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657
#656화
사방이 고요했다.
시신을 수습하던 전사들.
지금 막 도착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부족장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서요부(西瑤部)의 모두가 움직임을 멈춘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죄인이 제 발로 걸어 나오는군.”
적막을 깨트리는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백상의 눈동자를 마주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섬광처럼 찾아온 깨달음.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백상이 인사말 대신 건넨 한 마디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으니까.
‘죄인이라.’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나 또한 흉수의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등잔을 들어 멀리 비춰 볼 것이 아니라, 발밑부터 살펴봐야 했었다.
“백 숙부, 그게 무슨…….”
의아함이 담긴 눈빛으로 백상을 바라보던 야율목이 뭔가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고, 어쩌면 나보다도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을 남호는 작게 탄식했다.
“허, 나도 늙었군. 이런 얕은 수작에 걸려들 줄이야.”
남호의 말은 절반만 맞았다.
이건 분명 얕은 함정이었지만, 그 아래에 파 놓은 구덩이는 깊을 것이다.
한 번 발을 디딘 이상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빌어먹을.’
늪에 잠긴 기분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입안은 모래라도 씹은 것처럼 까끌거렸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어느덧 재판장이 되어 버린 주위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느껴졌다.
“지금 백상 대족장님께서 하신 말씀 들었나?”
“죄인이라니. 그럼 설마 저 한족이……?”
곳곳에서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전사들. 이 자리에서 저들의 위치는 참관인이다.
“내 진즉 이럴 줄 알았지. 그러니 처음부터 한족들을 내치자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으음. 그래도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오.”
“속단은 무슨.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감히 이런 짓을 벌일 만한 흉수는 진태경, 저 작자뿐일세!”
속삭이는 전사들과 달리, 언성을 높여 내 죄를 성토하는 부족장들은 배심원들이다. 그리고…….
“당당하군. 마치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처럼.”
백상. 모두의 앞에서 입을 연 그가 이 빌어먹을 재판의 판사다.
나는 덤덤하기 그지없는 백상의 표정을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당당할 수밖에 없지. 나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예의 따위를 논하는 게 우습다.
짤막한 내 대답에 부족장 중 하나가 발끈한 얼굴로 호통쳤다.
“놈! 감히……!”
“감히. 뭐?”
스아아아!
말과 동시에 흘려 보낸 기파(氣波)가 부족장을 향해 쏘아지자, 앞으로 나선 부족장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들었다.
“흡.”
이미 백척간두(百尺竿頭)다.
단 한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추락하는 상황.
흐름에 따라 주도권을 내어 준다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나는 조용하게, 그러나 강대한 기파를 흘려 보내며 입을 열었다.
“개나 소나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찌그러져 있어.”
“……!”
꿀꺽.
그리고 누군가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인 그 순간이었다.
“소란스럽군.”
묵직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울려 퍼진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사람들의 시선 끝에, 모두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요서부의 대문을 넘어 걸어오고 있었다.
‘야수묘왕.’
부릅뜬 호목과 산등성이처럼 장대한 체구.
흡사 태산과도 같은 중압감을 뿜어내는 야수묘왕의 등장에 좌중의 인물들이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궁주를 뵙습니다!”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외침.
이와 같은 모두의 경외 속에서, 또 다른 부족장들을 거느린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야수묘왕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앞서 말한 그 개나 소에 나도 포함되느냐?”
누구에게 던진 물음인지는 명백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다.”
깊게 가라앉은 야수묘왕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태원진가의 진태경.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이 참사와 네가 어떤 연관이 있느냐?”
야수묘왕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추궁이나 의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기 위해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즉각 내뱉은 내 대답에 곳곳에서 수군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야수묘왕을 향해 묵묵히 예를 표하던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지난해, 서쪽 숲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만취한 백족 전사들의 부주의로 벌어진 문제였고, 그로 인해 이백여 마리의 가축과 삼십여 개의 가옥이 불탔지.”
백상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죄를 지었다면 필벌(必罰)은 마땅한 것. 하여 이 손으로 직접 동족의 전사 일곱을 베어야 했다. 한데 처형 전 유언을 남기라 일렀더니, 하나같이 이리 말하더군.”
감정을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백상의 목소리는 야수묘왕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결백하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불도 지르지 않았다.”
“……!”
“다름 아닌 내궁에서 두 명의 대족장이 사라지고 백여 명의 전사가 몰살당했다. 이는 얄팍한 말 한마디로 면피(免避)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야수묘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고, 나는 백상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듣고 있자니 기분 묘해지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흉수가 된 것 같고.”
“정말로 결백하다면, 입증해라.”
“입증?”
“그래.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이지. 네가 흉수가 아니라는 증거를 댄다면 해결될 문제일 테니까.”
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었다.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돌아선 백상이, 오가는 대화에 웅성거리던 좌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었다.
“나, 백족의 대족장 백상은 죄인을 추궁하기에 앞서 스스로 결백함을 밝히고자 한다. 이는 하늘과 땅, 그리고 나와 함께 있던 열다섯 명의 부족장을 비롯한 일백의 전사들이 입증할 것이다!”
“……!”
빌어먹을.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나?
