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568
#567화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저 붉은 눈을 마주하는 것이.
이제는 불길함을 넘어 오싹하기까지 한 석고준의 눈빛에, 고세원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는 경호팀장이다.
폭주하는 석고준을 잠시나마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브레이크였고,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를 두려는 상관의 선택을 만류할 의무가 있었다.
“부길드장님.”
석고준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듯한 감각에, 고세원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지금 하신 말씀…… 진심이십니까?”
석고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아니지. 고 팀장은 내가 그 정도로 병신처럼 보이나?”
“아.”
설마 하는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고세원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최근 석고준의 성격이 급격히 난폭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송천우의 집안 식구들까지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리는 없…….
“죽이진 말고, 붙잡아 와.”
“예?”
“못 들었나?”
그럴 리가.
고세원은 10m 밖에 있는 모기 날갯짓 소리도 들을 수 있는 A급 헌터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묻는 것은, 차라리 안 듣는 것만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쾅! 우직!
불과 며칠 전 교체된 테이블이 다시 한번 박살 났다. 석고준의 두 눈동자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잡아 오라고. 송천우가 매일같이 물고 빤다는 손주 새끼건, 유럽 실버타운에서 만난 백인 할머니건 간에. 그 늙은이 명줄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친 석고준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고 팀장. 당장 애들 풀어서 잡아와.”
“……!”
“왜. 이번에도 못 들었나?”
두 번은 없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달은 고세원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대로 들었습니다.”
“그럼 바로 움직이면 되겠네. 아, 그 늙은이 집안 식구들이 어디 산다고 했지?”
“런던 외곽 지역입니다. 성을 개조해서 지은 대저택에 일가(一家)가 모여 살죠.”
그야말로 유럽 귀족과도 같은 삶.
일찍이 내부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송천우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이정룡의 묵인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로서의 옛정? 관용? 이정룡에게는 전부 양배추만큼이나 쓸모없는 단어다.
그것은 단지 상대를 몇 수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오만함이었고, 그 오만함이야말로 압도적인 힘을 지닌 강자의 여유였다.
‘그분은 유일했던 정적(政敵)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고 통제했는데, 그분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가족들을 납치할 생각부터 하는군.’
타고난 기질. 즉 그릇의 차이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빠르게 밀어낸 고세원이 말을 이었다.
“자식 내외와 손주들을 합해서 열세 명 정도인데. 손주 중 몇 명은 헬기나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여 통학 중입니다. 물론 실시간으로 위치를 보고받고 있고요.”
“손 썼어? 언제부터?”
“입국 직후입니다. 당시에 보고드렸지만 부길드장님께서 워낙 바쁘신 것 같아, 우선 제 선에서 조치해 뒀습니다.”
“일 잘하네, 우리 고 팀장. 결혼한 후로 감 잃은 줄 알았는데.”
“……감사합니다.”
칭찬과 힐난이 동시에 서린 한마디. 다시금 고개를 숙이는 고세원을 내려다보던 석고준이 문득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참 은혜도 모르는 늙은이군. 지금까지 자리 보전시켜 준 것만으로 감지덕지했어야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원래대로라면 새해가 밝기 전 은퇴했어야 할 송천우다.
하지만 중국에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와 이정룡의 죽음은 늙은 사자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야망에 불씨를 지폈고,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은 슬그머니 늙은 사자의 뒤에 줄을 섰다.
대대적인 세대 교체를 앞둔 원로 세대의 중진들.
바로 그들이 하이에나 무리다.
“빌어먹을 노친네들 같으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서성이던 석고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놈은?”
그놈.
이름 한 글자 나오지 않은 누군가에 대한 지칭이었지만, 고세원은 즉각 알아들었다.
사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하이에나 무리를 이끄는 늙은 사자가 아니다.
아레스 길드의 높은 울타리 밖,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노리는 젊은 숫사자다.
“최민우는 평화 길드로 복귀했습니다.”
“송천우 그 늙은이와 만난 건 확실한 건가?”
고세원이 즉각 대답했다.
“만남 자체도 워낙 은밀했고 고위 환영 마법으로 위장했지만, 확실합니다.”
“홍 이사 그 인간은 어때. 믿을 만해?”
홍 이사는 송천우와 함께 명예퇴직을 앞두고 있던 원로 세대의 한 사람이자, 오늘의 만남을 전해 준 기특한 정보원이다.
고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황 판단이 빠르더군요.”
“그 양반이 예전부터 눈치는 귀신이었지. 그래도 방심은 하지 마. 송천우와는 삼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중입니다.”
배신의 배신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고, 그중 홍 이사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의 안락과 생존을 택했을 뿐이다.
“경호팀은?”
“삼십 명 전원, 상시 대기 중입니다.”
경호팀은 아레스 길드 내에서도 특별 선별한 정예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A급 헌터로 이루어져 있어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충성심도 뛰어났다.
갑작스럽게 모시는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살인 정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결할 머슴들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지.’
고세원은 내심 중얼거렸다.
이정룡의 밑에 있으면서 온갖 더러운 일에 손을 담갔던 그다.
가끔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환멸이 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덕분에 남들은 평생 꿈도 꿀 수 없는 재산을 모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지금의 아내를 만나 늦장가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일했나.’
허기를 잊은 자의 위선인지,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환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들과 얼마 전 둘째를 임신한 아내 때문일 수도 있다.
‘송천우. 그 양반 막내 손자가 딱 우리 상호 나이였지, 아마.’
부하들에게 아직 말도 못 하는 어린애를 납치하라는 지시를 전달할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묘했다.
