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13
#812화
저벅.
힘이 실린 발끝을 따라 뭉개지는 흙을 느끼며, 진태경은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발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진 이유는 밤이 깊어서일까. 아니면 날카롭게 곤두선 전신의 감각 때문일까.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제부터 진태경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이 길고 좁은 협곡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진?”
순식간에 무거워진 공기 속,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진태경을 바라보던 매직 존슨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까마득한 솟은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달빛 아래, 어느덧 출구를 가로막은 인영이 황금빛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스켈레톤 킹.
소리 없이 달싹이는 입술이 인영의 정체를 뇌까린다.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깨달은 대마도사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이건…… 무슨 의미지?”
“딱히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몇 가지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요.”
부드러운 어조와는 달리 서늘한 눈동자.
저 멀리 보이는 독수리의 존재는 이미 뇌리에서 까맣게 지워진 후다.
매직 존슨은 진태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급한 문제가 아니라면 나중에 확인해 보지 그래?”
“급한 문제입니다. 반드시 지금 확인해야 할.”
“신중함은 리더의 덕목이지. 하지만 내 생각에 지금은 적당한 시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하지만 바로 그 시기를 판단하는 게 리더 아닙니까.”
잠시 침묵하던 매직 존슨이 문득 실소를 흘렸다.
“맞는 말이야, 진. 네가 이렇게 말솜씨가 괜찮은 녀석일 줄은 몰랐군.”
“가끔 느끼는 건데, 시험 성적과 아가리는 별개더라고요.”
그런 그를 따라 흐릿하게 웃던 진태경이 불쑥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겐지.”
“예, 예?”
매직 존슨의 곁에서 눈치를 살피던 야마모토 겐지가 갑작스러운 호명에 화들짝 놀랐다.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챘다.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는 그를 향해 진태경이 턱짓했다.
“불편해 보이는데, 이쪽으로 와. 괜히 신경 거슬린다.”
“하, 하잇!”
야마모토 겐지는 매직 존슨을 힐끔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거구의 대마도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내 후다닥 뛰어 진태경의 옆에 섰다.
“저, 저기. 진 사마.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입 다물어.”
담담하게 대답한 진태경이 매직 존슨을 응시했다.
그는 급변한 상황 속에서도 안색 하나 뒤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거친 바위에 앉아 있었다.
“존슨.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죠?”
뜬금없는 물음이다. 그러나 매직 존슨은 순순히 대답했다.
“아크 리치 토벌전. 아직 일 년도 안 됐지.”
“기분이 이상하네요. 벌써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그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이제 두 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그러게요.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진태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 년, 아니 일 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조금 특출난 F급 헌터에 불과했다.
각성과 함께 운명처럼 정해진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좁고 곰팡내 나는 고시원 방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작년 여름.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해고 통보.
그리고……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고물 캡슐.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밤, 고물 캡슐은 겁도 없이 자신의 안으로 기어들어 와 잠을 청한 멍청이를 새로운 세상으로 내던졌고, 진태경은 울타리를 벗어나 운명을 바꾸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한 것 같아요. 내가 직접 겪어 보니까 그렇더라고. 그런데 웃긴 점이 뭔지 알아요?”
진태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말과는 달리 희미했던 미소마저 지워 낸 그의 입가는, 매직 존슨이 걸터앉은 바위처럼 거칠고 딱딱했다.
“그런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을 수없이 겪고도, 좀처럼 상상력이 늘지 않는다는 거.”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가 지구에 강림했다. 수많은 몬스터가 도시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했다.
오 년간의 대전쟁 끝에 인류는 승리를 거머쥐었고 더욱 찬란하고도 거대한 문명을 건설했다.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불과 수십여 년 전 모두가 겪었던 일이다.
비록 진태경은 그 시대를 겪지 못했으나, 차원을 넘어 두 개의 세상을 오가며 숱한 경험을 쌓았다.
“가끔 느끼는 건데, 상식이라는 게 참 무서워요. 자꾸 정해진 틀 안에서만 생각하게 되니까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더라고.”
진태경은 언제 꺼내 들었는지 모를 단검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매직 존슨이 침묵을 깨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상상력을 좀 더 발휘했나?”
“네. 지금까지의 일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 봤죠. 천천히.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진, 인간은 객관적일 수 없어.”
매직 존슨의 말이 맞다.
사람의 판단은 항상 주관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지구상의 그 어떤 생물체보다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동물이기에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력하는 것쯤은 가능하더라고요. 내가 아는 정보,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최대한 덜어내면서.”
“그래, 객관적인 시선을 갖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 그게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이야.”
“음.”
진태경이 입술을 핥았다.
“지금 발언은 좀 위험한데요.”
“어느 부분이?”
“글쎄요. 마치 본인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매직 존슨의 투명한 눈동자에 진태경이 비쳤다. 문득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실소가 짧은 침묵을 깨트렸다.
“그래, 진. 결국 목적은 이뤘나?”
“아마도.”