백상이 충분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두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그 사실을 밝히는 시점과 흐름이 너무나도 절묘했다.
그리고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백상을 따르는 부족장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궁주께 아룁니다. 백상 대족장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며, 그는 연회가 끝난 직후 우리와 함께 남백부(南白部)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경파족장의 말이 옳습니다! 저를 비롯한 납호족(拉祜族) 역시 하늘에 맹세합니다!”
“와족도 백상 대족장의 말을 보증하겠습니다! 참극이 벌어질 무렵, 우리는 내일 대회의를 대비한 회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부족장들의 호응에 내 뒤에 서 있던 남호는 침음성을 흘렸고, 야수묘왕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절반에 달하는 부족장들이 스스로 특정 파벌에 가담했음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야수묘왕을 포함한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없었다.
남만야수궁. 그것도 다름 아닌 내궁에서 두 명의 대족장이 사라지고 일백에 달하는 생명이 참혹하게 몰살당했으니까.
이건 엄청난 중대사다.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린 파벌 싸움 따위는 잔물결로 취급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태원진가의 진태경. 이제 네게 묻겠다. 그때 넌 어디에 있었느냐?”
피할 수 없는 질문. 거부할 수 없는 대답.
느껴진다. 백상의 물음이, 사람들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되어 내 전신을 옭아매는 것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닿은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
툭.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 손길의 주인이 아까부터 줄곧 내 등 뒤에 서 있던 남호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남호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
나는 감각을 최고조로 곤두세운 채 계속해서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꼈다.
비록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옷깃을 스치는 정도의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나는 이내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그것은 글씨였다.
짧지만 분명한 뜻을 품고 있는 두 글자.
‘무언(無言).’
남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전하고 있었다.
혹은, 지금 하려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상황이 불길하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만약 내가 흑웅과의 만남을 사실 그대로 말한다면?’
그래도 믿어 줄지 의문이다.
아니, 되려 백상과 그를 따르는 부족장들에게 역공당할 가능성이 크다.
흑웅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거처를 빠져나왔다고 했고, 축골공(縮骨功)을 이용해 모습마저 바꾼 상태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입증할 수가 없어.’
최소한 흑웅이 이 자리에 있다면 모를까, 그가 남겨 두고 간 손목이 증언을 해 주지 않는 이상 내 알리바이 입증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자리를 비웠다고 말하는 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다.
그러니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소.”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사이에 흘러간 시간은 짧았다. 그리 늦지 않게 대답한 나는 심호흡하며 말을 이었다.
“연회가 끝난 직후 처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습격을 받았고.”
“습격?”
아직 이에 관한 소식을 들은 이보다, 듣지 못한 이들이 더 많다.
새로운 소식에 좌중이 웅성거리자 야수묘왕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태경의 말은 분명 사실이다. 나 역시 부족을 분간할 수 없는 살수들이 저들을 노렸다는 보고를 들었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동요하던 야율목도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저를 비롯한 내궁 호위들 일부가 한 식경 전쯤 현장에 도착했고, 주위를 순찰하던 전사들이 죽은 것 또한 확인했습니다.”
야수묘왕에 이어 야율목까지 거들고 나서자, 주위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줄곧 한 사람, 백상을 응시하던 나는 다시 한번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궁에서 또 다른 참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차가운 목소리. 무덤덤한 눈빛.
나직하게 뇌까린 백상이 야율목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간단히 내궁에 침입하여 순찰을 돌던 전사들을 제거하고 습격을 벌이다니.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살수들이 제법 강했던 모양이군. 그렇지 않느냐?”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야율목의 입술이 열렸다.
“그렇습니다. 살수는 삼십여 명에 달했는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예 전사 못지 않았…….”
야율목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 이어질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모두의 귓가를 파고드는 백상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화왕의 진전을 이은 초절정 고수를 죽일 만큼 말이냐?”
“……!”
“……!”
“만약 이 서투르기 짝이 없는 암살 시도가 진태경의 발을 묶기 위함이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가만히 놔둬도 처소에 머물러 있었을 자를 구태여 건드려 이목을 끈 셈이니까. 생각할수록 희한하지 않느냐?”
좌중의 공기가 요동치고, 크게 뜨인 수십여 쌍의 눈동자가 쏘아 보내는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린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마음은 되레 담담해졌다.
이 위기를 빠져나올 자신이 있어서?
아니다. 나는 이미 반쯤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함정은 크고 깊었다. 내 생각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가 계획이었던 거지?’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담아 백상을 응시하던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이대로 끝은 아닌 것 같은데.”
즉각 말뜻을 알아들은 백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이 좋군.”
“더 할 말이 남았나?”
“아니. 그 대신 보여 줄 것은 있지.”
딱.
건조한 대답과 함께 백상이 손가락을 튕기자, 반쯤 부서진 요서부의 대문으로부터 희미한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저벅저벅.
보폭이 짧고 불규칙하며, 걸음이 느리다.
마치 병에 걸린 사람처럼. 혹은…….
‘나이 지긋한 노인처럼.’
왠지 모르게 낯익은 인기척의 주인을 알아차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눈을 떴을 때.
“배, 백족의 우투리. 대족장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서요부의 대문 앞에는 소면 가게의 늙은 주인장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