 난리를 쳤다.
시비들을 쫓아낸 안진이 자기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통이 두 개네?”
하아, 이 여자 보게나.
“내가 먼저 씻겠소.”
괜히 욕조의 물이 미지근하네 마네 하며 미적거리더니 차마 같이하자는 말을 못 하고 안진이 방을 나갔다.
수욕을 마친 나는 피로 얼룩진 흑색 무복 대신 선반에 놓인 깨끗한 백의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와옥의 다실로 가서 시비들이 내온 차를 마시며 문상에게서 통보가 오기를 기다렸다.
와옥에 들 때 아직 동천 아래편에 걸려있던 해가 중천으로 올랐다.
그때까지도 문상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시비들에게 그녀에 관해 물었지만 자기들은 나를 시중들라는 명만 받았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고월서각으로 가서 문상을 찾아볼까 하다가 그냥 와옥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아마도 문상은 무후가 수련을 마칠 때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무후는 중대한 이유 없이 수련을 방해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 걸로도 유명했다.
해가 서천으로 기울더니 하늘에 노을을 남기고는 떨어졌다. 미처 어둠이 깔리기도 전에 처처에 등이 걸려 다실 퇴창 밖으로 보이는 사위는 대낮처럼 밝았다.
진종일 안진의 잔소리에 시달리던 나는 와옥을 나왔다. 뜻밖에도 아무도 제지하는 이가 없었다. 몇 번이나 고월서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단념하고 마당만 서성거렸다.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이러다 자시에 부르는 건 아닐까 고심하던 차에 드디어 문상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쇳덩이를 부풀린 것 같은 근육을 자랑하는 네 명의 역사(力士)가 받쳐 든 가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따라와요. 오 공자만.”
나는 문상의 요구를 거부하려는 안진을 말렸다.
“여기 있구려. 금방 다녀오겠소.”
안진이 나에게 안겼다. 나는 그녀를 받아들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포옹이 자연스러워졌을까.
“약속 지킬 거지, 선?”
약속이 아니었지만 내 말의 의미를 규정하느라 실랑이를 할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요.”
안진이 내 허리를 감은 팔을 풀었다. 그녀가 울먹거릴 태세인지라 얼른 몸을 돌린 나는 가마 속의 문상에게 말했다.
“갑시다.”
안진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오랫동안 나를 따라왔다.
야심한 시각이긴 했으나 길엔 이상하리만치 행인이 없었다. 문상이 미리 무후에게로 이르는 경로를 비워두었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오?”
“반 시진쯤 걸릴 거예요.”
그렇게나 오래 가야 한단 말인가.
“미안해요. 내가 마차는 질색이라서.”
“그러면 애초에 그곳 근처에 나를 두었으면 됐잖소?”
“그러네요.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이 여자가 장난하나.
짜증이 일었지만 이제 와서 항의해봤자 입만 아플 터이기에 참았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소.”
“뭔가요?”
“이 대담에서 어떤 결론이 나건 안 소저와 보양에 있는 내 친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뭐요?”
내 반문에 문상이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보장해 줄 거요?”
“그이들의 안위는 내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사안이에요. 그러니 보장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이 여자가 왜 이렇게 냉랭해졌지? 무후를 보기 전에 도주하라는 권고를 뿌리쳐서 심통이 난 건가. 아니면 이 여자도 무후와의 대면을 앞두고 긴장해서 그런 걸까.
“미리 말하지만 그녀에게 가면 나는 오 공자 편을 들어줄 수 없어요. 어떤 상황이 닥치건 오 공자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해요.”
“당신에게 신세 질 생각 없소.”
“잘 됐군요.”
그걸로 우리의 대화는 끊겼다.
유령의 마을 같은 인적 없는 대로를 반 시진이나 걸은 후 문상이 목적지에 당도했음을 알렸다.
“다 왔어요, 저기가 그녀의 수련장이에요.”
나는 좌측의 으리으리한 궁전에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가마에서 나온 문상은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가는 방향엔 벌거숭이 동산만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청력을 최대한 돋우었으나 그쪽 어디에서도 호흡이 잡히지 않아 의구심이 들었다.
“거기가 맞소?”
면사 여인은 답을 주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