진태경이 무엇을 위해 그런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 목적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매직 존슨도 이미 알고 있다.
“선지자.”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흘러나간다. 진태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가장 크게 연관이 있는 놈부터 생각했죠.”
“미카엘 실베르트. 둘의 연관성을 생각하자면 당연한 수순이겠지.”
“후긴은 선지자를 무닌이라고 했어요. 그것도 다섯 번째 무닌. 몇 번이나 부품처럼 교체되며 지금의 미카엘 실베르트를 있게 만든 존재 중 하나. 거기에 더해 인간의 것이 아닌 마법을 쓰기도 하죠.”
“바로 그 이유로 몬스터라고 짐작했지.”
“맞아요.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 후긴이 다섯 번째 무닌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겨우 삼 년 전인데, 미카엘 실베르트는 이미 대격변 당시부터 조금씩 마력을 다루고 있었다는 게.”
“그게 뭐가 이상하지?”
“당연히 이상하죠. 인간 주제에 마력과 마나를 공존시킨 미친 짓인데. 지금의 나도 못 하는 걸 삼십 년 전의 그놈이? 말도 안 되지.”
그때, 진태경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진짜 몬스터가 도와주지 않는 이상은.”
매직 존슨이 멈칫했다. 진태경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앞뒤가 안 맞더라고요. 삼 년 전과 삼십 년. 중간에 너무 비잖아, 시간이.”
“…….”
“고민 끝에 한 가지 답이 나왔어요.”
진태경은 단검으로 턱을 긁적였다. 일주일째 면도를 하지 않아 듬성듬성하게 자라난 수염이 날카로운 칼날에 긁혀 잘려 나갔다.
“선지자는, 다섯 번째 무닌이 아니다.”
서걱.
미세하게 베인 턱 끝에서 핏방울이 굴러떨어진 순간. 서늘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삼십 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무닌은 단 한 사람이었다.”
“……!”
“……!”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진태경은 단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쯤 되니까 이제야 좀 앞뒤가 맞더라고. 무슨 씨벌, 인형 뽑기도 아니고. 그 정도로 강하고 충성심 강한 애들이 몇 년 주기로 튀어나오는 게 이해가 안 됐었거든.”
눈을 부릅뜬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야마모토 겐지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그렇다는 건…….”
“그래, 선지자는 미카엘 실베르트에게 마력을 다루는 법을 알려 준 스승이면서, 각자의 목표를 위해 돕는 협력 관계였어. 그리고 삼십여 년 전부터 충분히 엄청난 강자였겠지.”
흩어졌던 조각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는다. 진태경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무수한 조각들을 더듬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열.
맞는 모양에 따라 빈칸을 채운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모습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랬다. 이건 누군가의 초상화인 동시에, 퍼즐이었다.
하지만…….
‘부족해. 한참이나.’
이 거대한 퍼즐을 맞추기에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이 남았다.
한 조각이라도 잃어버리면 퍼즐은 완성되지 않는다. 하물며 듬성듬성 비워진 이 빈 공간을 채워 넣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태경 혼자만의 힘으로는.
“존슨.”
진태경은 불쑥 입을 열었다.
어느새 바위에서 몸을 일으킨 대마도사의 그림자는 거대했고, 그가 손에 쥔 스태프는 달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뭐든, 진.”
“왜 지금까지 나를 도왔습니까?”
“친구니까.”
“지크프리트 바스만처럼?”
매직 존슨이 스태프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마지막까지 망설였어요. 사실 지금 이 순간도 확신이 서지 않아요. 몬스터가 마나를 사용하고, 포션까지 쓴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어.”
우우웅.
스태프 끝에 달린 마정석이 진동했다. 대격변 당시 도시 하나를 단신으로 몰살시켰던 괴물을 죽이고 얻은 S급 마정석이다.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그 거대한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진태경은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 했던 말, 기억해요?”
매직 존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인간은 객관적일 수 없다.”
“그 말이 맞았어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보니까, 주관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누구나 그래. 좀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저 친구도 마찬가지지.”
매직 존슨이 자신의 등 뒤를 턱짓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황금빛 왕관을 쓴 스켈레톤 킹의 등 뒤로, 협곡을 가득 메운 수백의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럼 다른 병력들을 동쪽으로 보낸 건…….”
“괜한 사람들이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훌륭해. 이게 네 판단인가?”
“네, 하지만…….”
손에 쥔 단검을 들어 올리며, 진태경은 말을 이었다.
“단순히 주관적인 판단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 순간.
화악.
진태경의 두 눈에서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럽게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빛을 마주한 모두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지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 빛을 불러낸 것도, 원한 것도 진태경 자신이었으니까.
콰직, 푹!
빛살처럼 나아간 단검이 갑옷을 부수고, 살과 뼈를 찢는다. 진태경은 비틀거리는 야마모토 겐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뭐 하는 새끼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뜬 야마모토 겐지가, 아니 선지자가 히죽 웃었다.