‘아니, 납치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근 한두 달 사이, 석고준은 사람이 달라졌다.
극도로 난폭해진 그가 이후에 무슨 일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토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이정룡조차 아이는 건드리지 않았는데…….
“고 팀장.”
생각 도중 들려온 상관의 부름에 고세원의 허리가 꼿꼿이 펴졌다.
“예, 부길드장님.”
“경호팀 준비시켜.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조금 전과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에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잠깐의 침묵 끝에, 고세원의 입술이 열렸다.
“예.”
“최대한 빨리 결과를 받아 봤으면 좋겠는데. 너무 큰 바람인가?”
이미 고세원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 역시 어차피 결국 같은 똥통 속의 똥일 뿐이다. 한 번 진흙탕에 발을 담근 이상.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닙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좋아. 나가 봐.”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굳은 다리를 움직여 집무실을 벗어난 고세원은 귓가에 손을 가져갔다.
삑.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잠시 꺼놨던 통신기에 불빛이 들어왔다.
“현재 인원 보고.”
짤막한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통신기 너머로 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 1팀 전원 대기 중. 이상 무.
– 2팀 전원 대기 중. 이상 무.
– 3팀 전원 대기 중. 이상 무.
세 개 팀을 합쳐 총합 서른. 최고만 모인다는 아레스 길드 내에서도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다.
경호팀장답게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고세원도 이들 중 다섯 이상이 뭉치면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이니, 상대가 아무리 철저히 방비해 뒀다 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부길드장님 명령이다. 한 시간 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집결 장소로 이동. 최종 목적지는…….”
순간 멈칫한 고세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국, 런던이다.”
이번 여행에는 여권이 필요 없다.
고도의 환영 마법과 특수 분장으로 얼굴과 이름, 심지어는 지문까지 감춘 그들은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장거리 텔레포트 마법진 앞에 집결했다.
그리고 휘황한 빛무리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화아아악!
* * *
다음 날 아침, 석고준은 자신의 경호팀장으로부터 기대하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성공입니다. 경호팀 총원 삼십 명 중 사망자 둘을 제외한…….”
“송천우의 가족들은?”
“……모두 무사히 생포했습니다. 기존 경호 전력으로 위장한 1, 2팀이 남아 저택을 점거하고 감시 중입니다.”
“잘했어. 역시 고 팀장이야.”
“팀원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최대한 이점을 살려 기습했습니다만, 예상외로 저택의 경비가 삼엄했던 탓에 사망자가 둘이나…….”
“괜찮아. 뒤처리는 문제없이 했겠지?”
짧은 침묵 끝에, 굳게 닫혀 있던 고세원의 입술이 열렸다.
“예. 통신망도 장악했고, 현혹 마법으로 모든 암어와 보고 체계를 알아냈으니 저쪽에서 연락이 오더라도 크게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예상 유지 기간은?”
“최대 나흘입니다.”
“그 정도면 일을 마무리 짓기에는 충분하지. 송천우, 그 늙은이한테 연락 넣어. 곧 있으면 설날인데,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곧 마주하게 될 늙은 배반자의 표정을 상상하며 소리 내어 웃던 석고준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고. 고 팀장.”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상관을 응시하던 고세원이 재빨리 안색을 고쳤다.
“예, 부길드장님.”
“미안하군. 워낙 기분 좋은 소식을 들어서 깜빡 잊고 있었어.”
“아.”
“고 팀장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이해하지?”
“아닙니다!”
조금 전보다 힘찬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사람이 변했어도 이럴 리는 없지.
내심 중얼거린 고세원은 기대하던 말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뒤이어 들려온 석고준의 한 마디에 우뚝 굳어 버렸다.
“항상 고생이 많다. 이건 따로 넣어 둬.”
“……!”
스윽.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새하얀 봉투.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적잖은 금액이 적힌 수표가 들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아마도 최소 백억 이상.
하지만 고세원이 바란 것은 금일봉이 든 봉투가 아니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부길드장님.”
봉투를 공손히 받아 든 고세원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대리석 표면에 비친 어떤 사내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어느덧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무공은 수많은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찌르고, 베고. 때리거나 후려친다.
이와 같은 동작이 연결된다면 비로소 초식(招式)이라 부를 수 있다.
쉭, 파앙!
허공을 향해 내지른 일권(一拳). 압축된 공기가 터지고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나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상대를 향해 초식을 이어 나갔다.
쉬쉬쉭! 스악!
지금껏 직접 보고, 체득한 깨달음이 초식에 스며든다. 자연스럽게 연계되며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초식의 연결. 바로 투로(鬪路)다.
퍼버버벙!
손날. 팔꿈치. 어깨. 신체의 모든 부위가 회전하고 비틀리며 사방을 때렸다.
무공을 배우며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 있다면, 무기라는 단어는 비단 날붙이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을 상처입힐 수 있는 모든 것이 무기.’
그렇기에 단련은 중요하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목을 부러트릴 수 있고, 녹슨 조각칼로도 바위를 가를 수 있다.
후웅. 쾅!
번개처럼 내리꽂힌 발뒤꿈치가 지면을 강타한다. 단단한 외피를 지닌 A급 몬스터라 해도 즉시 두개골이 부서졌을 일격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 쓰러트려야 할 적은 없다.
백여 명, 혹은 백여 마리에 달하는 적들의 시체는 내가 그려 낸 상상 속의 허상일 뿐이니까.
“후우…….”
작게 숨을 내뱉은 그 순간.
짝짝짝.
등 뒤에서 누군가의 힘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